◇‘멕시코 文明展(문명전)’을 보고 생각한다.

  부러 촛불을 밝혀 세운다. 굳이 ‘일부러’라기보다는 오늘 낮에 내 앞에 있었던 것들을 다시 눈앞에 살려 보고자함이다. 어쩌면 이 촛불의 모습과 正午(정오)의 천연한 影像(영상)들이 서로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마야를 생각한다. 그 土器(토기)들을 생각한다. 그 빛깔을 생각한다. 역한 냄새가 풍기는 뭉클한 핏덩어리를 생각한다. 히브리의 천이 보인다. 노예의 紋身(문신)과도 같은 그 붉은 색이. 그 불가사의의 찬란했던 文明(문명)이 내 가슴에 흐늘히 젖도록 초라함은 무슨 까닭에설까? 우리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文明(문명)을, 文化(문화)를 생각하기 이전에 그 주인공들을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어떤 나라, 어느 족속으로서의 그늘이 아니라 단순히 옛날 옛적 지구 한 모퉁이에 살다간 사람들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의식을 갖지 못한 생활인으로서의 그들만이 내게 보였던 모양이다.
  古代(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人類(인류)는 한 모습을 보인다. 인간의 ‘創造(창조)’ 이전이기 때문이다. 神(신)이 만들어낸 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선지 마야는 滿洲(만주)벌을, 홍해를 생각나게 했다. 이집트의 太陽巨石文化(태양거석문화)와 바다를 가르던 출애굽기를 읽어낼 수도 있었다. 마야의 휘황했던 빛이 아쉽게 스러진 이유 중엔 아치型(형)을 찾아내지 못한 탓도 들어가리라는 J․브로노브스키의 추론은 묘하게 꼬리를 물게 만든다.
  人類(인류)의 歷史(역사)를 꾸며 내려온 세 가지가 있으니 길, 다리(橋(교)), 메시지(Message)가 그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발전시켰던 민족은 성했고 그렇지 못한 민족이 쇠했음은 물론이다.
  아치型(형)이 그들의 발전에 주효했음도 뻔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가 된 것은 메시지의 문제였다. 더욱이 神(신)에게로 뜻을 전함은 숨 쉬는 일 다음으로 중했다.
  아니, 그것과도 같았을 일이다. 양식도 하늘로부터 받아먹었을 것이요, 그러다가 죽은 뒤에는 하늘로 돌아갈 것으로 믿었을 것이니 말이다. 고대 멕시코의 조각품들 中(중)에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위한 작업의 손길이 여기저기서 눈에 뛴다.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의 그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집트語(어)의 ‘조각가’는 ‘영원히 살아 있게끔 하는 者(자)’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것들은 거의 肉化(육화)된 의식이었으리라.
  더욱 섬찟하게 만든 것은 앙상한 骸骨(해골)의 형상들이었다. 각양각색의 포우즈와 표정을 지닌 그것들은 아예 보는 이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다 벗어 던지고 동료가 되라는 듯이. 예수의 苦像(고상)을 떠올려 본다. 석가의 雪山(설산)수행을 생각해 본다. 다시 영혼의 문제를 생각한다. ‘영혼의 모든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물질에 있어서의 重力(중력)의 법칙과 유사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다만 恩寵(은총)만이 여기서 제외된다.’는 시몬느 베이유의 말을 생각한다.
  A․D 9C경의 색깔들을 생각한다.
  우리나라 무당의 천한 굿을 생각한다.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익명인들을 생각한다. 멕시코의 현대미술을 생각한다. 혁신의 색깔을 본다. 스페인風(풍)의 정열에 찬 사람들을 만난다. 좌절도 만난다. 상실과 체념, 용기와 이념을 읽는다. 검은색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들의 수천 년과 우리의 그것을 나란히 세워 본다. 아주 옛적과 낙랑의 흙항아리와 백제의 질그릇과 고려, 이조의 자기를 새겨 본다. 우리가 갖고 있는 마야를 생각한다. 그 사람들을 찾으러 간다. 아직 주물 속에 채워지지 않은 뻐얼건 쇳물을 생각한다. 무엇이나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血肉(혈육)을 생각한다. 눈물겨워진다. 모든 걸 떠나 ‘호모(Homo)’ 어쩌구 할 때의 사람으로 보여진다. 알몸이 만져진다. 한 조각이 아닌 전체가 소용이 닿기에 사랑스러워진다.
  촛불이 거의 타들어간다. 바닥에 질펀하게 퍼졌다, 그대로 놔둘까 하다가 꺼버린다. 전깃불을 켠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