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新羅佛敎(신라불교)

차례

1.연재를 시작하며
2.新羅佛敎(신라불교)
3.新羅美術(신라미술)
4.新羅佛塔(신라불탑)
5.新羅金石文(신라금석문)
6.新羅歌謠(신라가요) (狼山(낭산)을 中心으로)
7.新羅(신라)남산유적
8.新羅古墳(신라고분)
9.新羅(신라)화랑도
10.新羅社會相(신라사회상) (골품계를 中心으로)

 


  新羅(신라)의 佛敎(불교)에 나타난 몇몇 顯著(현저)한 特徵(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은 點(점)이 드러난다.
  첫째로 新羅(신라)의 國王(국왕)은 例外(외)없이 熱心(열심)한 佛敎信者(불교신자)이었다. 그 중에는 治世中途(치세중도)에 出家修行生活(출가수행생활)에 들어간 경우까지 있었으며 新羅(신라)에 있어서는 國師(국사) 王師(왕사)의 制度(제도)가 있고 僧侶(승려)의 發言權(발언권)은 政治(정치) 國防(국방) 社會敎育(사회교육)의 多方面(다방면)에 미치고 있었다. 新羅(신라)에 있어서의 獨特(독특)한 靑年(청년) 엘리트集團(집단)인 花郞徒(화랑도)는 佛僧(불승)의 至大(지대)한 精神的(정신적) 影響下(영향하)에 있었다.
  또한 新羅(신라)에 있어서의 佛敎導入初期(불교도입초기)의 政治理想(정치이상)에는 佛敎(불교)의 精神(정신)이 깊이 浸透(침투)해 있었다. 例(예)컨대 國王(국왕)의 名號(명호)가 극히 濃厚(농후)한 佛敎的(불교적) 色彩(색채)를 띠고 있고 年號(연호), 地名(지명), 國名(국명)에까지 佛敎的(불교적) 名稱(명칭), 佛敎的(불교적) 理念(이념), 佛典(불전)에 관련 있는 것이 즐겨 採用(채용)되고 있었다.
  더구나 668年 三國鼎立(삼국정립)의 情勢(정세)가 終焉(종언)을 告(고)하는 그때까지 數多(수다)한 經典(경전)의 註疏(주소), 및 獨創的(독창적) 論著(논저)를 낼 수 있었던 것은 新羅(신라)에서만 보이는 사실이며 統一以前(통일이전)의 新羅佛敎(신라불교)에서 특히 强調(강조)되고 尊重(존중)된 實踐倫理(실천윤리)는 菩薩戒(보살계)의 精神(정신)에 따르고 있었다. 圓光(원광)(?~630)이 花郞(화랑)에게 주었다는 이른바 世俗五戒(세속오계)는 그것을 立證(입증)한다. 戒律(계율)을 특히 重視(중시)한 慈藏(자장)(643)은 菩薩戒(보살계)를 中國에서 導入(도입)했고, 元曉(원효)(617~686)도 梵網經(범망경) 菩薩戒本(보살계본)을 解說(해설)한 數種(수종)의 著述(저술)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新羅(신라)의 佛敎理解(불교이해)는 적어도 그 末期的(말기적) 變貌(변모)의 現象(현상)을 除外(제외)하면 극히 幅(폭)넓은 融通無碍(융통무애)의 性格(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會通(회통)을 모토로 하는 것으로 宗派的(종파적) 對立(대립)을 싫어한 것이다. 그와 같은 會通的(회통적) 性格(성격)은 佛敎(불교)의 中國宗派(중국종파)의 止揚(지양)과 儒敎(유교), 道敎(도교)의 包容的(포용적) 理解(이해)에까지 걸쳐있었다. 花郞道(화랑도)가 그러하며 元曉(원효)의 ‘和諍思想(화쟁사상)’이 그러했다.
  佛敎(불교)는 확실히 新羅人(신라인)의 漠然(막연)한 二元的 世界觀(이원적 세계관) -現世(현세)와 來世(내세)의 대립적 설정을 깊고 철저한 哲學的(철학적) 洞察(통찰)에 의해 정확히 이해하게 하는 구실을 하였다. ‘生死(생사)’ ‘涅盤(열반)’과의 ‘共和(공화)’的(적) 이해의 地盤(지반)을 준 것이 新羅佛敎(신라불교)이다.
  지금까지 말한 몇 가지 특징은 초창기의 불교에서 특히 顯著(현저)했으나, 隆盛期(융성기)에 이르면 불교의 自力的(자력적)인 解脫道(해탈도)인 菩薩修行(보살수행)의 생활태도가 쇠퇴하고 祈禱(기도)·祭禮(제례)의 神秘化(신비화), 敎學(교학)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求道者(구도자)의 모습은 보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또 9세기의 초엽부터 中國佛敎(중국불교)의 조류에 따라 禪宗(선종)이 도입되었다. 이는 하나의 새로운 형태의 불교로서 신라말기의 불교는 禪門九山(선문구산)의 開宗(개종)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것은 일종의 貴族趣味(귀족취미)의 발견이며,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사회의 혼란은 政治指導階級(정치지도계급)의 타락과 발맞춰 佛敎(불교)의 眞理(진리)를 대중사이에 올바로 실현되도록 작용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新羅末期(신라말기)서부터 高麗朝(고려조)에 걸쳐 迷信的 祈福的(미신적 기복적) 불교신앙을 대중들 사이에 盛(성)하게 한 원인이다. 지배층은 이제 정신적·사상적 지도의 힘을 잃은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佛敎(불교)의 건전한 이해는 신라의 興隆(흥륭)을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 병적인 이해는 신라를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정도의 상태로까지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 것이다.
  여기서 新羅佛敎(신라불교)의 精華(정화)라 해도 무방한 元曉(원효)의 諸著作(제저작)을 통해서본 사상적 특색을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元曉(원효)는 周知(주지)하는 바와 같이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의 思想(사상)에 心醉(심취)해 法華(법화), 金光明(금광명), 大乘同性(대승동성), 涅盤(열반), 華嚴(화엄), 菩薩瓔珞本業(보살영락본업), 大般若(대반야), 大集(대집), 藥師本願(약사본원), 등의 諸經(제경) 및 中觀(중관), 十二門(십이문), 瑜伽(유가), 攝大乘(섭대승), 등 諸論(제론)의 思想(사상)을 종합적, 直觀的(직관적), 실천적으로 이해한 탁월한 사상가이며 실천적 지도자이었다. 나는 그 自身(자신) 出家前(출가전)까지는 花郞(화랑)이며, 出家後(출가후)에는 花郞(화랑)의 교사이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는 文·武兼備(문무겸비)의 지도자이며, 僧·俗不二(승속불이)의 指導者(지도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결코 指導者然(지도자연)하지 않는 指導者(지도자)이며 奔放自在(분방자재)한 無碍人(무애인)이었다.
  그는 唐(당)에의 留學(유학)을 마다하고 國師(국사) 王師(왕사)의 顯職(현직)을 弊履(폐리)와 같이 생각한 民衆(민중)의 벗이며, 文章家(문장가)이고, 음악의 名人(명인)이며, 또 雄辯(웅변)의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律(율)에 拘碍(구애)됨이 없고 經(경)의 文句(문구)에 사로잡히지도 않으며, 儀式(의식)이나 呪文(주문)의 奴隸(노예)도 아니었다. 그는 淨土往生(정토왕생)의 理想(이상)이나 彌勒(미륵)의 信仰(신앙)을 높이 讚揚(찬양)은 하고 있으나 결코 自力吏生(자력이생)의 길, 건전한 휴머니즘의 중요성을 第二義的(제이의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地獄(지옥)이나 極樂(극락)을 치우쳐 他界(타계)에 求(구)하는 者(자)를 남몰래 下品(하품)의 衆生(중생)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最大(최대)의 염원은 智慧(지혜)의 完成(완성)에 의해 ‘하나’(크다는 의미의 한과 하나란 의미의 하나)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의 理想(이상)을 다른 말로 말하면 ‘大我(대아)’(한 나)를 現實化(현실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華嚴(화엄)의 ‘一(일)’과 ‘圓(원)’ 및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의 ‘大(대)’와 관련지어지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一(일)’ 즉 ‘하나’ 혹은 ‘한’은 모든 힘과 智慧(지혜)의 總括(총괄)이며, 佛敎的(불교적)으로 말하면 ‘다라니’(Dharani)이다. 이것은 또 모든 價値(가치)의 源泉(원천)(元曉(원효)가 말하는 ‘一心之源(일심지원)’)이며, 모든 鬪爭(투쟁)의 止滅(지멸)(元曉(원효)가 말하는 ‘和錚(화쟁)’)이다. 나는 이러한 元曉(원효)의 理想(이상)을 統一前(통일전) 新羅(신라)의 社會情勢(사회정세)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一(일)’에의 意志(의지)와 노력과 방법이 新羅(신라)의 政治指導者(정치지도자)와 社會中堅(사회중견)의 靑年(청년)엘리트 사이에 깊이 침투해 갔을 때, 三國統一(삼국통일)의 偉業(위업)이 성취되고 平和(평화)와 繁榮(번영)이 달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元曉(원효)의 가까운 친구이며, 唐(당)에 유학하고 후에 國師(국사)가 된 義湘(의상)은 智嚴(지엄)의 제자이며, 華嚴一乘法界圖(화엄일승법계도)라는 것을 만들어 극히 명료하게 華嚴一乘(화엄일승)의 정신을 신라인에게 가르친 高僧(고승)이지만 法界圖(법계도)를 중심으로 전개한 그의 사상도 전적으로 元曉(원효)의 정신에 일치하고 있다. ‘法(법)’과 ‘佛(불)’이란 불교적 세계관의 알파와 오메가를 각자 그 최초의 문자, 최후의 문자로 하는 七言三十句(칠언삼십구)(210字(자))의 詩文(시문)을 하나의 라인으로 54회 굴곡시켜 전체로서 하나의 四角(사각)을 구성하고, 그 알파와 오메가를 4각의 중심에 놓은 독특한 그의 法界圖(법계도)는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의 陀羅尼(타라니)를 굳게 붙잡고 인생의 正道(정도)를 갈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의 이상은 다른 한 사람의 신라승 明皛(명효)에 의해 다시 계승되어 ‘海印三昧道(해인삼매도)’라는 것을 현재까지 남게 하고 있다.
  義湘(의상)의 제자에 表訓(표훈)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五觀釋(오관석)이란 偈頌(게송)을 만들어 緣起(연기)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한 사람의 결코 independent 할 수 없고, 하나의 집단이 또 결코 independent 할 수 없는 협동체이며, 실존적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新羅人(신라인)은 이미 분명히 알게끔 교육받고 있었던 것이다. 元曉(원효)나 義湘(의상)이 강조하는 自他不二(자타불이)의 同體意識(동체의식)을 견지하고 실천에 옮기는 일이 신라에서는 국왕과 人民(인민)의 사이에 같이 깊이 自覺(자각)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新羅人(신라인)이 배운 불교적 인간상에는 般若(반야)의 理想(이상)의 即(즉)해서 ‘俳諧(배해)’의 정신을 갖고 생활하는 너그러운 태도가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신라의 서울 慶州(경주)의 석굴암에 새겨진  十一面觀音(십일면관음)의 像(상)에 잘 나타나있다. 이 觀音像(관음상)은 日本(일본)의 학자에 의해 九面觀音(구면관음)이라고 불린 일이 있으나 과연 一時(일시) 두 개의 面(면)이 切取(절취)된 시대가 있었으나 그것은 누군지 악의를 가진 者(자)의 所行(소행)이었음이 틀림이 없다. 九面觀音(구면관음)이란 원래 어디에도 없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의하면 新羅人(신라인)은 十一觀音(십일관음)을 대단히 尊崇(존숭)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는데, 一見(일견)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그 十一面(십일면)은 佛敎的 人間理想(불교적 인간이상)을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신라에서 유행한 十一面神呪經(십일면신주경)의 義疏(의소)를 보면 十一面(십일면)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우측 三面(삼면)은 慈相(자상)이며 선량한 衆生(중생)에 대한 隨喜(수희)의 相(상)이다. 그것에 셋이 있다. ①은 苦(고)만 있고 樂(낙)이 없는 有情(유정)으로 하여금 苦(고)를 떠나 樂(낙)을 얻도록 하려는 慈(자)이다. ②는 福(복)이 있으나 智慧(지혜)가 없는 有情(유정)으로 하여금 복과 지혜를 具定(구정)케 하려는 慈(자)이다. ③은 智慧(지혜)는 있으나 神通(신통)이 없는 有情(유정)으로 하여금 神通(신통)과 智慧(지혜)를 具備(구비)케 하려는 慈(자)이다.
  左側(좌측)의 三面(삼면)은 瞋怒相(진노상)(悲相(비상))으로서 迷惑(미혹)된 者(자)에 대한 瞋怒(진노)의 相(상)이다. 이것에도 셋이 있다. ①은 苦(고)의 果報(과보)를 떠나려고 하면서 도리어 苦業(고업)을 가중시키는 미혹된 者(자)에 대해 怒(노)하는 것이다. 그 ②는 樂(낙)의 果報(과보)를 구하려 하지만 樂(낙)의 원인을 모르는 자에 대해 怒(노)하는 것이다. 그 ③은 寂靜(적정)의 道理(도리)를 좋아하면서도 도리어 散亂(산란)의 境(경)에 執着(집착)하는 者(자)에 대해 怒(노)하는 것이라 한다.
  義疏(의소)에는 진노의 相(상)이 ‘武(무)’를 나타내며, 저 慈(자)의 相(상)이 ‘文(문)’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석굴암의 관음상에는 左右兩六面(좌우양육면)의 중간에 化佛(화불)의 상이 있고, 이것은 大乘(대승)의 근기를 갖고 수행하는 자에 대해 佛道(불도)의 究極(구극)을 說(설)하는 것이라고 義疏(의소)는 말하고 있다.
  頭上(두상)에는 또 三面(삼면)이 있는데, 이는 義疏(의소)에서 말하는 白牙上出面(백아상출면)으로서 정엄을 닦고 있는 자에 대한 칭찬, 수회의 상이다. 이 백아상출면의 뒤에 大爆笑面(대폭소면)이 있다. 般若(반야)의 광대한 지혜를 지닌 보살에게 善人(선인)도 惡人(악인)도 없다. 淨(정)도 不淨(부정)도 집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두루 모든 衆生(중생)을 다 받아들이는 大度量(대도량)의 相(상)이다. 이것이 곧 ‘俳諧(배해)’의 근거인 것이며 和諍(화쟁)의 근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라인이 삼국통일의 위엄을 성취할 수 있었던 그 요인은 그들의 단결과 협력은 불교의 四攝(사섭) (布施(보시), 愛語(애어), 利行(이행), 同事(동사))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四攝(사섭)의 정신은 元曉(원효)의 모든 저술에 강조되어 있고, 또 義湘(의상)의 法界圖(법계도)의 사면에도 表徵(표징)되어 거듭하여 강조된바 있는 德目(덕목)이다. 이러한 확신과 실천에서 신라인에게는 大海(대해)와 같고 大空(대공)과 같은 자신이 충만해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말하고 있다. ‘大海(대해)는 독약이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大空(대공)은 利劍(이검)이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大海非是毒藥所壤 大空非是利劍所傷(대해비시독약소양 대공비시이검소상) 이 힘이야말로 신라인 三國統一(삼국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原動力(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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