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음에 대한 미적 체험

○…文學(문학)은 社會(사회)의 거울이다. 우리는 문학을 통하여 사회전반을 이해하고 그 시대의 상황을 인식할 수 있다. 本紙(본지)에서는 讀者(독자)들의 문학에 대한, 나아가 사회에 대한 가치관 정립에 도움이 되고자 ‘이달의 소설’란을 마련, 정기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註(주)>…○

  현재 한국소설계에서 주목·평가받는 소설의 유형을 몇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분단 문학이라 통칭되는 6·25소설이 그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 이시대의 충격적이고 파행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민중이라 불리우는 계층의 실상이나 아픔을 그린 소설, 아니면 세 번째 유형으로 실험적·전위적 소설이라 지칭될 수 있는 ‘비뚤어진 의도적 형식’ 혹은 ‘낯설게 하기’를 차용한 소설, 그리고 네 번째 유형으로는 세 번째 유형과 맥락을 같이 하는 소설형식으로 철학적 명제나 용어의 해명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관념소설이 그것이다.
  위의 네 가지의 유형의 소설풍조가 여타의 소설 경향을 읊조린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파행적인 문학 현상이 부상되는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미학적 상상력보다는 사회·역사적 상상력이 강조되고 있는 이 시대의 요청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소설이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의 바탕에서 성숙되어 왔고 또 그것을 양분으로 해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믿는다면 위의 유행적인 흐름은 곧 시정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달에 발표된 많은 작품 중에 이런 점에서 주목되는 소설은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된 李相文(이상문)의 ‘살아나는 팔’이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위에 예시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을 복합적으로 교호시키고 있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적 시대와 현시대 상황의 대비적인 구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사회나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이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치를 배가시키는 한편 유행의 편승에서 일탈하게 하고 있다. 주인공 노무길의 정신적인 상처에의 극복 양상이 그것이다.
  이 소설은 노무길의 하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학생운동으로 퇴학을 당하고 형집행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투쟁경력(?)을 속여 저임의 노동자로 취업한다. 노조운동을 하기위해 위장취업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생활인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취업하게 되나 동료들은 과거의 경력과 호의를 미끼로 파업의 조종자로 이용한다. 한편, 회사 측은 회사 측대로 공갈 협박(생계위협)으로 파업의 주동자에 대한 정보 제공을 강요한다.
  결국 그는 회사의 파산을 결코 원치 않기 때문에 25명의 주동자를 손으로 가리킴으로 해서 한쪽 팔의 마비 증상이 온다. 그러나 의사의 권유로 인해 하향하게 된다. 하향한 그는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할머니로부터 듣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6·25때 부역한 사실이 있으며, 인민재판에서 반동분자를 손가락으로 지적하여 죽인 죄의식 때문에 팔에 마비 현상을 일으켜 끝끝내 그 증상을 이기지 못한 채 죽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중 구조가 소설의 필연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의혹을 낳게는 하지만 패턴의 중첩으로 효과를 높이는 구성적 트릭을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커다란 흠으로 지적할 수는 없다. 어쨌든 위와 같은 서사 구조로 이루어져 데뉴망 부분에서는 노조운동의 연루자(주동자)라는 사실 때문에 수갑을 차게 됨으로써 마비되었던 팔이 살아나게 된다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맺고 있다. 이처럼 이 소설의 표층구조는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른데 있다.
  첫째는 하나의 특정한 집단에 대응하는 개인의 의지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한편 개인이 지향하는바 의도(생계유지)와 상관없이 집단의 의도는 형성되고 행동되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따라 둘째는 한 인간의 죄에 대한 정신적 상처가 어떤 현상을 야기시키는가를 팔의 마비현상으로, 그리고 죄의 갚음이 정신적 갈등의 해소 현상인 살아나는 팔로 보여줌으로써 휴머니즘의 단면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소박한 삶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점이다. 13만원이라는 저임을 받지만 보통 사람의 삶의 소중함을 이 소설은 환기시킨다.
  한편으로 이 소설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치밀한 구성과 적절한 상황 묘사, 그리고 뒷문장을 읽게 하는 소설 문체의 저력이다. 소설은 단순히 강열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밀한 체험을 느끼게 해줌으로써 감동을 증폭시켜 주고 있다는 점을 이 소설은 확인해 준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한편으로 없지 않다.
  지나친 욕심일수는 있으나, 그리고 이 소설이 중편 혹은 장편이 아니라는 점에서 필자의 요구가 다분히 무리한 것이지 모르나 정신적 상처, 죄의식에 대한 디테일한 상황 묘사나 갈등이 다소 부족함으로 해서 오는 결과적 상황의 의혹이 그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삶에 대한 소중함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살아있음을, 혹은 살아야함에 대한 미적 체험이 강렬히 남아있도록 해줬으면 하는 것이 또한 아쉽다.
  그 시대의 사회적 현상에 대응하여 쓰여진 소설은 1회성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사회 현상의 반영, 그 산물임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의 사회적 핵심에 대응함으로써 역사성을 획득하되 당대적인 문학으로 소멸되지 않고 문학적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미적 국면에 대한 고려가 무엇을 근간으로 이루어져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환기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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