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gel 美學(미학)과 심미주의 비교연구

1. 서론

  일견 보기에 따라서는 Hegel과 France 審美主義(심미주의)의 비교, 말하자면 철학과 예술에 대한 논리적인 혹은 학적인 고찰은 매우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도 않으므로 그 타당성이 염려되고 자칫하면 위험성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나, 실재에 있어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 유사성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본다면 Hegel의 시대는 Kant에서 시작하여 Fichte, Schelling Hegel에 이르는 이를테면 독일 觀念論(관념론)이라 할 수 있다. Hegel은 그보다 먼저 언급된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그 커다란 줄기는 함께 하면서도 또한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미비점을 수정과 보완 혹은 뛰어넘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때문에 Hegel에 대하여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Kant, Fichte, Schelling 등에 어느 정도의 언급이 불가피하여, 이들 인물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 미학에서 시작하여 Kant에 이르는 미학을 비판하고 있으며, 또한 Schelling이 참여했던 ‘疾風怒濤(질풍노도)로 대표되는 독일 浪漫主義(낭만주의)운동에도 반대하고 있다. 이 커다란 시대적 흐름이었던 두 사조에 대해 그 단점을 극복하려 했던 것이 바로 Hegel 미학의 중심인 것이다.
  Hegel 미학이론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구별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한가한 노릇인지도 모른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Hegel 미학 내지 Hegel학파의 미학은 Kant와 Kant학파로 대표되는 형식미학과 대립하는 내용주의 미학을 대표하고 있다.
  Kant의 미학과 대립적인 입장에서 있는 내용 미학은, 미적 가치가 표현의 형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현물의 내용에 있다고 주장한다. 내용은 감상하는 자가 보다 훨씬 깊은 정신적-형이상학적 내용, 즉 이념을 의미한다.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려면 그 속에 형이상학적 의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Hegel은 미를 이념의 감성적 현상이라고 정의하는데, 이 이념이란 바로 절대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예술철학은 절대정신의 철학의 일부이며, 절대정신은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의 통일이며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정신이다.
  이것은 세 가지로 수행되는데, 예술에 있어서는 직관의 형식으로, 종교에 있어서는 표상의 정신으로 그리고 철학에 있어서는 관념의 형식으로 수행된다.
  Kant철학은 형식성에도 불구하고 ‘形而上學的 美學(형이상학적 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Kant는 이를 선험적 내지 주관적 보편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Hegel의 관념적 미학은 Kant에게서 그 근원을 찾아보아야 마땅할 것이며, 미를 이념이라고 정의한 것도 미를 ‘超越的 實體(초월적 실체)’라고 한 Schelling의 예술관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egel의 미학은 Kant와 Schelling의 그것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Hegel이 말하는 이념이란, 예술은 美(미)와 철학의 완성이요 그대상은 절대자라는 Schelling의 주장과 그 뜻이 다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Hegel은 많은 부분에서 Schelling의 낭만주의적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Hegel은 Schelling의 철학을 권총에서 나오기만 하는 총알과 같다고 하여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Schelling의 무형식성을 비판하면서도 형식성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내 귀환인 것이다. 진정한 학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형식적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자기 자신 속에 그냥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이 자기를 떠나 자기 자신을 정신으로 자각하고 다시 출발점인 자기 자신에로 돌아오는 ‘자기내 귀환’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Hegel의 미학을 이념으로 설명되는 내용 미학과 ‘자기내 귀환’으로 설명되는 형식미학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때문에 Hegel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을 구별하여 그가 어느 편에 섰던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그는 어쩌면 형식과 내용을 그의 이론전개상 모두 섭렵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심미주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낭만주의 내지 자연주의(혹은 사실주의) 등 그 전시대의 방식을 극복함으로써 성립하고 있는데, 심미주의에서나 Hegel의 미학에서나 藝術的 天才(예술적 천재)를 인정하는 그러한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두 입장 모두 낭만주의적 방식을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Hegel에 있어서는 철학 내지 미학이라는 이론으로 체계적으로 주장되고 있는데 반하여, 審美主義(심미주의)에 있어서는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자유분방하게 발휘되고 있으나 그 근본정신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Hegel 미학에 있어서의 이념이 지닌 이해로서, 그 형식성을 살펴봄으로써 심미주의 운동에 있어서의 형식성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2. 본론

  (1) Hegel 美學(미학)에 있어서의 그 理念(이념)과 그 형식성

  Hegel은 미의 본질을 정신의 보편적인 절대정신으로서 이념의 감각적 현상이라고 하고 정신에서 산출되는 藝術美(예술미)를 自然美(자연미)보다도 더욱 고차적인 완전한 미로 보았으며 미학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았다.
  Hegel과 Schelling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간략하게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의 공통점이란 모두 ‘절대자’ 혹은 ‘절대정신’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술은 어떤 높은 경지의 발현 내지 구현 혹은 하나의 이상의 실현으로 보고 있다.
  예술은 靈感(영감)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술이 詩(시)를 써주지는 않는다’고 전제한 Hegel은 작품에 있어서 감상적인 것은 하나의 계기로써 미적 대상 구조의 전체 표면과 가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藝術(예술)에 있어서 감성적인 것이 정신화되어 있다.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이 감성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정신적인 생활 활동에서 산출되어야 하고 이 主觀的 活動性(주관적 활동성)으로서의 이 산출방식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작품에서 발견하는 여러 규정성을 낱낱이 자기 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감성과 직접성의 계기를 자기 속에 갖고 있는 정신적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바로 Hegel과 Schelling이 그 예술관에 있어서 크게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살펴본다면 그것의 표현 형식이 감성적 형식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술이란 이 두 측면을 자유스럽게 화해시키는 總體(총체)에까지 매개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이념은 절대자로서 파악하는 形而上學的 論理學(형이상학적 논리학)의 이념과는 다르다. 논리학의 입장에서는 이념은 주관적 개념과 객관과의 ‘종합적 止揚者(지양자)’로서의 참 자체를 말하지만, 예술미로서의 이념은 ‘본질적으로 개별적 현실성이어야 하는 것’이다. 예술적 정취는 오로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슬픔이라는 것, 기쁨이라는 것 등의 일반형이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념은 그것의 개념에 알맞게 이루어진 현실성으로서의 이상이라고 파악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참되게 구체적인 이념이 참된 형상을 만들어 내고, 그리고 이 양자가 일치될 때 ‘理想(이상)’이 이루어진다’고 Hegel은 예술미의 이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안에 간직했던 이념이 ‘스스로 흘러 나와’ 구체적인 객체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Schelling이 초월적인 것으로만 이해한 예술미에 대한 참된 헤겔식의 다른 이해인 것이다.
  예술의 본질을 기술적 제작 활동이라기보다도 정신의 소산으로써, 절대자를 인식하며 최고의 진리를 계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헤겔은 ‘美(미)를 理念(이념)이라고 한다면 美(미)와 知(지)는 일면 동일한 것이다’ 즉 미는 자체에 있어서 진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나 상세히 살펴보면 진이 미와 상이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즉 이념이 진인 것은 그것이 그 即自態(즉자태)에 있어서 그리고 그 일반 원리에 따라서 이념으로 존재하며, 그러한 것으로 思惟(사유)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이념이 감각적, 외적으로 존재하는데서 있는 것인데, 또한 실존으로서 밖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와 같이 그 외면적 실재에서 직접의식에 관여되어, 개념이 그 외면 형식과 직접 일치가 되게 되면 이념은 眞(진)일 뿐만이 아니라 美(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美(미)는 ‘理念(이념)의 感覺的 現象(감각적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Hegel 미학의 좀 더 발전된 형태인 그의 寫實(사실)과 抽象(추상)의 설명으로 들어가 보면 그의 예술관에 대해 보다 이해가 가승해지고 또한 그가 어떻게 하여 浪漫主義(낭만주의)의 해체를 선언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다음에 논할 審美主義(심미주의)와의 그 형식에 있어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Hegel은 예술의 역사를 동방의 여러 민족의 ‘象徵的 藝術形式(상징적 예술형식)’과 그리이스와 로마의 ‘古典的 藝術形式(고전적 예술형식)’과 기독교권인 유럽의 ‘浪漫的 藝術形式(낭만적 예술형식)’이라는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첫째의 상징적 예술형식은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을 탐구하되 미규정적인 추상물에 머물렀고, 둘째의 고전적 예술형식은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알맞은 합일성을 발견하였고, 세 번째의 낭만적 예술형식은 고전 예술에 의하여 완성된 내면성과 외면현상의 통합이 해소되고, 형태는 어찌되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에서 정신성이 자유에로 넘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동방예술을 예술의 전단계로 보고 여기서 제외한다면, 남은 것은 그리이스·로마의 고전예술과 게르만의 낭만예술이다. 이 두 예술형식은 다시 寫實(사실)과 추상이라는 두 원류에 환원시킬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예술형식과 같이 낭만예술도 해체의 길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Hegel의 생각이다. 말하자면 內面(내면)으로만 向(향)한 낭만예술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본래의 신성에서 主體性(주체성)의 세속적 형태로 나아가 신성한 것을 새로운 인간적인 것에서 찾아야 되는데 그 인간적인 것이란 인간의 마음의 높이와 깊이를 말하고 즐거움과 고뇌, 노력과 행위의 운명속에 있는 보편 인간을 뜻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Hegel은 예술이 다른 문화 일반과 같이 ‘시대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낭만예술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세속적 형태로 나아가 새로운 인간적인 것에서 신성한 것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Hegel의 절대자 혹은 절대정신으로 표현되는 ‘이념’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어떻게 낭만주의 사조를 부정하고 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다음에서는 Hegel의 미학에 있어서의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그의 형식에 구체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Hegel의 형식을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 즉 세단계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을 Hegel은 ‘即自的 存在(즉자적 존재)’ ‘對自的 存在(대자적 존재)’ ‘即自·對自的 存在(즉자·대자적 존재)’로 나타내며 이 세 단계에 해당되는 정신으로 표현한다. 절대적 정신은 스스로에 복귀한 정신으로 그 영역은 다시 예술, 종교, 철학으로 나누인다.
  정신이 이렇게 세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Hegel은 변증법으로 파악했다. 그러므로 변증법은 헤겔에 있어서 존재의 발전 법칙이다. 미학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것은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정신의 자기발전의 표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현상이란 헤겔이 말하는 세계정신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 것이며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모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상적인 것이다. ‘법철학 강요에서부터 우연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理性(이성)의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진행된다. 역사를 움직인다고 생각되는 많은 인물들은 결국 보이지 않는 ‘理性(이성)의 狡智(교지)’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에 불과하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서야 날개를 편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는 이성이 만들어 놓은 역사발전을 그 발전이 수행된 이후에 파악하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絶對精神(절대정신)을 내세우는 점에서 Hegel의 철학은 觀念論(관념론)이고 그 발전을 辨證法(변증법)으로 파악하는 점에서 Hegel의 辨證法(변증법)은 그의 철학뿐만 아니라 그의 미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創作者(창작자)의 자기 대상화로서의 형식을 과소평가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창작자의 自己意識(자기의식)과 자기파악의 계기가 바로 이 형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형식을 Hegel은 ‘精神(정신)의 自覺(자각)’이라고 불렀다. 자기를 인식하는 정신이 絶對精神(절대정신)이라고 전제하는 만큼 Hegel이 예술을 ‘絶對精神(절대정신)’으로 간주한 것은 옳다’
  무의식이라는 Hartmann의 설명은 매우 타당한 해석이다. Hegel은 미학에서, 표출되는 絶對精神(절대정신)에 대해 絶對藝術(절대예술)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즉 일단 자기를 떠난 정신은-자기를 본질적으로 포착하기에 이른 자기意識(의식)이라고 하는 극단적 국면으로 벗어나 버리게 된다. 이러한 의식이야말로 자기의 세계를 상실하였음을 비통해 하면서도 또한 현실계로부터 초탈한 그의 실재를 다름 아닌 자신의 순수성을 바탕으로 해서 창출해내는 자기 내적인 확신을 뜻한다.
  이러한 시점, 시기에 다다르면 ‘絶對藝術(절대예술)이 출현하게 된다’라고 Hegel의 미학에서는 ‘이념의 반사에 있어서 반사보다도 이념, 더구나 이념의 내용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이 도덕적인 것으로 되게 된다. 따라서 ‘절대예술’의 미적, 문화적 가치가 윤리적 가치로 환원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덧붙여 언급한다면, Hegel은 사상이라는 것을 자연적인 사물의 예술적(人工的(인공적))인 미화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現實自體(현실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現實自體(현실자체)는 일상적인 생활상태보다도 훨씬 더 진실하고 심오하게 파악된 현실 즉 힘과 자유가 담뿍 들어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것을 ‘天界(천계)’의 생존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현실과 이상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이 현실화되는 곳에서 참으로 ‘현실적인 것’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은 현실을 이상의 현실로 보는 Hegel의 형이상학적 현실 개념에만 타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Hegel에 있어서 현실과 이상의 실현에는 ‘同語反覆(동어반복)’적인 의미가 있다.
  내용성 때문에 미학적 형식의 범주들은 사회적 본질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내용성은 오직 형식을 통해서 내용은 感覺的 直觀(감각적 직관)으로 가공되어 나타나고 그럼으로써 본래적 의미에서 ‘우리들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형식은 비로써 미적인 것을 인식 수단으로서 가능하게 하며 형식은 내용의 전달 기능인 내용의 매개적 기능을 떠맡는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Hegel은 비록 내용이 원칙상 발생론적 선재성을 지니지만 내용과 형식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엔치클로페디’에서 그는 명백히 ‘內容(내용)은 本質的·自立的(본질적·자립적)인 것이며 이에 반해 형식은 非本質的(비본질적)이며 非自律的(비자율적)이다’라는 ‘반성적 오성’의 견해에 대립하여 내용은 형식의 내용으로의 전화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형식은 내용의 형식으로서의 전화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으로부터  그의 견해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 있듯이 Hegel은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의존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추구해 나갔던 것이다.


  (2) FRANCE 審美主義(심미주의)의 형식에 대하여

  Hegel의 시대나 審美主義時代(심미주의시대)는 19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까지를 말하는데, 특히 심미주의는 ‘세기말’이라는 시대상에 더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두 사상 모두 낭만주의를 비난하고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유사성을 찾을 수 있으며 그 형식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을 떠남’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심미주의의 떠남은 세기말과 그 당시 France의 시대상에 더하여 (보불전쟁의 패배와 파마 스캔들, 드래퓨즈 사건 등) 전시대에 치유하지 못한 퇴폐적 낭만주의의 병의 일부로서 매우 복잡하고 불길한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Baudelaire의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막연한 전율’ E.Renan의 ‘진리가 슬픈 것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혹은 A.Rimbaud의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마 두려운 것이리라’와 같이 매우 불길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Alfred Kerr의 이미 아홉 가지의 불가능이 있는 곳에서 열 번째의 불가능을 만드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것과 어울리어, Baudelaire는 급기야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만이 참여행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審美主義(심미주의)의 자기충족적인 사랑은 P.Valery의 ‘누가 자기자신이외의 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이들은 모두 ‘자기의 인생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자’한다는 Dietante로서, 예술을 위해 인생을 버릴 뿐만 아니라 예술 그 자체 속에서 인생의 正當化(정당화)를 찾는다. 이것이 바로 Hegel이 말하는 ‘對自的 存在(대자적 존재)’인 것이다. 심미주의의 떠남은 浪漫主義(낭만주의)에 있어서의 떠남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낭만주의에 있어서의 떠남은 ‘이국정취’ 혹은 ‘이국동경’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므로, 떠난다는 그 자체의 의미에서도 아니요 그렇다고 하여 보다 완전한 형식에로의 접근도 물론 아니다. 그저 막연한 유토피아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심미주의에 있어서의 떠남이라는 형식은 浪漫主義(낭만주의)의 그것과는 달리 매우 논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떠남’이라는 것은 Hegel에 있어서처럼 반드시 스스로 떠났던 자기 내부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성취하려는 목적과 의도에서나 모두 일치하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審美主義(심미주의)에 있어서도 ‘對自的 存在(대자적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即自-對自的 存在(즉자-대자적 존재)’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Hegel에 있어서는 ‘자기내 귀환’으로서 ‘絶對精神(절대정신)’ 혹은 ‘絶對藝術(절대예술)’을 획득하게 되는데 분명한 것은 심미주의에 있어서도 그러한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목적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공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심미주의에 있어서 그 두려움과 불길한 것으로 표현되었던 미래에 대한 감정을 Rimbaud는 ‘우리가 곧 그것을 알리라’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현실을 해결될 수도 종식될 수도 없는 수수께끼에 둘러 쌓여있는 것이지만 언젠가는 안주하여야 할 장소인 것이다. 그 실현성에 대해서는 불투명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더 큰 가치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불태우며 의지로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형식성은 거의 환상에 가깝다. ‘사랑하는 것을 버림으로써만 사랑을 재창조 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들의 형식성이 얼마나 인공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시대는 지나 갔어 섬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산과 들과 하늘의 소름끼치는 단조성에 끝내 참을 수 없어졌단 말이야 라고 중얼거리는 Des Esseintes의 독백에서도 인생이라구?
  그건 하인들이 우리 대신 사는 거야’라는 Axel의 확신에서 찬 어조에서도 어떤 당당한 ‘환의를 인식으로 변모’시키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審美主義(심미주의)에 있어서의 現實感覺(현실감각)이란 다분히 이중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예술이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대용 만족으로서의 예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시대 浪漫主義(낭만주의)의 ‘厭世感(염세감)’의 새로운 표현인 印象主義(인상주의)의 ‘卷怠(권태)’에 대한 대용 만족을 뜻한다. 이를테면 예술을 통해 얻어지는 만족은 ‘보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심미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 現實(현실)은 ‘잃어버려지는 現實(현실)’이니까 ‘잃어버리는 現實(현실)’이 아니라는 데서 ‘인생의 정당화’를 찾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審美主義(심미주의)도 형식의 아름다움이란 관심을 유인하기 위한 프레미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은 또한 헤겔에 있어서의 형식이라는 것도 결국에 있어서는 진정한 ‘學(학)’으로 존재하기 위한 일종의 논리적구조로서의 타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포석이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형식이라면 고작해야 ‘前戱行爲(전희행위)’에 해당하는 유혹이라는 점에서 헤겔과 審美主義(심미주의)의 형식은 매우 위태로와 보이기는 하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형식이란 완전한 그릇속에 ‘學門(학문)의 질서’와 ‘人生(인생)’을 담기위해 비록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자신만의 형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들이 때로는 (審美主義(심미주의)에 있어서) 惡(악)에서 美(미)를 추구하고, 醜(추)에 대하여서나 환상에 대하여 다소 병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Lipps의 표현대로 感情移入(감정이입)이 있는 한 ‘형식은 아름답다’라는 말로서 옹호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審美主義(심미주의)에 있어서 어떻게 ‘形而上學的 意味(형이상학적 의미)’가 승인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부분이 바로 Hegel 미학에서 내세우고 있는 ‘觀念論的(관념론적)-形而上學的 美學(형이상학적 미학)’과 어울린다고 하겠다.
  審美主義(심미주의)에 있어서 形而上學的 意味(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는 부분은 아마도 ‘人工的 生活(인공적 생활)’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人工的 生活(인공적 생활)은 곧 ‘人工樂園(인공낙원)’을 말하는 것이므로 人工樂園(인공낙원)이란 그들에게 있어서 유토피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이 창조해낸 人工樂園(인공낙원)의 주민들(Des Esseintes, Dorian Gray, Axel 등)은 이 지상의 삶에 얽매어 있는 동시에 그에 대한 불만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지상적인 관심과 야심을 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彼岸的·形而上學的(피안적·형이상학적) 향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單調性(단조성)이란 뿌리 뽑을 수 없는 동물적인 속성과 같이 가장 기초적인 본능과 같은 것이어서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는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만 좋아한다는 입장에 서서 ‘사랑하는 것을 버림으로서만 사랑을 재창조 할 수 있다’라는 선언에 이르는데, Baudelaire에 있어서 ‘여자는 자연이다. 즉 혐오스러운 것이다’라는 말처럼 여자가 자연과 본능적 생물인 한에서는 그것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單調性(단조성)에 대한 그들의 卷怠(권태)는 극에 달하여 자연을 직접적으로, 보다 열등한 것이라는 신념만큼 자연에 대한 심한 혐오감과 인공성 숭배의 열렬성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은 없다. 惡은 노력 없이, 즉 자연적으로 생기는 반면에, 善은 가공된 것-언제나 의도나 목표의 산물이며 따라서 人工的(인공적)-非自然的(비자연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형식이 없는 자연은 미적인 자극력을 주지 못하므로 그 결과 자유스러움이라는 이상이 인공성이라는 이상에 길을 양보한다. 이것은 곧 浪漫主義(낭만주의)에 대한 印象主義(인상주의)의 勝利(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대도시의 생활, 그 쾌락과 惡德(악덕), 인공적인 삶과 ‘人工樂園(인공낙원)’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로서 이성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로서 이성에 따른 ‘自由意志(자유의지)’로써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체험을 가장 강력하게 실감하는 것은 현실 가운데 인간과 사물이 마주칠 때가 아니고 우리가 ‘시간을 되찾을 때’, 이미 우리 삶의 행위자가 아니고 관찰자일 때, 예술작품을 창조하거나 감상할 때, 즉 우리가 기억을 할 때라는 것이다. 이제 審美主義者(심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술은 Platon이 예술의 능력 밖이라고 규정했던 ‘이데아(Idea)를, 다시 말해서 존재의 本質的(본질적) 形態(형태)에 대한 올바른 기억을 소유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審美主義(심미주의)는 비로써 ‘形而上學的 依微(형이상학적 의미)’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人生(인생)의 正當化(정당화)’를 찾는다는 것이다. Hegel에 있어서의 ‘即自-對自的 存在(즉자-대자적 존재)가 되는 것이요, ‘絶對精神(절대정신)’에 해당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3. 결론

  Hegel은 예술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일종의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자율적 문화활동으로 인식하였으며, 그 독자적 의의를 강조함에 따라 현실생활에 봉사하는 기술과는 전혀 다른 개별의 원리에 입각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마침내 기술일반과 구별하기에 이름으로써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美學講義(미학강의)’에서 표현한 것처럼, Hegel은 예술사의 철학적인 기초를 처음으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Hegel의 미학이 본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심미주의와 많은 부분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E.Bloch의 표현대로 ‘Hegel 미학은 본질적으로 詩文學(시문학)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예술들에 동시에 적용된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심미주의를 이끌어 나간 것도 詩文學(시문학)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Hegel의 미학과 심미주의에 있어서 그 형식성을 비교하여 보았을 때 Hegel은 형식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이었던 Kant의 미학을 벗어남과 동시에 예술의 형식과 내용을 양분하는 미학이론이나 형식을 내용보다 우위에 두는 미학을 극복하려 하였다.
  이것은 바로 Hegel이 관념론을 지켜 나가면서 Kant와 Schelling을 극복하려 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심미주의에 있어서도, 형식과 내용의 통일을 위하여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형식조차도, 형식은 관심이 배제된 아름다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내용이 담긴 충족된 삶의 추구를 위한 예술이론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삶의 문제이며, 삶의 미로서 -삶이 審美(심미)로서의 ‘잃어버린 현실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으로, 美(미)는 그들의 삶의 문제이며 삶의 방식인 것이다.
  Hegel과 審美主義(심미주의)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의 통일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하고 큰 의의는 그 시대상에서 엿볼 수 있다. 심미주의가 세기말의 와중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그 돌파구로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같이 품고 선구자적 입장의 견지에서 새로운 미학을 전개했던 것처럼 Hegel의 미학에 있어서도 가장 큰 의의는 미학이라는 학문의 범주를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하여 史化(사화)시켰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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