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語(언어), 世界(세계), 意味(의미)에의 論理的(논리적) 定立(정립)

Ⅰ. 序論(서론)

  인간의 세계에 관한 끊임없는 哲學的(철학적) 探究(탐구)는 항상 言語(언어)로 행하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란 세계에 관한 전부 혹은 일부를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간에 표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媒體(매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에 있어서 철학적 경향은 ‘窮極的(궁극적) 屬性(속성) 혹은 絶對(절대)에 대한 言明(언명)’ 등의 實體(실체)(Substance)를 탐구하여 體系(체계)를 세우는 일 따위의 일에 이제는 더 이상 관심을 쏟지 않는다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Hegel을 정점으로 한 절대주의적 思辨哲學(사변철학)의 體系(체계)는 ‘世界精神(세계정신), 혹은 絶對理念(절대이념)의 展開作用(전개작용)은 宇宙(우주)의 發展(발전), 實現化(실현화)’라는 주장으로부터 시작해서 ‘哲學(철학)이 科學(과학)과 藝術(예술)과 道德(도덕), 宗敎(종교), 政治學(정치학) 등을 포괄해서 照明(조명)할 수 있는 世界觀(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現今(현금)에 이르러 철학을 통하여 森羅萬象(삼라만상)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다는 총체적인 발언은 實證哲學的(실증철학적)인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常識的(상식적) 혹은 科學的(과학적) 입장에 의해 당연히 논박된다.
  1920년에서 1930년대에 Wittgenstein(1889~1951)과 Logical Empiricism 혹은 Logical Positivism이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철학운동은 철학이 사변철학 같은 感情的(감정적) 反應(반응)에서 論理的(논리적)인 批判(비판)으로 전진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과제를 가장 파격하게 밀고 나간 한 思潮(사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Wittgenstein의 경우 철학적 과제를 언어에의 논리적 비판으로 보고, 形而上學(형이상학), 認識論(인식론), 倫理學(윤리학) 등의 광범위한 諸(제) 分科(분과)에서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야기시켰던 것이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Wittgenstein의 사상을 明示的(명시적)으로 받아들이고 특히 認識的(인식적)으로 의미 있는 명제를 檢證(검증)하고, 構成(구성)하기 위한, 論理的(논리적) 分析(분석) (logicalanalysis)은 言語(언어)를 통해 행하였던 것이다.
  1929년에 정식 결성되고 M.Schlick(1882~1936)가 영도했던 論理實證主義者(논리실증주의자)들의 Vienna Circle에서 강력히 표방되었던 ‘科學的(과학적) 世界觀(세계관)’ 및 ‘統一科學(통일과학)’ 등의 표어는 대체로 자연과학적 태도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근대 이래 급진적 발전하에 있는 數學(수학) 및 自然科學(자연과학)과 哲學(철학)에의 양립을 꾀하려는 한 시도로 이해되며, 이러한 시도는 모든 관념(idea) 또는 개념(conception)은 印象(인상)(impression)으로 환원되었을 때만이 검증가능하다는 D. Hume의 견해를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Wittgenstein은 ‘Tractatus Logico Philosphicus'(1921)에서 言語(언어)와 世界(세계)와의 관계를 經驗的(경험적)인 관점에서라기보다는 순수한 論理的(논리적) 관점에서 不可分(불가분)의 關係(관계)로 파악하고, 指示意味論(지시의미론)의 견해를 전개시킴으로써, Carnap을 위시한 初期(초기) 論理實證主義者(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경우, 언어를 통해서 認識的(인식적)으로 참다운 意味(의미)의 基準(기준)을 찾아내려는 哲學的(철학적) 作業(작업), 즉 '檢證可能性(검증가능성)의 原理(원리)(Princiole of Verifiability)'를 통해서 각각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하여 반기를 들음으로서 암암리에 철학에 있어 새롭게 언어와 세계에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구축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Ⅱ. 本論(본론)

  (1) 言語(언어)와 世界(세계)

  Wittgenstein은 철저한 論理的(논리적) 原子主義(원자주의)(logical atomism)에 의거해서, 言語(언어)를 分析(분석)해 나가는 가운데 對象記述(대상기술)에의 최소의 의미단위를 要素命題(요소명제)(Elementarsatz)라고하고,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혹은 存在論的(존재론적) 面(면)으로 보장되는 더 이상 나누어 질 수 없는 單純體(단순체)(simple)를 상정했으며, 이렇게 더 이상 나누어 질 수 없는 단순체는 言語的(언어적) 次元(차원)에서 이름(Name)과 對象的(대상적) 次元(차원)에서 事物(사물)(Dinge)로 표명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한 명제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진위판단(眞僞判斷)은 분석된 요소명제들의 계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요소명제가 모여서 이루어진 소위 分子命題(분자명제)(Molekularsatz)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진위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즉 모든 참인 명제들은 오직 최소한 의미단위인 요소명제의 진리함수(truth-function)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명제의 眞理値(진리치)는 명제계산(calculus of proposition) 또는 진리함수계산(truth functional calculus)의 과정을 통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분석된 언어적 차원에서의 요소들, 즉 이름, 요소명제 분자명제들은 각각 대응되는 대상적 차원이 지시되는데 對象(대상)(Gegenstand) 原子 事態(원자 사태) (Sachverhalt) 復合原子 事態(복합원자 사태) (Tatsachen)가 바로 그것들이다.
  즉, Wittgenstein의 입장은 言語(언어)와 對象(대상)에 있어서 그러한 對應(대응)의 관계가 논구되지 않고서는 세계에 관한 어떤 철학적 언명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가 이름과 要素文(요소문)과 分子文(분자문)으로 나누어 질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듯이, 세계는 단순체로서의 대상 (Dinge 혹은 Sache)이 그 복합체인 사태 (atomic fact)와 그러한 사태들의 복합된 것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서 Tractatus의 2.06과 2.063에 나타난 ‘事態(사태)와 事態(사태)들의 복합의 定立(정립)과 非定立(비정립)의 실재이며, 그 總體的(총체적) 실재가 곧 世界(세계)’라는 言明(언명)은 바로 Wittgenstein의 세계에 관한 哲學的(철학적) 立脚地(입각지) ‘世界(세계)는 定立(정립)되어 있는 것 전체이다’라는 Tractatus의 첫 마디가 이해될 수 있는 핵심을 제공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想定(상정)된 대상, 세계에 있어서 단순대상(simple object)이 존립, 또는 그 연쇄인 원자사태(atomic fact)의 존립은 物理學的(물리학적) 사물의 分可物(분가물)들처럼 정확한 실례로 지적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만 Wittgenstein은 대상이라고 일컫는 단순체는 가능한 사태의 공간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可視的(가시적) 領域(영역) (a visual field)에서 색은 色彩空間(색채공간)(a colour space)에 의해 限定(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한 對象(대상)은 반드시 論理的 空間(논리적 공간) (logical space)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사태의 공간 안에의 대상(in a space of possible atomic fact)이라 함은 모든 대상은 ‘논리 공간’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존재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논리적 공간이란 事態(사태)의 存立(존립)과 그 可能性(가능성), 事態(사태)의 정의란 事態(사태)의 非存立(비존립)과 그 可能性(가능성)에의 合(합)’으로 나타내 질 수 있는 것이며, 그 合(합)이란, ‘논리적 공간에서의 사태들’이라고 명명된 ‘世界(세계)’ 그 자체인 것으로 지시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세계 안에 있는 對象(대상)들의 형식 (forms of objects)들은 필연적으로 空間(공간), 時間(시간), 色(색) 등의 여러 가지 論理的(논리적) 類比(유비) (logical analogy)로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前述(전술)한 바와 같이 대상 및 그 연쇄인 사태는 결코 物理的(물리적) 對象(대상)이 아니라, 완전 분석된 언어의 이름, 要素文(요소문) 등과 세계와의 類比的(유비적) 관련성에 의거해서 對象的(대상적) 차원에서 그것들이 존립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석된 사태의 대상들이 상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Tractatus에 의하면 이러한 언어와 대상과의 올바른 대응관계는 일대일 대응으로 성립되어 있어야 한다.
  또 명제형식의 형태는 사태형식의 형태와 유사하며, 명제는 그것이 나타내는 사태를 ‘투사의 법칙’(low of projection)에 의해 묘사한다. 즉, 명제는 대상 즉, 세계와의 투사과정에 있어서 단지 명제를 나타내기 위한 기호 (propositional sign)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라고 명명되는 Wittgenstein의 初期思想(초기사상)은 이와같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對象(대상)이고, 그 對象(대상)은 그것의 意味(의미)이다’라는 극단적 지시 의미론을 전개시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즉 명제가 차용하고 있는 기호는 다른 언어적 표현, 다시 말해서 한 사태에 대한 비유, 혹은 은유와 같은 것보다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은, 예를 들면 책상, 의자, 책 등과 같이 ‘空間的(공간적) 對象(대상)’을 직접 상상해 볼 때 더욱 선명히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단지 세계를 그리는 그림이며, 그 의미는 세계 그 자체인 것이기 때문에 언어는 세계와의 관련 안에서만, 즉 비독립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이러한 Wittgenstein의 의미론은 언어가 세계를 模寫(모사)할 때 자주 일상 언어에의 文法的(문법적) 規約(규약) 때문에 진정한 논리적 구조가 은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위적 언어 없이는 완전한 세계에 관한 模寫(모사)가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자연언어 대신 논리적으로 꽉 짜인 인위적 언어를 가짐으로써 완전한 대상에의 記述(기술)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Russell의 경우 이러한 의미로 ‘명확한 경제의 논리적 형식이 갖추어졌다면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것의 실재에의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즉 完全(완전)한 言語記述(언어기술)이 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서로의 견해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 방법의 파라다임(paradigm)으로 높이 평가된 Russell의 記述理論(기술이론) (theory of description)은 이러한 불완전한 언표를 완전한 예를 들어보자면 ‘그는 저 책의 저자이다’(He is the author of that book)이라는 명제와 ‘고양이는 포유동물이다’(A cat is a mammal)이라는 명제 속의 ‘이다’(is)라는 것은 똑 같은 상징(symbol)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문장을 분석해보면, 각각의 ‘이다’(is)는 서로가 공통성을 가질 수 없는 불완전한 ‘언어기술’이었다.
  첫째 문장은 ‘그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니고’, ‘저 책을 썼다’ He, and, no one else, wrote that book)라고 번역(translation)될 수 있다.
  Wittgenstein의 초기 사상은 이와같이 언어가 대상을 충실하게 묘사할 수 있을 때만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Russell의 기술이론을 받아들이고, 명제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기준을 찾으려는 논리실증주의의 檢證理論(검증이론)과 무난히 화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命題(명제)의 意味基準(의미기준)과 有意味性(유의미성)

  Hume(1711~1776)에 의하면 진정으로 참인 명제는 두 가지 유형에서만 있을 수 있다. 즉, ‘relations of idea'와 ’matters of fact'에 속한 명제들만이 진정으로 참인 명제들이다. 주지하다시피, 첫째 유형에 속한 명제들은 純粹數學(순수수학)과 形式論理學(형식논리학) 등의 명제들과 같이 형식적이고, 순수한 論理性(논리성)을 갖고 있는 것이며, 둘째 유형의 명제들은 自然科學(자연과학)에서 보는 바와 같이 實際的(실제적)이며 경험적인 性質(성질)을 갖고 있는 명제들이다.
  Wittgenstein에 의하면 첫째 유형의 명제는 眞僞條件(진위조건)(truth condition)이 두 개의 극단의 경우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 하나의 명제는 要素命題(요소명제)의 全眞僞可能性(전진위가능성) (all the truthpossibility)에 대하여 항상 참(truth)인 경우이고, 또 하나의 경우는 모든 진위가능성에 대하여 항상 거짓(falsehood)인 경우인데, 前者(전자)는 同語反復的(동어반복적) 혹은 自己說明的(자기설명적)인 恒眞命題(항진명제)(tautological proposition)이며, 後者(후자)는 矛盾命題(모순명제)인 恒僞命題(항위명제)(self contradictory proposition)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類(류)의 命題(명제)들은 새로운 經驗的(경험적) 事實(사실)에 대한 어떠한 知識(지식)도 부가하지 않고, 1+1=2 등과 같이 뜻을 바꾸지 않고, 다만 표현의 형식만을 변경시킨 규약(convention)에의 명제이다.
  따라서 동어반복적 명제 및 모순명제는 각각의 명제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내가 비가 오든가 혹은 비가 안 오든가에 대해 안다고 해서, 날씨에 대해 내가 아는 바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당연히 동어반복적 명제의 모순명제는 無意味(무의미)(sinnlos)한 것이다. 그러나 두 명제는 넌센스(unsinnig)한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두 명제는 마치 수학에 있어서 ○과 같이 한 기호를 나타내는 상징체계의 일부인 것이다.
  둘째 유형의 명제는 그에 반해서 동어반복적이며 모순 명제 등의 첫째 유형의 명제들처럼 ‘확실함’(certainty)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확률적인 가설(hypothesis)일 뿐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명제(empirical proposition)이라고 불리우는 이 명제는 새로운 경험에 의해 수정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확실한 명제로 대치 될 가능성을 갖는 명제들이며, 蓋然的(개연적) 명제들의 집합인 자연과학적 명제는 모두 여기에 속하는 명제들이다.
  Carnap(1891~)을 위시한 초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했던 ‘檢證可能性(검증가능성)에의 原理(원리)’는 전술하였던 바와 같이 이러한 명제들에 대한 意味(의미)의 基準(기준)을 설정하기 위한 시도였었다.
  다시 말해서 첫째 유형에 있어서의 검증(verification)이란 규약 안에 있는 규칙(rules)을 전제하고, 그 사용된 명제가 그 규칙에 위배되어 있는가아닌가 만을 검사하는 과정이 될 것이며, 둘째 유형의 명제는 가설에 머물러 있으므로 완전한 검증은 할 수 없으나 여러 가지 검증방법을 통하여 ‘실제적인 목적에는 충분한 정도의 확실성’에 도달시킨다는 것이다.
  초기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는 Wittgenstein의 Tractatus에 나타나 있는 검증가능성에 관한 언급은, 앞서 살펴보았던 세계와 언어와의 指示理論(지시이론)에서 나타나 있듯이 實在(실재)와 命題(명제)와의 관계를 意味(의미)의 문제와 결부시킴으로써 실재를 모사하는 그림(picture)이 실재와 올바른 대응관계에 있는가 어떤가를 검사함으로써 참과 거짓을 구별해 내는 것이었다. 특히 4.024에 나타난 ‘한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명제가 참인 때가 어떤 경우인지를 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言明(언명)은 명제의 意味基準(의미기준)이 어떻게 설정되어야한다는 것이 단적으로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Wittgenstein에 의해 시사된 검증이론은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 더욱 구체성을 가지면서 연마되었는데, 특히 Carnap에 의해 제시된 검증가능성의 원리는 그러한 것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첫째 지각에 의한 관찰에 의해 검증된다. 예를 들면 ‘나는 지금 ‘X’를 본다’라는 명제는 내가 X가 현재 있음을 직접 봄으로써 나의 시각이라는 지각형식에 의해 그 명제는 직접적으로 검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내가 주어져 있는 ‘X'를 보지 않을 때, 그 명제는 反證(반증)(disprove)되므로 이것을 Carnap은 직접적 검증(direct verification)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명제는 이렇게 항상 ‘직접적 검증’만을 요하는 명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검증할 수 없는 명제는 ‘간접의 검증’(indirect verification)에 의해 검사된다. 이 간접적 검증은 이미 검증된 명제와 검증된 명제로부터 연역된 명제들의 ‘직접적 검증’ 등의 적절한 혼합에 의해 수행된다. 실례를 들어서 이러한 간접적 검증과정을 수행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즉 ‘이 열쇠는 쇠로 만들어 졌다’ (This key is made of iron)라는 명제를 검증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이 열쇠를 자석 (Magnet)에 가까이 놓으면, 이 열쇠가 자석에 달라붙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추론(deduction)이 가능한 것이다.

  P1 ‘이 열쇠는 쇠로 만들어졌다’(전제된 명제)
  P2 ‘쇠로 된 물건이 자석 근처에 놓여진다면 그 물건은 달라붙는다’ (물리학적 법칙으로 검증된 명제)
  P3 ‘이 물건은 자석이다’(현재 직접 검증되는 명제)
  P4 ‘열쇠가 자석에 가까이 있다’ (현재 관찰로 직접 검증되는 명제)
  P5 ‘결론적으로 그 열쇠는 그 자석에 달라붙을 것이다’ (결론)

  전제로부터의 명제는 관찰에 의해 그리고 관찰로 인해 연역된 명제에 의해 검사되었으며, 그러한 과정 끝에 나타난 결론의 명제 특성은 하나의 예언(a prediction)으로만 규정된다.
  즉 이러한 명제는 ‘…할 것이다’라는 경험에 근거하는 가설(hypothesis)이므로 어디까지나, 개연적이다. 즉 달라붙지 않을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있는 것이므로 ‘모든 쇠로 된 것은 자석에 달라붙는다’라는 명제는 ‘모든 쇠로 된 것은 자석에 달라붙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반증(disprove)의 가능성도 항상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예로 든 명제류의 성격은,

  (T1) 현재의 지각 혹은 다른 경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것.
  (T2) 따라서 그 지각이나 경험으로서 검증될 수 있는 것.
  (T3) 아니면, 이미 검증된 다른 명제들과 함께 처음 전제로부터 미래의 지각에 관한 명제들이 이끌어내질 수 있는 것만이 유의미(meaningfulness)할 수 있다라고 요약된다.

  이러한 뜻에서 검증가능성이란, 어떤 명제에 이론적 의미를 주는 것은 그에 수반되는 心象(심상)(image)이나 思考內容(사고내용)(thoughts)이 아니라, 그로부터 지각될 수 있는 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해서 ‘검증 가능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명제가 유의미하지 않다라는 것은 검증불가능한 명제이기 때문에, 의미의 기준이 없으며, 다만 그러한 명제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그 명제에 대해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모른다는 것뿐에서 이다.

(3)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命題(명제)와 哲學(철학)의 機能(기능)

  전통철학에 나타난 哲學的(철학적) 命題(명제)들은 자주 世界(세계)의 본질과 원리는 ‘어떤 것’(etwas)이라고 언어로 定議(정의)될 수 있는 것으로 表明(표명)되는 듯하다.
  Thales에 의하면 세계의 본질은 물(水(수))이며, Heracleitos에 의하면 불(火(화))이며, Pythagoras에 의하면 수(數)이다. 또한 뭉뚱그려서 一元論者(일원론자)(the monist)들에 의하면 ‘모든 存在(존재)하는 것의 기초원리란 오직 하나이다’라고 주장하고, 二元論者(이원론자)(the dualist)들에 의하면, ‘原理(원리)는 두 개이다’라고 주장한다. 또 唯物論者(유물론자)(the Materialist)와 唯心論者(유심론자)(the Spiritualist)에 의하면 ‘모든 것은 物質的(물질적)이다’ ‘모든 것은 精神的(정신적)이다’라고 정의한다.
  또 Hegel에 의하면 ‘理性(이성)은 實體(실체)요, 동시에 무한한 힘이요…그것 자신의 무한한 질료다. …이성은 모든 사물이 그것에서 그것들의 존재를 끌어내는 실재다’라고 말하고 있다.
  전술하였던 Carnap의 檢證可能性(검증가능성)의 기본적 성격 T1, T2. T3에 의거해서 살펴본다면, 이러한 ‘경험을 초월하는 어떤 것에 대한 지식에 대한 기술’은 다음과 같이 반박된다.

  (A1) 그러나 명제들은 현재의 지각 혹은 경험에 관해서 무엇인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A2) 따라서 검증할 수 없다.
  (A3) 그러므로 미래를 위하여 기대할 수 있는 어떤 지각이나 느낌, 경험을 언표하는 명제를 전혀 노출시킬 수 없다.

  물론 이러한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言明(언명)에 관한 배격은 현대철학에 있어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적 입장에 있어서 형이상학에의 배격은 사유로 가장한 터무니 없는 말 (nonsense)로 형이상학적 언명을 동일시함으로써 형이상학적 명제의 似而非性(사이비성)(pseudogenes)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었다. 즉 형이상학적 명제가 틀린 명제가 된다라는 것이 아니고, 형이상학적인 명제는 실제에 있어 참이 되거나 거짓이 되는 명제 자체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Wittgenstein의 말과 같이 ‘말할 수 없을 진대, 침묵하라’ (Where of one can not speak, there of one must be silent)라는 말만을 단지 그런 부분에 대해 언표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Carnap이 말하는 ‘理論的(이론적) 內容(내용)’(theoretical contents)이란 Reichenbach가 주장하는 지식의 본질인 ‘一般化(일반화)’이며 說明(설명)(explanation)이다. 예를 들어서 ‘불을 나무로 비벼서 일으킬 수 있다’라는 명제는 ‘개인적인 여러 경험을 일반화함으로 도출된 지식’이다. 그러므로 ‘불을 나무로 비벼서 일으킬 수 있다’라는 명제는 한 사실의 발견에의 기술이며, 올바른 일반화에의 기술이다.
  그렇지만 이 명제에 있어서 ‘나무를 비벼서 불을 만든다’라는 사실과 무관계한 요소는 일반화를 하는 과정에 있어서 유해한 요소인 것이다. 즉 그것은 그 사실 안에서 무관계한 요소들이다.
  그러한 무관계한 요소는 잘못된 類推(유추)를 하게함으로써 한 올바른 사실에의 명제를 허위적 설명으로 만들기 쉽다. 경험을 초월하는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기술할 수 있다고 공언하는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모두 이렇게 허위적 설명, 즉 ‘心象(심상)과 合理的(합리적) 說明(설명)’ ‘一般性(일반성)과 類推(유추)와의 혼동에 의해 나타난 산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어떤 이론적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지식인 척하는 ’似而非性(사이비성)‘에 있었던 것이다.
  Wittgenstein은 이러한 意味(의미)에서 Tractatus안에서, 哲學(철학)이란 한 理論(이론) (a theory)이 아니라, 活動(활동) (an activity)이며, 哲學的(철학적) 作業(작업) (philosophical work)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활동 들은 思考(사고)를 표명하는 불투명하고도 혼란스러운 명제 (opaque and blurred propositions)를 명료화 (elucidation)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던 것이며, 한마디로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critique of language)의 한 활동인 것으로 일관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Wittgenstein의 언어에서 중시 태도는 초기 논리실증주의의 견해인 感覺(감각)(sensation)을 통한 物理的(물리적) 事物(사물)(material thing)의 정확한 記述(기술)을 행하려는 기도는 상호 합일점을 갖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물리적 사물은 감각으로 환원 (reduction)될 수 있으며, 그 환원의 정당성에 근거해서만이 물리적 사물은 정확히 언표될 수 있다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표현에서 여전히 논리적으로 의미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명제가 매우 불투명한 채로 남아 있음으로 해서 완전히 받아 질수가 없었다.
  완벽한 言語記述(언어기술)을 가지는 것이란, 전술했던 바와 같이 論理的(논리적) 構成(구성) (logical construction)을 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物理的(물리적) 대상의 本性(본성)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물리적 대상의 定議(정의)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물에 관한 정의를 정확히 기술하기 위해서는 일상 언어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완벽한 논리구조를 갖춘 人工言語(인공언어)(artificial language)가 필요하며, 이러한 인공언어에의 가능성은 Leibniz의 보편문자로부터 출발한 오늘날에 눈부신 발전을 한 記號論理學(기호논리학)(symbolic logic)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구현되었던 것이다.
  Frege, Russell, Whitehead등에 의해 이러한 언어에의 기능은 수학이 논리학에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점차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기호논리학은 要素命題(요소명제)를 표시하는 병제변항(propositional variable)과 not, and, or if then, same등을 나타내는 논리적 결합어 (logical connective) ~,>,⊃,≡, 또 병제의 量化(양화)(quantification)를 나타내는 (x) (Ex)등에 의해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 논리구조 안에서는 삼단 논법(syllogism)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음에도 자명한 문장들을 이 논리구조 안에서 증명하고 또 전통적인 논리구조인 삼단논법도 역시 이러한 논리구조 안에서 포함된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논리영역에의 확장을 성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확장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을 때, 펜을 들고 ‘계산을 해 봅시다’ (Letus Calculus)라고 까지 이를 수 있는 Leibniz의 이상을 완전히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언어의 논리성을 전통적인 문법구조로부터 새로운 시각으로부터 통찰케 함으로써 사고의 협착성을 극복하고, 논리적 분석을 행하는 철학의 새로운 구축점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Ⅲ. 結論(결론)

  초기 Wittgenstein의 입장은 論理的(논리적) 原子主義(원자주의)(Logical Atomism)를 기초로 하여 物理的(물리적)인 대상들처럼 모든 存在(존재)하는 것은 原子的(원자적) 事實(사실)(Atomic Fact)로 나누어 질 수 있고 그것에의 記述(기술)에 사용되는 言語(언어)도 원자的(적) 命題(명제) (atomic proposition)로 역시 나누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事實(사실)과 한 命題(명제)가 각각의 올바른 對應關係(대응관계)로 성립되어 있기만 한다면 그 명제는 진정으로 참인 언어의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참 意味(의미)를 記述(기술)할 수 있는 論理的(논리적) 言語(언어)가 요청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候騎(후기)의 Wittgenstein은 初期(초기)의 Tractatus가 전제한 人爲的(인위적) 언어를 지시하는 언어의 보편적 형태 역시 또 다른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요소가 내포되었다는 점을 들어서, 이러한 인위적 언어에의 신념은 日常言語(일상언어)에의 관심으로 전격 변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언어를 통한 哲學的(철학적) 작업 그 자체가 부인된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언어의 의미는 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Wittgenstein의 철학적 변화와 더불어 初期(초기)의 論理實證主義(논리실증주의)가 전적으로 의존했던 綜合命題(종합명제) (syntactic proposition)와 分析命題(분석명제) (analytic proposition)의 二元的(이원적) 구분에의 正當性(정당성)이 그 전제로부터 도전을 받음으로서, 검증원리에 의한 의미에의 기준은 그 전제로부터 의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종합명제와 분석명제에의 구분은 그리 확실한 것이 아니며, 직접 경험에 의거한 原子的(원자적) 命題(명제)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Quine에 의해 대표되는 이러한 초기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반박은 檢證原理(검증원리)에 있어서, 完全檢證可能性(완전검증가능성) (complete verifiability)에서 確證可能性(확증가능성) (confirmability)에로, 다시 部分檢證可能性(부분검증가능성) (partial verifiability)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形而上學(형이상학)은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 ‘지식에의 환상’ (the illusion of knowledge) 혹은 ‘한 心象(심상)의 무비판적 허위설명’이라고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carnap은 ‘形而上學類(형이상학류)의 命題(명제)가 강력하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라는 사실로부터 착안해서 그러한 명제가 ‘확실히 무엇인가를 표현하고는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언어의 표현적 기능 (expressive function)으로서의 형이상학적 언명을 암암리에 인정하였던 것이다.
  즉 ‘서정시’에서와 같이 형이상학적 명제는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태를 서술하는 것도 아니며, 이론적인 뜻도 내포하지 않으며 지식이라는 체계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며, 서정이 이와 같은 표현양식으로 간주되던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로 초기 Wittgenstein과 초기 논리실증주의가 강력히 추진했던, 언어분석을 통한 세계와 의미에의 논리적 경위는 절충주의의 혹은 소극적 의미의 철학적 企圖(기도)로 自認(자인)되어야 했으나, 엄격한 논리적 분석을 통한 世界定位(세계정위)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哲學史(철학사)에 있어서 큰 의의로 남겨질 수 있을 것이다.


[受賞所感(수상소감)]
言語(언어), 世界(세계), 意味(의미)에의 脈(맥)은 나에게
조금은 說得力(설득력)이 있었던 모양…

  脈(맥)이 있는 말거리를 찾는 이유는 대화가 가능한 他人(타인)이 있음을 豫期(예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부터 그러한 期待(기대)를 破棄(파기)하곤 한다.
  ‘…우리들은 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는 자기 자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데미안)
  ‘…불멸의 삶을 갈망하지 말고 가능한 영역을 탕진하라.’ (시지프의 신화)
  어째 좀 까츠름한 느낌에의 까닭은 남의 이야기가 곧바로 그 대화 가능한 他人(타인)이 되지 않아서 일까?
  아마도 이런 트집스러운 관점에서라면 아무리 훌륭한 이야기라도 도저히 說得力(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言語(언어)와 意味(의미)에의 脈(맥)은 나에게 조금 說得力(설득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즉, 나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이며, 그러한 것은 자신의 言語(언어)안에서 執着(집착)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自己示威(자기시위)인 것으로….
  어차피 窮極的(궁극적) 明析(명석)이 있을 수 없다면 나는 語訥(어눌)할 수밖에 없겠다. 選(선)하여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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