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국장
드디어 우여곡절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한지 18년 9개월 만이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구성돼 편찬 작업에 착수한지 꼭 7년 11개월 만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친일파로 기록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친일문제연구의 선구자로『친일문학론』의 저자인 임종국 선생이 돌아가신지 꼭 20년 만에 후학들이 이룬 성과다. 임종국 선생은 이른바 ‘재야사학자’다. ‘강단 사학자’들이 애써 외면했던 친일문제연구라는 외로운 깃발을 들고 들판에 홀로 선 분이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하듯 임종국 선생 역시 연구에 전념하느라 가족을 돌보는 일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 임문호를『친일문학론』안에 친일파로 써넣어야만 했던 고뇌는 어떠했을까. 컴퓨터도 없던 시절, 싸구려 수첩에 빼곡히 적어 놓은 약 2만여 명의 친일인명카드는 20년 후 친일인명사전이 있게 한 밀알 바로 그 자체였다. 원로시인 이기형은 임종국 선생의 혈고인 친일인명카드가 팔만대장경처럼 여겨질 때 비로소 우리 역사가 바로 설 것이라고 역설(逆說)했다.

친일인명사전의 연혁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60년 전인 1949년 6월에 일어난 두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49년 6월 6일 백주대낮에 친일경찰들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던 반민특위(反民特委) 습격사건과 20일 후에 일어난 백범암살사건 말이다.

반민특위 습격과 백범 암살

 백범 암살을 정점으로 하여 이 땅에서 친일청산은 민족적 염원이 아니라 빨갱이의 농간이요 국론분열행위로 간주되어, 철퇴를 각오해야만 했다. 여전히 60년 전 친일청산 반대 논리는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반복되고 있지만 희망적인 것은 친일인명사전의 발간 과정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참여였다.

친일의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득권자들의 방해로 여러 차례 사전 발간이 난관에 부디 칠 때마다 어김없이 시민들이 나서주었다. 대표적으로 2003년 말 단 11일 만에 국민모금을 통해 5억 원을 모아준 일과 이에 앞선 1999년 사전 편찬을 지지하는 전국 교수 1만인 서명이 그것이다.

국민 손으로 이뤄낸 친일인명사전

이러한 자랑스런 기록은 대한민국이 2차 대전 종료와 함께 진행된 파시스트와 그 협력자 처벌이라는 시대정신을 따르지 못한 유일한 나라라는 오명(汚名)을 벗기 위한 민간차원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다. 아마도 당분간 친일인명사전을 능가하는 근현대인물사전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사전이기도 하거니와 역으로 말하면 친일문제연구가 일천한 우리 현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온 국민이 친일파를 규탄(糾彈)하지만 정작 친일파 이름을 말해보라면 몇 명이나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열명을 거명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친일인명사전은 친일청산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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