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반대말은 반감이 아니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의 거짓 인생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트루먼 쇼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시청자(視聽者)’다.

시청자에게 있어 혼란은 트루먼 쇼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트루먼을 보여주는 화면이 잠시 끊어질 때 발생한다. 문제는 찬성과 반대가 아닌 소통(疏通)과 단절에 있다. 트루먼 쇼를 시청하는 한 우리는 모두 트루먼에게 가짜 인생을 살도록 하는 게임의 공범자가 된다.

하지만 트루먼 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시청자에게는 보는 것 이상의 행위가 허락되지 않는다. 시청자는 오직 소비함으로써 트루먼 쇼라는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필자가 최근 ‘루저(loser)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최초로 접한 것은 “179.9cm도 루저다!”라는 기발한 문구를 내세운 한 온라인 쇼핑몰의 깔창 광고를 통해서였다.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한 여대생이 발언한지 채 하루가 되지 않아 등장한 이 광고는 지금 유희를 넘어 사회현상으로 파급(波及)되고 있는 루저 발언(發言)의 위치와 속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이를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집단적 반발로 해석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외모로 대표되는 주류적 가치에 대한 갈망과 거기에 편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의 표현에 가깝다. 외모에 대한 놀림과 비하는 유머의 코드로 오랫동안 유통되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이번 루저 발언의 파괴력은 ‘루저’의 단순명쾌한 위치지정에 있다. 친절하게도 180cm 이하로 수치화 시켜준 ‘외모’로 대표되는 주류적 가치의 기준은 시청자의 위치를 관람자에서 놀림의 대상으로 역전시킨다. 주류적 가치에 편입(編入)되지 못한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한 루저 발언은 ‘장기하와 얼굴들’과 같은 루저를 위로하는 루저 문화의 대척점에 있을 뿐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는 이미 공감과 반감의 두 얼굴을 가지고 루저 문화의 게임 속에서 놀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놀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저 발언에 관련한 논란(論難)은 그 논란까지도 일종의 재밌는 놀이과정으로 소비된다. 논란이 일어날수록 축제에 활기는 더해지고 놀이는 즐거워진다.
하지만 놀이가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죄의식에서는 눈이 멀어진다. 그들(혹은 그들로 대표되는 우리)은 쉽게 집중하고 쉽게 질리며 적어도 놀이 안에서는 타율이건 자율이건 실제의 윤리나 책임들은 쉽게 무너뜨린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실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양한 뉴스와 패러디물을 보며 스스로를 축제의 행위자인양 착각(錯覺) 하지만 대다수 네티즌은 결국 관객의 위치에 머문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끝나면 채널을 돌리면 그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트루먼 쇼’의 엔딩에서 트루먼 쇼의 팬이었던 두 경비병이 주고받는 마지막 대사는 실로 의미심장하다.

“끝났네. 이제 뭘 보지?”

“다른 데 뭐하나 틀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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