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修習이고파

  * 또 하나의 책임감에 어깨를 움츠리고...

  처음 신문사를 알고, 처음 내 동료들과 이마를 맞대고 기사를 쓰던 기억은 2·3일전 꼬마記者(기자)였을 적 생각처럼 생생하다. 선배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원고지의 빈 공간을 하나하나 메꾸어 나갔고, 그것이 활자화되어 나타났을 때 나는 또 하나의 책임감에 어깨를 움추려야 했었다.
  내 출입처, 그곳에서 알았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겨우 생각해 낼 수 있었을 때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취재하러 다녀야만 했었고, 하얀 내 기사가 실린 ‘東大新聞(동대신문)’을 들고 난 무척이나 외로워했었다.
  내 이름은 記者(기자). 주소는 東大新聞社(동대신문사). 아직 머리카락조차 채 길지 않았던 꼬마 記者(기자)가 이제는 ‘新聞社(신문사)에다 제 무덤을 파겠습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 뱉고는 부끄러워 얼굴을 돌려버렸다.
  ‘너무 바빠서 同門會(동문회)에, 科(과)모임에, 統計學會(통계학회) 조차도’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모두 ‘못 참석하겠습니다’하며 미안해했던 나날들도 있었다.
  신문사에서 웃고, 신문사에서 울고, 내가 뇌까리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을 이젠 신문사 한 구석에 묻어 버리곤 활짝 가슴을 폈다.
  평소에 날 보기가 그렇게도 어렵다면 통계과 녀석들, 제발 청년회 한번 나와 달라고 충고하시던 운양교회 S 전도사님, 그리고 울산의 Y녀석, 나를 대하듯 東大新聞(동대신문)을 대하고, 나를 아끼듯 東大新聞(동대신문) 활자 하나하나를 사랑해 주렴.
  脫修習(탈수습), 내가 누릴 삶의 전체가 배우고 닦는 과정이기에 난 언제까지나 東大新聞社(동대신문사) 修習記者(수습기자)이고파.

-沈揆博(심규박) 記者(기자) <문리대 통계과>


  *과대망상증의 증후를 발견해 내려...

  눈 밑에 처진 퇴색된 살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근육이 굳어지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빈틈이 없어 보이는 旣成(기성)조직에 적응하려는 나의 숨은 노력을 간단히 무시해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탈수습을 하는 자리에 수습이란 의미를 극소화시켜서 되도록이면 무표정한 不感(불감)상태로 접어드려는 것은 이미 무성하게 자라버린 피해의식 때문이리라,
  한 목표를 성취하고 그 결과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고질적인 본능이 되어버렸다. 이런 탓에 나를 경멸하는 사람들과 싸우기를 회피해왔고 사방에서 뿌려지는 냉담한 시선에 자신을 멸시해야 했다.
  이런 나에게 내려지는 진단은 단순한 정신분열증일 것이라고 단정한 것은 나의 변덕스러움에 기인할 것이다. 한치의 용기나 믿음도 수용하려 않는 내 조그마한 가슴팍에는 의심만이 가득 차 결국 무책임한 냉소로밖에 자신을 위로할 수 없었다.
  나는 가끔 히틀러나 지킬박사와 같은 偏執狂(편집광)으로 변신했으면 하고 공상한다. 그래서 마음 깊이 내재되어있을 과대망상의 증후를 조금이라도 발견해 내려 애써왔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에 대한 無力感(무력감)을 어느 정도 제거해주고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무관심하게 지나갈 수 있는 일들을 기어이 반추해내서 거기로 歪曲(왜곡)된 의미를 붙여 서로의 존재를 거부하려는 단순치 않은 인간들의 속성, 그리고 그들 사이의 갈등, 어느 집단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이러한 갈등은 거의 구제불능적이며 신성불가침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찾아오게 마련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저항해볼 수 없는 한계상황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張吉洙 記者(장길수 기자)<경상계열>


  *시행착오는 불안과 방황을 자초했고

  낯선 異邦人(이방인). 2년전부터 나는 異邦人(이방인)이었다. 사랑할 기력과 함께 일순간에 지나쳐 버렸던 친구의 모습이 요사이 아득하나마 어른거리는 것은 닥쳐오는 추위 때문만은 아니리라.
  우리네 感情(감정)이란 가면을 쓴 채로 타인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의식하지 못했던 單語(단어)들의 나열로 自欺(자기)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기억의 忘失(망실)을 人間(인간)이라는 소이로 넘겨버리고 묵어버린 체념 속에 지쳐버린 작은 몸뚱이를 내던진지 이미 오래였건만 지난 4月(월)의 東大新聞社(동대신문사) 入社(입사)는 나에게 또 한번의 施行錯誤(시행착오)가 아니었나할 정도로 기대에 어긋났었다. 숱한 試行(시행)착오의 양상들을 스스로에 대한 否定(부정)과 대방황을 자초하였던 것으로 돌려버렸던 적이 한두번은 아니지만.
  처음의 삭막했던 社內(사내)분위기는 異民族治下(이민족치하)를 연상케 하였으며, 再考(재고)해보면 지나친 권위의식의 發動(발동) -어느 정도의 권위의식은 必要(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이라든지 후배들의 意見(의견)이 자주 무시되는 등 改善(개선)되어야 할 여러 가지 要素(요소)가 남아 있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이제 時間(시간)과 함께 감각이 무디어졌는지 융화되어 버렸는지 脫修習(탈수습)이라는 자리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은 무척 낯설기만 하다. 주기적으로 회의가 동반되는 우울증에 온 몸이 脫塵(탈진)되는 경우가 계속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記者(기자)’라는 이름으로서 고집을 부려볼 수가 있을 것이다.
  주위 어디선가 서성이고 있을 親舊(친구). 친구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 순간이 氣力(기력)을 되찾아오고 眞實(진실)이라는 추상적 모습을 일체 거부하려 했던 나의 偏見(편견)을 일소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믿어본다. 따가운 東國人(동국인)들의 視線(시선)이 등 뒤에 아프게 와 닿는 것을 意識(의식)해야지.

-許淳氾 記者(허순범 기자)<사범대 국교과>


  *한 세계를 파괴하고 태어난 어린 새

  한 마리 새가 알에서 깨어나려면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파괴되어야 하는 것처럼 6개월 수습이란 일종의 상호계약기간 속에서 부화, 한 마리의 어린 새가 깨어났다. 부리가 약한 새는 날줄도, 모이를 제대로 쪼아 먹지도 못했다.
  세포가 분열을 거듭하여 한 마리 새가 되었음은 쉬지 않은 전진, 노력을 뜻한다. 하나, 자칫 전진 속에서 탈피, 현상유지를 고집하던 때도 있었다. 정성껏 작성한 원고가 자신의 손으로 되돌아 올 때의 섭섭함은 무능력한 자신에게 끊임없는 학대를 가하기도 했으며 노력한 댓가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때면 눈물이 남보다 특별나게 흔한 어린 새는 언제나 눈물을 글썽여야 했다. 아마도 면접 때였으리라. 여자 혼자서 일을 하려면 힘들고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을 거라는 말에 자신 있다고 한마디로 일축했지만 실상은 참 어려운 생활이었기에 신고식 때는 시종 내내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新聞社歌(신문사가)를 배울 때의 초긴장한 모습이란 지금은 웃음을 금치 못할 일이지만 당시는...
  출입처를 돌면서 ‘취재는 해갔으면서 왜 기사화되지 않느냐’는 항의를 받을 때면 마치 어린 새의 잘못인양 마냥 부끄럽고 서러웠었다. 新聞社(신문사)에 있다는 핑계로 몇 번 수업을 빠질 때면 어김없는 科(과)친구들로부터의 항의를 받았고 그 항의는 나태해지려는 자신에게 채찍질이 되기도 했다. 게라, 송고, 조판, 편집, 회의... 이젠 낯익은 낱말들이다. 편집회의 때면 언제나 誤字(오자)로 우리의 동료들과 어린 새는 무안했었지. 어린 새에게 부담을 주던 동판실의 냄새가 이젠 어느 정도 사라져 감은 아마도 적응을 뜻하는 것이겠지. 이젠 딱딱한 것도 먹을 수 있는 부리를,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를 손질해야겠다.

-羅惠淑 記者(나혜숙 기자) <사범대 국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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