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痴(백치)의 잠 <完(완)>

  은하의 집 마루방의 한 쪽 모서리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앉아서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좌절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걸려 남아서 지워지지 아니하였다. 내가 만약 좌절하고 있다면 나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인가? 여기서 내 모든 것의 종말을 시인하고 내 삶까지도 마감해야 할 것인가? 은하가 내 무릎위에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가만가만 눈물을 닦았다.
  ‘그런 모습은 싫어요. 그건 아무래도 믿을 성 없는 꼴이어요. 당신이 용감한 사람이 되길 원해요’
  나는 고개를 탁자 위에 떨구고서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 마음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맑은 눈물들이 한 방울 두 방울 양 볼을 타고 내려왔다. 나의 불행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 묵언의 틈새에서 내게로 내미는 따스한 손들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남들의 관심이 싫었다. 나는 언제나 내 신념의 한 부분의 성취를 위해서 노력하려 했으니까, 구태여 그들의 고집스런 관심거리에서 제외되어도 좋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믿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절로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좌절의 시인도 극복도 아닌, 좌절과의 결별만이 쉽게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눈물을 떨구어 낼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은하야, 사랑하는 은하야, 안녕, 안녕하고 작별의 인사말이 수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리고 나는 절로 떠나왔다.
  도시가 눈앞에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어둠 속의 빛들이 보다 크고도 명료하게 보였다. 그 빛이 숨기고 있던 건물들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아크릴 간판과 쑈윈도우의 수은등, 그 안의 진열품들, 바나나, 귤 등의 과일가게 앞을 바람처럼 질주하는 자동차를 차창안에 희끗희끗 내다보이는 표정 없는 군상들, 이 모든 것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가깝게 건너다 보였다.
  그때, 내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그건 은하가 여적도 날 사랑하고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진작부터 이 생각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내 손은 이미 은하와 굳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그건 오래고 오랜 갈망에 대한 뜨거운 만남이었다. 그래 헤어지지 말자. 결코 우리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해선 안된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 끝에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아직 나는 아무렇게도 변하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생각이 콩콩거리며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정작 나는 어떤 결정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아스팔트의 도로에 내려서서 상가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소란한 도시의 소음이 웅얼웅얼 내 귓가를 맴돌았다. 그것은 사방에서 날 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난 어리둥절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내부에 침잠해있던 감정의 실마리들이 활기를 되찾아 뛰쳐나가려고 버둥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은하의 온몸에 돋는 날개처럼 여겨졌다. 돋아난 날개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정하고 투드득 거리며 날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갈라진 도시의 길 한 모퉁이에서 정작 나는 갈 곳을 잊은 어린 양의 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흡사 위험한 절벽이 숨어 있는 듯 가슴이 설레었다. 고무줄이 늘어나듯 전신에 팽팽한 긴장이 일었다. 고무줄은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에서 더 이상의 팽창력을 잃고 거친 호흡을 가름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낡아서 보드라워진 몇 장의 지폐가 만져졌다. 전혀 필요 없던 것으로만 여겨졌던 그것들이 비로소 이 순간을 위해서 내 호주머니를 기어 나왔다.
  술집은 조용하고 한산하였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천정에서부터 길게 내려와 앉은 탁자에는 숨가쁜 동작의 반복만이 짙은 그림자로 돋보였다. 따르는 것과 마시는 것의 움직임이 연속적으로, 그리고 저절로 이루어졌다.
  나는 그 다음 순간, 팽창됐던 고무줄이 흐물흐물 무너지듯이 무너져 내리는 육신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음과 육신은 자꾸만 이탈되어 가고, 팔의 근육은 힘에 겨워서 퍼득퍼득 떨었다.
  나는 공중전화대 앞으로 다가갔다. 다이얼을 돌리는 손끝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발신음이 멀고도 깊게 흘러나갔다.
  ‘처사님, 인사드리고 싶어 전화했어요’
  ‘그래 서울로 가겠나? 부디, 잘 가게’
  ‘안녕히’
  ‘아, 근데 자네 아까 온 편지를 놓고 갔더군, 뜯지도 않고서, 잠시만.... -그 사람과 결혼할 것을 포기하였어도, 아무래도 제 마음을 속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괴로웠어요.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릴 참이어요.-’
  나는 슬그머니 수화기를 놓았다. 그리고는 힘을 모아서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고 다짐하였다. 한 마디 한 마디 똑똑한 발음으로 뇌까렸다. 은, 하, 사, 랑, 한, 다, 그와 동시에 나는 전화대 밑으로 주르르 주저 않았다. 내가 도착한 마지막 지점이 이곳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몸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 버렸을 때처럼, 나는 자유롭게 홀의 바닥에 뉘어졌다. 눈가엔 밋밋하고도 단조로운 어둠이 고요히 찾아왔다. 내 외부로 향한 모든 문들은 활짝 열어젖뜨리고서 한 바람처럼 아무데나 찾아나서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 꿈속에서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펼쳤다. 허공에 걸린 손가락의 끝에서 반지 하나가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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