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학교를 향한 열망

교무원과 총무원으로 양분되었던 불교계가 1924년에 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면서 휴교상태에 있던 불교중앙학림에 대한 논의도 재개되었다. 중앙교무원은 1925년 말 평의원회를 열어 ‘불교전문학교(가칭)’를 설립하기로 하고 총독부로부터 빌려 쓰고 있던 불교중앙학림 부지를 불하받았다. 자체 부지가 확보되자 중앙교무원은 총독부에 전문학교 설립에 필요한 인가신청서를 제출하고 1926년 말부터 본격적인 건축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학무국은 불교중앙학림이 3·1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항일운동의 온상이 되었다는 점을 들어 전문학교 인가에 난색을 표하였다. 불교계는 전문학교 설립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주장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중앙교무원은 전문학교로의 인가를 포기하고, 불교전수학교로 재차 인가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교무원은 1928년 1월 총독부에 불교전수학교 설립인가를 신청하여, 그해 3월 31일에 인가를 받았다.

불교전수학교는 1928년 4월 30일에 문을 열었다. 개교 첫해에 입학한 학생은 모두 36명이었다. 비록 학교명은 전수학교였으나 입학자격은 전문학교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문학교 설립을 열망하였던 불교계는 전수학교로 인가된 데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이후 불교계는 전문학교 설립인가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 재단의 출자액을 증액하는 등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불교전수학교의 학부는 기존의 본과와 예과 외에 선과(選科)과 특과(特科)를 증설하였다. 이 두 과는 불교 현대화를 위하여 기성 승려들로 하여금 불교과목을 이수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각종 학생활동과 학술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학우회는 1928년에 오늘날의 교지(校誌)에 해당하는 교양지 ‘일광(一光)’을 발간하여 학생들의 연구논문과 문학작품 등을 게재하였다. 또 민족사상의 고취를 위한 전국웅변대회와 민족문화의 연구를 위한 학술강연회, 그리고 매년 2회에 걸쳐 진행된 지방순회 강연회는 수많은 청년학생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학생들의 대표적인 대외활동으로 하계순강단(夏季巡講團)을 들 수 있다. 이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불교 강연 및 계몽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학생들은 영남·호남·관북 등 3개 권역으로 나뉘어 활동을 벌였는데 지역민들의 호응이 대단하였다.

이용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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