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에 걸친 나의 문학수업 기간은 보랏빛 꿈과 낭만이 영근 그러한 화려한 나날은 결코 아니었다. 고독과 회환의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통곡의 나날에서부터 비롯된다.
  문학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이다.
  국어시간 글짓기 숙제로 ‘냇물’이라는 동시 한편을 써내었다. 그 시가 시화전에 출품되고 교실에 액자로 걸려 있기도 하고 동시집에 게재되기도 했다.
  나는 약간의 용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날 이후 일기를 썼고 위인들이나 선생님들, 종교인의 목소리에 깊이 경청하면서 그 뜻을 음미해 보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때 장편 소설 1천5백매를 탈고했다. 학교 교지에 2차례 연재하다 원고를 잃어 버렸다. 그러나 난 하나도 애석하지 않았다. 故(고) 조연현 선생의 ‘장편소설의 첫걸음’이라는 글을 읽고 뜨거워오는 얼굴을 식힐 수가 없었다. 나의 작품은 보편타당성 없는 궤변과 서툰 표현력으로 이야기의 맥만 이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연현 성생의 문장은 잠자고 있는 나의 의식 세계를 일깨워 주는 그런 힘을 지닌 내용으로 점철되어 내 가슴을 몹시 쥐어흔들고 있었다. 나는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그분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 양주동 박사의 ‘다독과 정독’ ‘면학의 서’ 등도 나로 하여금 문학에의 뜻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서울로 올라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내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경제적인 열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대학을 가는 집 아이는 흔하지 않았다. 더더욱 서울유학은 꿈에도 생각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고 시절, 주로 중편 장편을 즐겨 썼던 나는 대학 문예 콩쿠르 단편 소설 모집에 응모하여 보기 좋게 낙선되고 말았다. 또 장편을 자비로 출판하여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신문과 라디오는 약간 떠들어 주었다. 나는 그 1년 후 깊은 후회 속에 빠지고 말았다. 작품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 너무 유치하고 졸렬하여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책방에 책값을 받으러 가지도 않았다.
  돈을 아니 받아도 좋았다. 그 작품의 저자라는 얼굴을 상대방에게 잠시나마 상기시키는 그런 일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 유치한 내용을 씻기 위해서라도 ‘후일 끝내 훌륭한 작품을 쓰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난 그후 작품이 전혀 써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조연현 선생을 흠모하면서도 너무 어려워 한번도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아니, 난 작품다운 작품을 못 쓰고 있었기에 그 분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는데 그쳤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리라.
  그러나 아무 것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생명이 있는 작품을 탄생시킬 것이라는 강한 집념이 내 가슴 저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내겐 이성 교제도 뜨뜻미지근했다. 싹만 올리고 꽃도 피우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종결을 짓곤 했다. 그들과 만났을 때 연탄불 위에 찌개냄비를 올려두고 온 것 같아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 그들을 포근하게 내 자리에 머물게 하지 못했다. 그 어떤 것에도 난 내생명이 확인이 되지 않았다.
  나의 쓰라린 문학 수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은 고독과의 끈질긴 싸움이었다. 명절·크리스마스·공휴일-전신으로 엄습해오는 이 형언할 수 없는 고독을 이겨내려고 무릎을 꿇고 앉아 열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며 분연히 밤을 이겨내기도 했다.
  나는 신춘문예에 무릇 7번이나 도전하여 7번 모두 낙선되고 말았다. 나는 신춘문예전집을 통독하며 나의 작품과 대조 비평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작품과 겨누어도 나의 작품이 버금갈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원고를 가슴에 안으며 산 밑 변두리 어느 집 부엌방을 얻어 이사해 버렸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겨우 출근시간에 닿게 출근하고 퇴근 시간이 오기가 바쁘게 아무도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골방으로 부리나케 찾아 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음소리를 내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불량품인 전기장판에 매달려 죽을 뻔하였다. 사지가 마비되려는 찰나 기이한 힘에 의해 전기코드를 뽑아내고 말았다.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 죽음이 항상 내 곁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내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숨을 거둘 수는 없었다. 죽음을 준비하고 싶었다. ‘죽음이냐, 삶이냐’하는 극한 상황에서 나는 용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나는 원고를 정리하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故(고)조연현 성생을 찾아 나섰다. 그 분의 제자가 되기로 맹세한 지 실로 17년 만에 원고뭉치를 들고 그분을 대면하러 나서고 있는 내 심장이 자꾸만 뛰어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선생님 이 작품이 저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 작품으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전 소설가의 꿈을 포기 하겠습니다’
  그분을 만나 내뱉은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그건 심사위원이 알아서 하겠지요’
  울먹이며 문인협회 출입문을 밀고 나오는 내 등 뒤에서 그분의 조용하나 쌀쌀한 음성이 고막을 때려왔다.
  종로 네거리까지 쫓아 나왔을 때 내 눈에서 눈물이 질금질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골목길에 몸을 비켜섰다. 내 문학에 대한 마지막 결산의 순간이었다. 내 능력을 ‘木角(목각) 숫사슴’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나는 철저한 생활인으로 돌아가리라. 20여년의 고통과 회환의 나날들을 청산하는 마지막 지점에서 나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울고만 있었다. 그렇게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이제 낙선된다 해도 한 점의 부끄러움이나 후회는 없으리라. 어느 한 가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그 자체로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기꺼이 순응하리라. 난 그날 이후 마음이 편안해졌다. 회색 하늘을 향해 헤픈 웃음을 자꾸만 날렸다. 조연현 선생의 쌀쌀한 목소리와 냉냉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거의 희망은 없다고 판단되었다. 원고나 끝까지 읽어주실런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해 최후의 노력을 다했기에 한톨의 회한도 없었다.
  1981년 1월,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뜻하지 않게 심사위원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그때부터 다시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소설이라고 썼소? 20여년 동안의 시련의 댓가가 이 정도 글밖에 안 나왔소? 아무래도 소설가로서는 재능이 없습니다. 결혼하셔요. 가정주부가 되어 평범하고 동글동글한 인생을 살아가셔요. 소설이 뭐 대수요? 쓰라리고 아픈 작업입니다. 편안하게 사셔요…’
  그는 조연현 선생의 체면을 생각하여, 또한 그분이 직접 그런 내용을 전하기가 민망하여 심사위원이 당신 뜻을 간접 전하려고 만나자는 것은 아닌지?
  나는 머리카락이 쭈빗쭈빗 서왔고 현기증이 일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칭찬을 퍼붓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나의 악필이 신춘문예의 낙선의 원인이 되었다고. ‘작품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어요. 험난한 문학 수업의 흔적이 역력히 엿보여요’
  1981년 5월 ‘현대문학’지에 ‘木角(목각) 숫사슴’이 초회추천을 받았다. 그해 11월호에 ‘겨울 아이’가 추천 완료되었다.
  나에게 몰아친 태풍이 잠시 멈추었을 때 나는 비로써 싹을 올렸던 남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편지를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나가 자기 세계를 이미 구축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날씬한 몸매는 사라지고 체형까지 둔탁하게 변해버린 질기고 끈끈한 피부를 가진 ‘올드미스’가 되어 있었다.
  나의 추천이 끝난 11월 하순 애석하게도 조연현 선생께서 동남아를 여행하시다가 일본에서 갑자기 타계하셨다.
  나는 불행하게도 문단에 수많은 제자를 배출시킨 그분의 마지막 제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시간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사려 나를 문단에 등용시켜주신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험준하고 첩첩산중 봉우리에 반짝이는 횃불을 쟁취하러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수난의 길을 걸으며 문학 수업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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