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교육 체제 일원화

중앙학림시절의 졸업증서.

일본불교와의 연합을 꾀했던 일부 불교계 인사들은 총독부의 사찰령을 수용하였지만, 개혁세력은 이들을 통렬히 비판하며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였다. 일제에 예속화되어 가는 한국 불교에 대한 혁신은 비단 젊은 층만의 요구는 아니었다. 특히 불교전문교육기관의 설립만큼은 보수적 인사들조차 절실히 요구하고 있던 문제였다. 전문교육기관 설립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불교고등강숙이 문을 닫은 직후인 1914년 가을부터였다.

이듬해 1월 ‘30본산 주지회의원’이 해체되고 ‘30본산 연합사무소’가 발족된다. 이때 연합사무소의 운영규칙을 명시한 연합제규(聯合制規)가 만들어졌는데, 이 제규에는 서울에 중앙학림을 설치하고 본사와 말사에 지방학림을 설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연합제규에 따라 30본산 연합사무소는 서울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설립하고, 지방에는 불교지방학림과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불교 교육체제가 보통학교→불교지방학림→불교중앙학림으로 일원화된 것이다.

불교중앙학림은 원흥사에 설립될 예정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숭일동 북관왕묘(北關王廟:1883년 고종이 세운 관우의 사당으로 현 혜화동에 있었음) 터의 임대를 승인함에 따라 학교의 위치가 변경되었다. 각 사찰의 출자가 이루어지고 학교 위치가 확정되면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11월 5일 중앙학림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중앙학림에는 본과와 예과가 있었으며, 부속기관으로는 기숙사에 해당하는 기숙료(寄宿寮)와 보건소에 해당하는 교의(校醫)가 있었다. 학생 수는 120명이었고 수업연한은 예과가 1년, 본과가 3년이었다. 또 교과목 및 교과과정은 일반교양과목과 불교학을 균형 있게 편성하였다. 예과 1·2학년의 경우 매주 30시간의 교육을 받았고, 3학년은 28시간을 배정하였다. 또 매 학년을 3학기제로 운영하였다.

학칙에는 1916년 4월에 첫 학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기록을 살펴볼 때 이미 1915년 하반기부터 학생들을 모집하여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문기사에 실린 중앙학림의 모습을 보면, 학교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높다란 층계가 연이어 있었다. 또 층계 위에 위치한 교무실을 중심으로 층계 좌측에는 기숙사, 우측에 강의실이 있었다.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오전 7시에 좌선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이용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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