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파트 계단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아무래도 10층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기란 아득하였다. 몇 번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숨이 찼다. 도대체 계단을 오르면서 내가 반추할 수 있는 여물은 무엇인가? 고작해야 사경회(査經會)에서 행한 어떤 평신도의 작위적인 간증(干證)이나, 며칠째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외아들의 실종(失踪)을 하소연하는 수다장이 부인의 참담한 표정 따위일 것이다.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입구에는 한 중년의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털이 보송보송한 애완용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여인은 짐짓 경계하는 눈치로 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이런 경우, 여자들의 눈매는 까닭 없는 적의(敵意(적의))를 띠게 마련이다. 허지만 여인의 일별(一瞥)에서 그러한 도전적인 의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인은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큰길에 누군가를 마중하러 나갔다가, 끝내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아 혼자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오는 듯한 쓸쓸함이 엿보였다.
  윙윙거리는 전신음이 딱 멎으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무도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저녁시간, 아침에 일터를 향해 떠났던 사람들이 허기진 몸을 이끌고 돌아올 시각이었으니까.
  엘리베이터거얼이 출입문을 닫기 위해 개패단추에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잠깐만!’ 하고 외치며 한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남자의 오른손엔 고급 술집의 선전용 성냥갑이 쥐어져 있었다. 순간 여인은 앞서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여인의 눈에는 암팡진 적의가 감돌았다.
  남자는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몇 번 두리번거리더니 무례하게도 여인에게 한마디 건네었다.
  ‘애기가 참 귀엽게 생겼군요. 머리카락도 어쩜 이렇게 윤이 날까. 끄윽-.’
  여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강아지는 자꾸 낑낑거렸다. 엘리베이터는 바로 10층까지 올라갔다. 여인은 화가 난 듯 눈을 내립떠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여인은 자기 방문 앞으로 가서 사납게 도어 손잡이를 돌렸다. 1004호. 그러고 보니 나와는 콘크리트벽 하나 사이의 이웃인 셈이었다. 남자가 그 뒤를 휘청이며 쫓아갔다.
  ‘저들은 아마 오늘 밤 부부싸움 할 거에요.’
  엘리베이터거얼이 살짝 눈을 흘기며 말하였을 때, 나는 공연히 나의 독신생활이 후회되었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둘 사이의 두터운 애정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나는 웃옷 주머니를 뒤져 현관 열쇠를 꺼냈다. 차갑고 반질반질한 쇠붙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 아파트는 미국인 선교사인 미첼이 그의 동료와 함께 기거하는 곳이다. 그들은 지난달에 선교본부의 부름을 받고 둘 다 일시귀국하게 되었다. 나는 미첼의 부탁으로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집을 지켜주기로 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집을 너무 오래 비워두면 사탄이 둥우리를 치기 때문에> 어차피 독신인 나로서는 당분간 아파트에 옮겨와서 생활한다 해도 그다지 나쁠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승낙하였다.
  둔중하게 열리는 문과 괴물처럼 도사리고 있는 어둠. 나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방에 들어서자 곧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얼마간 눈을 질끈 감고 누워 있으려니까 누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나는 일어나서 현관의 불을 켰다.
  ‘누구십니까?’
  나는 어안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양쪽 귀밑에서 턱까지 구레나룻이 꾀죄죄하게 자란 사내였다.
  ‘아, 네... 여기가 미첼씨댁이죠?’
  ‘그렇습니다만. 미첼씨는 지금 안계십니다.’
  ‘알고 있소. 근데 좀 여쭤볼 말씀이....’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사내는 왼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 있었다. 왼쪽 다리의 무릎관절 아랫부분이 뎅강 잘려나간 듯 말아올린 바짓가랑이가 제멋대로 덜렁댔다.
  ‘혹시 뭔가 타는 냄새가 나지 않소?’
  ‘타는 냄새요?’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부엌쪽을 둘러보았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식탁보와 짜발량이가 되어 못쓰게 된 의자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에게 ‘그렇지 않다’는 뜻의 고갯질을 하였다.
  ‘촛불 같은 거라도....’
  그는 갑자기 맥이 풀린 듯 힘없이 말하였다. 그 눈빛에서 나는 참으로 야릇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화재를 예방해야겠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 뭔가 떠오르기를 은근히 갈망하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촛대를 떠올렸다. 정전(停電)이 되었을 때나 심야에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간혹 촛불을 켜곤 했었다.
  ‘아, 그거라면!’
  나는 반쯤 열린 방문을 통해 놋촛대가 현관의 불빛을 받아 짙은 음영(陰影)을 드리우고 있는 것에 시선을 보냈다.
  그는 아직 현관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었다. 나는 그의 불편한 다리를 걱정하여 잠깐 들어오도록 권하였다. 그는 응접실 마룻바닥에 거북하게 엉덩이를 걸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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