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 분열로 혼란

불교사범학교의 교전(校典).

1906년에 설립된 명진학교는 신학문 위주의 교육에 치우쳤다는 불교계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원만히 운영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불교계는 시국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몇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 이 과정에서 명진학교 설립의 주체였던 불교연구회는 1908년 3월에 해체되고, 다수의 지지를 얻은 중도파를 중심으로 한국불교 자치기관인 원종(圓宗) 종무원이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학교운영권도 불교연구회에서 원종 종무원으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는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할 때 학부대신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그 폐쇄도 학부대신이 명할 수 있게 하였다. 사립학교의 존폐문제가 통감부의 손으로 넘어가자 불교계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종무원은 1909년 2월 1일 명진학교의 수업 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12월 10일에는 부설교육기관으로 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여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명진학교 강사들을 중심으로 전문학교 승격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는 각 사찰에 한 개의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설치하고, 중앙에 전문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한용운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종무원은 이러한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명진학교를 고등전문학교 수준의 학교로 승격시켜줄 것을 학부에 청원하였다. 그러나 통감부는 전문학교로 인정하지 않은 채 사범학교령을 적용하여 ‘불교사범학교’로 인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명진학교는 창립 4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불교사범학교가 새로이 출범하였다.

불교사범학교의 교과과정은 명진학교 시절과 별반 다를 바 없었고, 학교 건물 역시 원흥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당시 학교생활을 살펴보면 학생들은 면으로 만든 짧은 소매의 검은 색 법의와 승모를 착용하고, 미투리를 신었다. 또 명진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원흥사 내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하지만 불교사범학교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원종이 일본불교와 연합을 꾀하자 이에 반발한 승려들이 1911년 1월 임제종 종무원을 설립하면서 학교도 혼란에 휩싸인 것이다. 일본불교와의 연합 문제를 놓고 불교계가 양분되자 불교사범학교의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소속 사찰로 돌아가 버렸다. 별다른 청산절차도 없이 학교 운영이 흐지부지되고 만 것이다.

이 용 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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