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학교를 향한 움직임

불교사범학교가 발족한 지 4개월 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1911년 11월 1일에는 ‘사립학교규칙’이 시행되어 조선총독부가 사립학교의 개교와 폐교를 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문학교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불교사범학교는 ‘각종 학교’로 격하되거나 최악의 경우 폐교까지 감수해야 하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일제는 1911년 9월 1일 조선사찰령을 시행함으로써 우리 불교를 30본산 체제로 개편하고, 사찰 주지에 대한 인사권을 거머쥠으로써 우리 불교를 예속화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불교계는 일본불교와의 연합을 추진하려는 보수파와 이에 반대하는 혁신세력이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일제의 사찰령에 의해 발족된 30본산 주지회는 1912년 5월 28일에 1차 회의를 열어 모든 본사를 ‘선교양종대본산(禪敎兩宗大本山)’으로 표기하기로 의결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불교교육에 관한 문제도 함께 논의되었다. 이 논의를 바탕으로 주지회 측은 혁신세력을 대표하는 박한영으로 하여금 ‘고등불교전문강당’ 설립에 관한 모든 책임을 위임하게 된다.

이후 박한영을 중심으로 불교사범학교의 뒤를 이을 학교설립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14년 1월에 개최된 주지회 제3차 정기총회에서 ‘4월부터 불교고등강숙(佛敎高等講塾)을 원흥사에 설립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새로 설립될 불교고등강숙의 모든 규약은 명진학교나 불교사범학교의 운영원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4월에 문을 연 불교고등강숙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학교 경영진의 일본불교에 대한 인식과 무능한 교육시책에 학생들이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조선불교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반발하자 학교 경영진은 30본산에 통문을 돌려 유학생들을 사찰로 귀환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고등강숙을 책임지고 있던 박한영에게도 사직을 요구하고, 마침내는 불교고등강숙을 폐쇄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교사와 학생들은 묵묵히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등전문학교로의 전환을 꿈꾸며 새로이 발족한 불교고등강숙은 개교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불교회를 주도했던 청년 승려들은 향후 불교청년운동의 핵심으로 성장하여 애국애종(愛國愛宗) 운동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이 용 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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