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와 램브란트를 中心(중심)으로

3. 兩分(양분)된 네덜란드의 두 國家(국가)

  이러한 시대에 北(북)유럽에서 가장 繁榮(번영)을 누렸던 곳은 네덜란드이었다. 르네상스 이래 이탈리아가 南(남)유럽의 物資集散地(물자집산지)이었듯이 네덜란드는 北(북)유럽의 中心地(중심지)이었으며 대규모의 輸出産業(수출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브뤼즈(Bruges) 강(Ghent) 브뤼셀(Brussels) 등은 중요한 수출 산업도시였으며 北方(북방)르네상스 藝術(예술)이 가장 찬란하게 개화된 곳이었다.
  정치적으로는 14기말에 스페인의 부르고뉴(Bourgogne)公(공)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강력한 自治都市(자치도시)의 발달로 市民階級(시민계급)이 성장하고 있었고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와 같은 휴머니스트가 나와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16세기에 오면 구新具都市(신구도시) 앤트워프(Antwerp)가 다른 도시들을 물리치고 經濟的(경제적) 패권을 잡아 유럽 經濟(경제)의 中心地(중심지)가 되었다. 업트워프는 開放(개방)된 國際淃(국제권)으로 독일과 이태리의 金融業者(금융업자)도 本店(본점)을 두었으며 유럽각지의 重要商品(중요상품)이 交易(교역)되었다.
  원래 네덜란드는 17개 州(주)로 나누어 各州(각주)에 스페인에서 파견한 總督(총독)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각주는 身分制議會(신분제의회)가 있어서 租稅承認標(조세승인표)와 독자적인 司法權(사법권)을 行事(행사)하였다. 그러나 南部(남부)와 北部(북부)는 宗敎(종교) 經濟(경제) 文化面(문화면)에서 서로 차이가 있어서 北部(북부)는 言語的(언어적)으로 독일이 가까웁고 종교적으로는 루터派(파) 칼빈派(파)의 신교세력이 강하여 農牧業(농목업), 漁業(어업), 商業(상업), 海運業(해운업)이 번성하는데 비하여 남부는 언어가 프랑스에 가까웁고 舊敎(구교)가 강하고 毛織物工業(모직물공업)이 盛(성)하였다. 스페인의 모직물공업이 1570년경부터 시들자 네덜란드의 지배가 경제면에서 절대 필요하였다. 그래서 스페인의 필립 2世(세)(philip2 1556~1598)는 네덜란드의 統治制樹立(통치제수립)에 착수하여 租稅(조세)를 引上(인상)하고 商業(상업)을 제한하고 敎區(교구)를 增設(증설)하여 宗敎裁判所(종교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압력을 가하였다.
  더욱이 1568년에 취임한 총독 알바 公(공) (Alba1508~1582)은 新敎側(신교측)의 지도자 에그몬트(Egmont)를 처형하고 공포 政治(정치)를 실시하여 이곳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이에 舊敎(구교)의 南部人(남부인)들도 北部(북부)에 合勢(합세)하여 함거하기 시작했는데, 총독의 교묘한 南北間(남북간)의 離間策(이간책)이 주효하여 1579년 南部(남부) 10州(주)가 단독으로 항복하여 스페인 屬領(속령)이 되었다. 그러나 북부 7州(주)는 홀랜드를 中心(중심)으로 위트레흐트 同盟(동맹)(Union of Utrecht)을 맺어 抗戰(항전)을 계속하면서 1581년 獨立(독립)을 宣言(선언)하고 네덜란드 合衆國(합중국)을 세웠다.
  그리하여 필립 3世(세)때 휴전조약을 맺고(1609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는 공식으로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러한 전란을 통하여 南部(남부)의 모직물업자들은 스페인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北部(북부)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이때까지 번성하던 앤트워프는 갑자기 쇠퇴하고 그 대신 북부의 암스테르담(Amsterdam)이 번영하였다. 따라서 17세기의 네덜란드는 독립한 북부의 네덜란드 합중국(일명 홀랜드과 스페인 속령인 남부의 네덜란드(현재 벨기에)로 양분되었다.)
  후에 남부는 다시 네덜란드 합중국에 합병되었다가 1830년 7월 혁명 때 독립하여 오늘날의 벨기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오랜 외세의 지배에 따른 언어 종교에 있어 남북부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통일적인 민족의식을 형성할 수 없었던 것인지 17세기에 네덜란드의 양분은 예정된 숙명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러한 격동기에서 루벤스는 南部(남부)의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렘브란트는 북부에서 태어나 각각 다른 사회분위기 속에서 활동하여 그들 생애나 화력의 길을 달리하였다.


4. 榮光(영광)에 찬 루벤스의 生涯(생애)

  루벤스(Peter Paul Rubens)는 1577년 6월 28일 네덜란드의 國境(국경)을 벗어나 독일의 지겐(Siegen)에서 태어났다. 父親(부친) 얀 (Jan Rubens)은 원래 네덜란드人(인)으로 法律家(법률가)이며 열렬한 칼빈주의자로서 앤트워프에 머물러 살았는데 알바 총독의 宗敎(종교)박해로 쾰른에 옮겼다가 지겐에 머물러 셋째 아들 피터 폴의 탄생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父親(부친)이 10세 때 死亡(사망)하자 가톨릭 信者(신자)인 母親(모친)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앤트워프로 돌아왔다.
  따라서 루벤스의 成長(성장)에는 모친의 感化力(감화력)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며 一生(일생)을 通(통)하여 그가 경건한 가톨릭 信者(신자)로서 生活信條(생활신조)를 고수하였던 것도 母親(모친)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3세 때 독일어 라틴어 프랑스어 프랑드르어와 文學(문학)에 대한 교양을 쌓고 地方作家(지방작가)에게 그림을 배우다가 15세 때 오토 반 페인(Otto Van Veen)의 門下生(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畵家修業(화가수업)을 닦았다. 페인은 휴머니스트로서 르네상스的(적)인 宗敎畵(종교화)를 그리던 화가로서 弟子(제자)에게 많은 영향을 남기었다.
  루벤스의 初期(초기)에 스승의 技法(기법)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업을 마친 1598년에 그는 한 사람의 獨立(독립)된 畵家(화가)로서 스승의 인정을 받아 앤트워프市(시)의 畵家組合(화가조합) ‘성 루가길드’에 등록하였다. 중세기부터 手工業(수공업)에 종사하는 職工(직공)들이 職業別(직업별)로 조직하는 同職組合(동직조합)(Craft Gild)은 일찍이 發達(발달)한 것인데 여기에 화가도 직업으로 分化(분화)된 것이 르네상스 以後(이후)부터이다. 그 당시 건축물의 장식화나 귀족층에 대한 肖像畵(초상화)의 제작은 寫眞術(사진술)이었던 시대이고 보면 畵家(화가)의 必要性(필요성)이 절대적이었고 手工業(수공업)자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그림 역시 商去來(상거래)의 대상물이었다. 그러나 별로 성공하지 못한 루벤스는 1600년 23세 때 이태리 여행에 올랐고 르네상스의 위대한 作品(작품)들을 구경하면서 새로운 轉機(전기)를 마련하였다.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의 作品(작품)을 열심히 模寫(모사)하고 그 밖의 都市(도시)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고 感動(감동)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스페인의 만투아공작 빈센조 곤자가(Vincenzo Gonzaga)를 만나 파트론이 생기자 그 덕분에 스페인에 一年(일년) 머물고 다시 이태리로 돌아가 지방귀족들의 肖像畵(초상화)를 그리면서 더욱 精進(정진)할 수 있었다. 1608년 모친의 병세악화로 8년 間(간)의 이태리 수업을 마치고 앤트워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畵家(화가)로서 確固(확고)한 名聲(명성)을 얻어 알공의 首席宮庭畵家(수석궁정화가)로 임명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면서 때로는 외교관으로서 위임받은 분망한 생활을 겸하면서 일생토록 한 번도 좌절을 겪지 않은 채 화려하고 다망한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귀족 칭호를 얻었던 1608년 32세 때 18세의 처녀 이사벨라 브란트(Isabella Brant)와 결혼하여 행복을 누렸으며, 53세 때(이사벨라가 죽은 4년 뒤) 16세의 엘렌 푸르망(Helena Fourment)과 재혼하여 안락한 가정을 꾸리면서 1640년 5월 30일 지나친 작업의 과로로 사망할 때까지 무려 1천5백여 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이 모든 그림이 루벤스 혼자 그린 것은 아니다. 그는 주문 받은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濃淡(농담)을 넣어 그리면 하청 받은 다른 화가나 제자들이 그것을 확대하여 캔버스에 그렸고 그것을 다시 손질해 끝내는 방법을 썼다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진가는 자신이 직접 손댄 정도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화실은 일종의 商品(상품)을 생산해내는 거대한 공장 같아서 사실상 유럽회화 史上(사상) 가장 규모가 큰 製作室(제작실)이었다 한다. 이렇듯 철저한 기업가적 재능에 대하여 허버트 리드(Herbert Read)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술은 그의 상업이었다. 일단 일을 벌이면 그는 정해진 畵科(화과)를 받았고 그림의 종류는 그가 받는 화료의 다과에 의하여 決定(결정)하였다. 물론 작품의 질을 변경하지 않았다. 그림의 크기라든가 복잡성은 계약에 의하여 엄격히 결정지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엄청난 財産(재산)을 모았으나 가톨릭信者(신자)답게 한 번도 방탕하게 낭비하지 않았고 엄격한 규칙적인 생활을 지켰으며 친구사이에도 友情(우정)이 돈독하였다. 傳記作家(전기작가)가 그에 私生活(사생활)에 스캔들을 찾아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라 한다. 이 같이 그의 開放的(개방적)인 삶은 아무 의문도 의혹도 없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多作(다작)의 神秘(신비)를 제외하고는╶ 이것은 그의 生涯(생애)를 硏究(연구)한 프로망탱(Fromentin)의 말이었으며 그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結論(결론)지었다.
  “그의 生涯(생애)는 光明(광명)에 싸여있었다. 그리고 그의 作品(작품)처럼 밝았다.” 이같은 루벤스의 밝았던 생애에 비하여 렘브란트는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5. 孤獨(고독)한 運命(운명)의 畵聖(화성)╶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은 북부 네덜란드의 라이덴(Leydn)에서 1606년 7월 15일 제분업을 하는 부친 할덴・반・라인(Harmen Van Rijn)과 빵제조업자 넬겐 월렘스도호터의 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렘브란트가 태어날 당시는 스페인의 억압적인 植民政策(식민정책)에 반대하여 북부 네덜란드 7주가 유트레히트 동맹을 맺어 戰爭(전쟁)상태에 있었고 1609년에는 休戰條約(휴전조약)이 성립되어 자유로운 市民國家(시민국가)로서 독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가정환경은 평범한 中産層(중산층)이었지만 近代的(근대적) 자유의 분위기를 마음껏 호흡할 수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首都(수도)였으며 전체군주의 政治的(정치적) 압박을 피해 망명한 당대의 휴머니스트들의 集結地(집결지)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哲學者(철학자)가 유태인 출신 스피노자(Spinoza,1632-77)이었다. 렘브란트의 불굴의 의지와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藝術家的(예술가적) 孤高性(고고성)은 조부 때부터 이런 휴머니스트들의 교육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래서 父親(부친)은 이들이 學者(학자)가 되기를 원하여 14세기 라이덴 大學(대학)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天性(천성)이 畵家(화가)로 태어난 렘브란트는 그 당시 학자가 되려면 필수적인 교양언어인 라틴어를 배우는 것에 흥미를 잃고 그림에 열중하였으므로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였다. 부친도 아들의 이러한 개성에 더 이상 만류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진로를 열어주었다. 15세 때 렘브란트는 이태리에서 귀국한지 얼마 안 된 라이덴의 화가 야곱 반 스바넨뷔르(Jacob van Swanenburgh)의 工房(공방) 찾아가 거기서 3년 동안 기초적인 회화기법을 습득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영향을 받지 못하고 암스테르담에 유학하여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선생 밑에서 5개월 간 수업하였던 것이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청년시절의 낭만적이고 사실적인 역사화 속에서 그의 스승의 영향을 살펴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어느 大家(대가)의 절대적인 기법이나 수업도 받은 적이 없으며 당시에 누구나 선망하였던 이태리 여행도 하지 않았다. 이점 루벤스가 이태리의 편력여행에서 많은 갈등과 영향을 받았던 점에 비하여 그는 네덜란드의 향토적인 화가들, 특히 거장 부르겔의 그림을 직접 대면한 것 외에는 異國的(이국적) 정취에 물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北方(북방) 유럽적인 특성을 순수하게 간직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 이것은 여행비를 조달할 수 없었던 經濟的(경제적) 여건이었을지 모르나 오히려 그의 고집스런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後年(후년)에 어떤 친구가 어째서 한 번도 이태리 여행을 하지 안했는가 물었을 때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알프스 이북인 이 땅에 가만히 머물러 있어도 高官(고관)들의 수집취미로 이태리 명작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구태여 시간을 낭비하면서 여러 곳에 흩어진 작품들을 구경하러 다닐게 무어람.”
  이말 뜻 속에 우리는 그의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藝術觀(예술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전적으로 배타적인 藝術家(예술가)는 아니었고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에서 충분히 異國(이국)의 예술을 흡수하고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1625년부터 1631년까지는 흔히 라이덴 시절이라 하여 그는 畵家(화가)로서 수업을 끝내고 독립적인 아트리에를 차려서 차츰 제자들을 그 밑에 두기 시작하였으며 초상화의 주문제작도 받는 바쁜 生活(생활)도 보냈다. 이 무렵 영기할 것은 누구보다도 그의 정신적 후원자였던 父親(부친)의 별세(1630년)를 보았던 사실이며, 루벤스가 母親(모친)의 후원을 받았던 것에 비하여 부친의 영향력이 컸던 렘브란트에게는 라이덴이 갑자기 공허한 都市(도시)로 보였다.
  그뿐더러 經濟的(경제적)으로 흡족할 수 없었던 그는 25세 때 母親(모친)과 함께 암스테르담에 移住(이주)하여 일생의 정착지를 삼았다. 여기서 그는 첫 주문작인 ‘툴프박사의 해부학 강의’라는 集團肖像畵(집단초상화)를 맡아 6개월만에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예술적인 명성을 굳혔다. 사진술이 없었던 당시에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집단으로 그릴 때 각 개인이 비용을 분담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모델들의 기념비적 사업일 뿐 아니라, 화가에게도 직업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었다. 다만 그는 루벤스와 달리 초상화의 모델이 王(왕)이나 貴族(귀족)들의 신분 높은 계급층이 아니라, 부유한 시민계급이나 휴머니스트들이라는 점이 다르며 그 때문에 구속받지 않는 藝術家的(예술가적) 자유를 지키며 수요와 공급 면에서 평등한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때로는 예술적 안목이 높지 않는 계층으로부터 沒理解(몰이해)와 비난도 받았으며 대립과 심한 갈등의식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암스테르담 시절의 초기에 거둔 예술적 성공은 사회적 명성과 축재의 여유를 주었고 결혼의 행운까지 얻었다. 1633년 그의 나이 27세 때 암스테르담의 前 市長(전 시장)의 딸인 19세의 사스키아(Saskia)와 약혼하여 다음 해 성 안나 게마인데 敎會(교회)에서 네덜란드 인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부테스트라트에 호화주택을 구입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렸는데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8년 간 그에게 가장 계속적으로 행복하였던 시기였다. 이 점 그도 루벤스와 같이 부부간의 금술이 좋아 부인을 모델로 한 많은 초상화를 남기고 있는데 그의 무겁고 어두운 색과 달리 현세적인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642년을 중심으로 그의 예술세계에 일대 전환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행한 사건이 연달아 밀어 닥치었다. 병고에 시달렸던 사스키아에 대한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642년 여름에 사별의 슬픔을 겪어야 했고 전염병으로 세 자식까지 잃게 되는 비극을 치렀다. 더구나 이 무렵 재정적으로 곤궁한 판에 그의 대표작 “夜警(야경)”의 제작을 둘러싸고 몰이해한 인사들의 시비 속에 한없는 좌절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초상화의 주문에 응하여 제작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개성적인 표현기법으로 차원 높은 예술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것을 주지 않았던 렘브란트의 고집은 수요층을 무시한 태도에 대하여 차츰 냉대와 반발을 일으켰으며 계약의 취소로 재정적인 궁핍을 당해야 했다. 그리하여 장년에서 말년으로 갈수록 경제적 타격은 심하여 1656년 50세 때는 파산 선고를 받고 그 후에는 재산이니 주택이 경매처분을 연달아 당하여 54세 때에는 할 수 없이 칼비스트라트의 유태인 빈민구로 이사하게 되었으며 다시 로켄그라흐트에서 옮겨 죽을 때까지 끝까지 가난의 멍에를 벗지 못하였다.
  1969년 63세로 別世(별세)하기 전 前妻(전처)의 아들 티투스와 메느리 막달레나의 死亡(사망)을 먼저 보아야 했던 것은 그의 運命(운명)치고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다만 그의 첫 부인이 죽은 3년 뒤 家政婦(가정부) 헨드릿케 스톳펠스(Hendrickje Stoffels)가 들어와 家事(가사)를 돌보면서 후에 정식결혼식을 올리지 않는 부부 생활을 하여 再生(재생)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지만 가난의 逆境(역경)을 같이 치러야 했고 生活(생활)의 빛을 보지 못한 채 헨드릿케의 死別(사별)을 57歲(세)(1668년)에 겪었던 그의 一生(일생)이었다.
  1669년 10월 8일 그의 殞命時(운명시)에는 前妻(전처) 사스키아의 무덤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으나 葬地(장지)마저 賣却處分(매각처분)된 事實(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렘브란트 生存時(생존시) 가장 가까웠던 醫師(의사) 핸디리코(Hand. ik Van Loom)의 傳記(전기) 가운데 전하고 있다.
  以上(이상)의 렘브란트의 生涯(생애)를 루벤스와 比較(비교)할 때 너무나 대조적인 차이를 느낄 것이다. 루벤스는 젊은 時節(시절)부터 한 번도 좌절과 시련을 겪지 않은 채 탄탄大路(대로)를 가듯 成功(성공)으로 치달은 畵家(화가)이었다. 그는 이태리 여행에서 귀족의 파트론를 만나 수석궁정화가로서 어디를 가나 상류층의 비호를 받았고 그 밑에서 아무런 마찰 없이 활동무대를 넓힐 수 있었다. 一生(일생)을 두고 어느 畵家(화가)도 미칠 수 없었던 그림의 製作量(제작량)은 많은 弟子(제자)들을 두었기에 工場(공장)의 生産品(생산품)처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그 만큼 그의 活動(활동)과 精力(정력)은 눈부신 것이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풍요한 安樂(안락)과 가정의 행복을 끝까지 누리었으며 그의 화려한 終命(종명)을 유럽의 상류인사들은 모두 애도하고 애석해 하였다. 말하자면 그의 人生(인생)은 그의 그림처럼 한 점의 어두운 그림자도 없었던 삶이었다. 여기에 비해 렘브란트는 청년기의 행복한 서막을 제외하고 일생토록 비극적 사건의 연속으로 불우한 종막을 마친 畵家(화가)이었다. 그의 예술을 비호하였던 특별한 파트론도 없었고 어디까지나 자신이 속한 시민계급의 입장에서 있었어도 오히려 냉대를 받고 고립에 빠졌으며 가정적인 불행마저 겹쳐 실의와 좌절감을 깊이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예술적 자존을 지키기 위해 고독감과 심한 갈등의식 속에서 완강한 투쟁을 벌이었고 깊숙한 내면세계의 추구로써 심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끈질긴 집념과 達觀(달관), 天才性(천재성) 때문이었다. 聖書(성서)의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神(신)이 주신 시련이라 여기고 예술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어떤 예술작품도 작가가 걸어온 삶의 반영체이라면 렘브란트에게는 人生(인생)의 여러 가지 고난과 비극의 체험이 곧 바로 심오한 그의 예술세계에 投影(투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人生(인생)을 投射(투사)하였다면, 렘브란트는 現實(현실)과 격리된 암울하고 회의적인 인생의 또 다른 陰影(음영)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너무나 對照的(대조적)인 두 巨匠(거장)의 예술에 대한 비밀을 풀 수가 있을 것이다.
  막스 리베만(Max Libermann)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프란스, 할스의 그림 앞에서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데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結論(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藝術世界(예술세계)를 그들이 살아온 풍토의 분위기나 개인적인 삶의 過程(과정)과 함께 비교할 때, 時代的(시대적) 制約(제약) 밑에서 서로 판이한 운명을 표출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인 과정을 보게 된다.
  要約(요약)하면 루벤스에게는 絶對制(절대제)의 貴族社會(귀족사회)에서 인생의 패배를 모르고 사랑 받고 보호 받아, 地上的(지상적)이고 現實的(현실적)인 것이 가장 理想的(이상적)이며 아름다운 것으로써 인식되었고, 이러한 그의 낙천주의적 세계관은 밝고 명랑하여 官能的(관능적) 色調(색조)와 생기발랄하고 다이내믹한 형태와 대담하고 호방한 구도의 예술을 창조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곧 바로 그가 속한 계급사회를 예찬한 솔직한 반영이었다. 그 점에서 그의 예술은 바로크시대의 精華(정화)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렘브란트는 共和制(공화제)의 市民社會(시민사회)에서 직업의 독립과 자유를 호흡하였으나, 급성장하는 시민의 대중적 취미와 갈등의식을 느껴야 했으며 가정적 비극과 경제적 파탄으로 불운한 삶의 좌절감과 고통까지 감수하여야 했다. 그의 삶이 외면당한 지상적 현실은 결코 루벤스처럼 감미롭거나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었고 냉랭하고 우울에 찬 겨울저녁의 날씨와도 같은 “무미건조하고 퇴색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현실이 아닌 세계 속에서 위로와 안식을 구한 것도 당연하였다. 그 세계는 기괴한 환상일 수 있었고 신만이 아는 그의 영혼세계일 수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어두움에 싸이고 신의 은총을 받는 자가 구원되는 것처럼 오직 빛에 의하여 다시 드러나는 세계의 비밀을 창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색조는 어두운 톤을 유지하고 상호침투하면서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의 통일을 이룩하는 질서를 찾았다.
  그림 속의 모델이나 구도 자체까지도 이에 일관되었다. 그는 현실에 보이는 그대로의 외관을 대단하게 생략하고 주제를 강렬하게 집약시키는 방법으로써 소위 표현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였으니 여기에 그의 내면세계의 응시가 감상자의 영혼에게도 공감을 끌어 들였던 것이다. 그 점에서 그의 예술은 시대를 뛰어 넘은 영원성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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