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의 도성 출입을 허하라

19세기 말,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침체되어 있던 조선불교로서는 이 시기가 최대의 위기이자 기회였다. 강화도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본의 정토진종은 1877년 부산에 별원을 세워 조선의 승려와 신도를 포섭하기 시작했고,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각 불교종파는 조선에 종군승을 파견하였다.

일본불교가 조선불교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895년 일련종 승려 사노젠레(佐野前勵)에 의해서였다. 당시 사노젠레는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한 조치를 해제하도록 조선정부에 건의하였고, 총리대신 김홍집이 이를 고종에게 상주하여 그해 3월 30일 이 조치가 해제되었다.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는 연산군 9년(1503)에 처음 선포된 이후 인조·정조·순조를 거치면서 네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때문에 승려들은 수백 년 동안이나 4대문 안에 발을 붙일 수 없었고, 도성출입이 허용되고 나서야 일반인과 동등한 자격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불교계의 숨은 목적은 문화적 침투를 통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있었다.

이에 맞서 조선불교계가 사찰재산의 보호를 강력히 요청하자 정부는 1902년 궁내부 소속으로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조선불교는 국가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고, 불교가 국가로부터 공인받는 계기가 되었다.

승려의 도성출입 허용과 불교교단의 정비는 산중(山中) 불교에 익숙해 있던 조선불교계의 자각과 함께 근대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개항 이후 외국인들에 의해 신식학교가 설립되자 고종황제는 근대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95년 2월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였다. 이후 각급 학교의 관제와 규정들이 제정되자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각종 단체와 모임을 만들어 민족교육에 힘을 쏟았다.

당시 교육활동과 사회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적극적인 포교활동으로 신도를 확보하는 한편, 의료와 교육사업을 바탕으로 교세를 점차 확장해 나갔다. 이에 불교계 인사들도 새로운 시대상황에 부합할 수 있는 근대식 불교학교의 설립을 조심스럽게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모색은 결국 불교계 지도자들의 모임 결성으로 이어졌고, 우리학교 최초의 전신인 ‘명진학교’ 설립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이 용 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