總長 記念辭(총장 기념사)

  대학의 거울이요, 大學人(대학인)의 廣場(광장)인 ‘東大新聞(동대신문)’이 어언 創刊(창간) 서른돌을 맞았다. 이 나라 最近世史(최근세사)의 30년이 民族史(민족사)에 그 類例(유례)를 찾기 어려웠던 ‘挑戰(도전)’과 ‘應戰(응전)’의 소용돌이였음을 상기할 때 한 아카데미아의 대변자로서 東大新聞(동대신문)이 걸어야했던 길 역시 결코 순탄치 않은 시련과 극복의 險路(험로)였음을 우리는 잘 안다.
  이제 머지않아 80星霜(성상)을 헤아리게 되는 ‘東國(동국)’의 유구·찬연한 年輪(연륜)에 비추어볼 때 東大新聞(동대신문)은 아직 창창한 젊음의 시대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가 체험하고 지켜본 한 세대의 역사는 너무나 크고 의미가 깊다.
  그러기에 이 아카데미 저널이 갖는 무게와 권위를 우리는 더욱 아끼고 창달하여 文化創造(문화창조)의 길잡이로 삼으려는 것이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요 순수한 이데아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만을 추구하던 조용한 學堂(학당)이었다. 生滅(생멸)의 輪廻(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可視的(가시적) 現象界(현상계)를 넘어선, 초월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법칙의 세계를 무한한 동경심을 가지고 추구했던 知性(지성)의 자리였다.
  그러나 오늘의 大學(대학), 오늘의 知性(지성)은 이 플라톤적 아카데미즘에 하나를 더하여 現實(현실), 즉 전개되는 역사속의 도전에 외면할 수 없는 숙명을 지니게 되었다.
  平常心(평상심)이 道(도)라 할진대, 眞理(진리)와 現實(현실)이 둘 아님을 모른바 아니지만, 그러나 아카데미즘과 앙가주망적 정신의 兩面性(양면성)을 발전적으로 調和(조화)시킴도 또한 오늘의 ‘젊음’이 수행해야 할 중대한 學業(학업)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大學(대학)의 이러한 調和的 機能(조화적 기능)의 측면을 투시할 때, 여기엔 당연히 그 自體 言論(자체 언론)의 責任(책임) 역시 增大(증대)되지 않을 수 없으니, 8·15후 이 나라 建國史(건국사)와 함께 東大新聞(동대신문)의 지나온 30년의 긍지 못지않게, 앞날 또한 기대에 부풀어 있다. 설혹 그것이 무거운 짐진자의 苦行(고행)길일지라도-.
  교수·학생의 知的探究(지적탐구)에 있어서 현재 學內新聞(학내신문)이 가지는 책임과 역할은 크다. 활발한 토론과 연구발표의 광장으로서 최신학술정보의 신속한 제공자로서, 건전한 학풍조성의 담당자로서의 그가 감당해야 할 아카데미적 영역은 실로 無限(무한)하다. 우리들의 캐고 닦는 진리가 不變(불변)의 普遍(보편)이지만, 역사와 더불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카데미즘적 기능 외에 또한 大學新聞(대학신문)은 저널리즘적 역할도 가진다. 그러나 그 저널리즘은 역사속에서의 ‘挑戰(도전)’에 대한 ‘應戰(응전)’하는 知性(지성)으로서의 자세를 견지할 때 빛나는 生命力(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일반 저널리즘의 통념은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과 용기, 공정, 책임이다.
  독자에게 최대의 흥미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社會一般(사회일반)의 온갖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신문이 가지는 商品(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아울러 社會正義(사회정의)를 위해 용기와 공정으로 그 책임을 다하려는 데서 公益性(공익성)을 찾으려 한다. 즉 그들이 갖는 책임은 公益(공익)에 봉사하고, 사회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指導性(지도성)을 발휘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저널리즘에 견주어 생각할 때, 아카데미속의 저널리스트의 ‘이름’ 곧 知性(지성)으로서의 저널리즘, 그 方向(방향)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眞理(진리)’를 뜻하는 희랍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隱蔽(은폐)를 뜻하는 ’레테이아(letheia)'에 ‘a’라는 부정사를 合成(합성)시킨 말이다. 眞理(진리)는 隱蔽(은폐)를 벗겨가면서 찾아냄을 뜻한다.
  밝은 빛을 가리고 있는 것, 그 어둠을 하나하나 벗겨가는 것이 우리들의 진리를 찾는 행위다.
  저널리즘도 상업적 센세이션날리즘을 제외하면 그 순수사명 역시 바로 隱蔽(은폐)를 벗겨 내는 것, 그래서 正義(정의)를 드러내는데 있지 않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大學新聞(대학신문)이 갖는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양면적 기능이 훌륭하게 하나로 歸一(귀일)되는 ‘調和(조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속의 센세이션날리즘을 大學(대학)에 묻혀올 것이 아니라, 大學(대학)의 맑은 ‘知性(지성)’과 ‘情熱(정열)’을 은은히 사회속에 심어가는, 그래서 隱蔽(은폐)된 부조리의 안개를 걷어가는 소피아적 역할로 학문과 신문의 ‘이즘’을 조화시키는데서 그 本來的(본래적) 사명의식을 찾아야할 것이다.
  토인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未來(미래)의 歷史(역사)와 文明(문명)에 있어서의 ‘挑戰(도전)’에 슬기롭게 ‘應戰(응전)’함으로써만 主體的(주체적) 生命力(생명력)을 가질 수 있음을 깊이 洞察(통찰)한다.
  이 응전의 최후보루는 바로 오늘 여러분과 같은 젊은 知性(지성)뿐이다.
  그러니 우리들의 신문이 가지는 기능과 역할을 어찌 소홀이 할 것인가.
  또한 우리들의 ‘東國(동국)’은 佛陀(불타)의 大悲精神(대비정신)속에서 度世(도세), 攝心(섭심)으로 人格(인격)을 완성해간다. 그래서 東國人(동국인)은 濟度衆生(제도중생)하는 大願(대원)을 가지고 있다. 이 理想(이상)의 실현에도 東大新聞(동대신문)은 등불과 같은 媒體的(매체적) 機能(기능)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三十而立(삼십이립)’이라, 人生(인생)으로 치면 主體的(주체적) 自我(자아)를 스스로 꿋꿋이 세울 나이다.
  뿐더러 學而不厭(학이불염)하고 誨人不倦(회인불권)하는 學者的(학자적) 良心(양심)이 자기를 支配(지배)할 연령이다.
  모쪼록 東大新聞(동대신문)의 서른살도 이와 같은 精進(정진)의 念(념)속에서 날을 맞고 달을 보내는 뜻 깊은 순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그간 본지의 성장을 위해 애써주신 역대 主幹(주간)·編輯者(편집자)·論說委員(논설위원)·學生記者(학생기자),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께 충정어린 감사를 드리며 학생·교수·직원·동문 여러분께도 그간의 성원에 거듭 사의를 表(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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