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인생론에 登場(등장)하는 ‘미하일’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 그 答(답)을 求(구)하다가 사랑이란 걸 깨닫고 아주 우아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表現(표현)된 조용한 웃음은 그 사랑이란 것의 내용만큼 아늑한 것이어서 그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잔잔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우리는 바쁘고,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人情(인정)을 많이 그리워한다. 인정이란 물이 흐르듯이 自然(자연)스런 사람사랑인 것인데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없어 소슬한 바람처럼 길을 떠나 한가해 보이는 시골의 논두렁에서나 겨우 接(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단단한 껍질을 지닌 우리의 심장은 에누리를 당하기엔 전연 길들여 있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그를 아주 절실하게 아끼고 그리워하는데, 그는 그런 나의 속사정을 모른다라는 속단과 뜻있는 대화의 不在(부재)에서도 冷情(냉정)이 아닌 非情(비정)을 發見(발견)하게 된다.
  어울리지 않는 사랑타령이 무어냐고 反問(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이 믿음과 직결되는 데에서 문제가 파생되는 것이다.
  물론 ‘사마리아’의 女人(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모순이나 잘못을 줄곧 자라게 하는 것 보다는, 좀 괴로운 일이지만 서로 反省(반성)을 하는 것이 나은 앞날을 기약케 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오늘날 선진국의 반열에 서서 사람대접을 톡톡히 받는 나라의 百姓(백성)은 믿는 힘이 괜찮은 편에 속해서 비교적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카리스마的(적) 존재라거나 특별한 우상을 숭배하는 믿음보다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이 빼어나서이다. 내가 잘나고 네가 못나서, 네가 잘나고 내가 못나서의 질시도 아닌 막연한 不信(불신)이 우리시대의 한국을 가득 채우는 것도 사랑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 祖上(조상)님네가 지녔던 좋은 삶의 方法(방법)을 우리시대에는 누구나가 없이 잃어버릴 위기에 와 있다. 그런 책임의 소재는 누구보다도 이 時代(시대)를 살아야 하며 발전시켜야 할 우리 大學生全體(대학생전체)에게도 있지만, 實質的(실질적)으로 책임보다도 권리를 행사하는 政治家(정치가)에게 있다.
  國軍(국군)은 北進(북진)한다며 南(남)으로 달아난 뒤 한강철교를 폭파해버린 그때의 政治家(정치가)로부터 萬古(만고)의 淸白吏(청백리)인양 떠들어대던 부정축재자까지 어느 누구도 한국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든 책임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否定(부정)하기보다, 우리의 時代(시대)에는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여 믿음으로 살았다는 역사적 評價(평가)를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이웃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학문을 연구하듯이 수행의 정신으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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