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명으로 발전 못한 中國(중국) 신해혁명의 현대적 意義(의의)

  중국의 신해혁명은 수 천년 동안 계속된 전통적 군주체제를 물리치고 새로운 共和政體(공화정체)를 수립하였다는 점에서 가치와 의의가 있다. 혁명을 전후한 중국의 국내의 사정을 살펴보면 외국의 중압, 극단적 반제국주의운동, 내분에 의한 혼란, 경제적·문화적 조류의 교착상태 등으로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큰 혼란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혁명세력은 그 혼란 속에서 새로운 소생의 길을 찾으며 국민을 전통적 속박 속에서 구출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려는 욕구로 충만해 있었다. 결국 君主政體(군주정체)는 붕괴되었으나 혁명적 변화의 계속, 새로운 세력의 난무, 그리고 새로운 문제와 조건의 창출 등으로 연속되었다.
  辛亥革命(신해혁명)에 의해 淸朝(청조)를 타도하였으나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계속된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혁명을 일으킨 원인 國(국)의 지배적 民族勢力(민족세력)은 漢族(한족)이며 그들에 의해 전통적 유교 둔화를 계승해 왔다. 그러나 3백여 년 동안 북방을 지배한 滿洲族(만주족)에 의해 漢族(한족)이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 인구수로도 小數(소수)에 불과할 뿐 아니라 文化程度(문화정도)도 낮은 異民族(이민족)에게 지배를 당한다는 것이 漢族(한족)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기 때문에 漢族(한족)은 기도를 노렸으며 이것이 辛亥革命(신해혁명)을 위한 국민적 궐기의 동기가 되었다.

  물론 그밖에 여러 가지 동기가 있다.

  즉 淸朝(청조)말기의 정치적·사회적 부패현상이 노골화되어 국민생활을 극도로 어렵게 하였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외세의 중압이 계속 가속화하여 경제적인 착취, 국토의 분할, 국위의 손상 및 전통적 문화의 파멸 등이 속출하였다. 그와 같은 외세의 영향을 받은 지식계층의 자각에 따라 정치혁명이 불가능하면 사회혁명이라도 성취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提高(제고)되었고, 특히 정치적으로는 정치 체제의 개혁에 대한 이론이 분분하였다. 그와 같은 혼란 속에서 孫文(손문)을 중심한 혁신세력이 형성되었고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武昌(무창)에서 대대적인 혁명적 가치를 높이 들기 시작하였다.


  1985년 청·일전쟁의 패전, 1897년 강대국에 의한 중국영토의 할양, 1901년 단비란의 굴욕적 해결, 1904~5년 노일전쟁에 대한 소극적 중립주의 유지, 등으로 청조는 한족앞에 머리를 들 수 없게 되었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인의 민족주의는 급진적으로 제고되었고 그것을 기회로 달변가이며 정력가인 손문은 국민앞에 중국혁명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손문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기회 있을 때 마다 각 지역에서 봉기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기 때문에 신변보호를 위해 해외 망명하여 그 곳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특히 華僑(화교)를 대상으로 한 민족주의 사상의 제고, 淸朝(청조) 타도의 필요성 강조 등을 역설하였던 것인데, 그 중에서 많은 인재들이 동참하여 자금을 제공하며 격려하였다. 결국 孫文(손문)은 1911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혁명동참자들을 전국에 파견하고 중요지역에는 전략적으로 가장 능숙한 인재들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혁명사상은 급속하게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그들은 같은 해 말기에 무장봉기를 하기 위해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운명의 신은 그들에게 행복한 기회를 제공하는데 인색하였다.

  1911年(년) 10月(월) 6日(일) 湖北省 武昌(호북성 무창)에 있었던 혁명본부에 뜻하지 않은 폭탄이 폭발하였기 때문이다.

  이 事件(사건)으로 인하여 혁명주의자들은 준비가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소극적인 체포와 처벌을 하고 있던 淸朝(청조)에 대하여 그들은 보다 단호하게 도전하였으며 공개적인 봉기로 일관하였다. 즉 대담한 행동으로 淸朝守備隊(청조수비대)의 허점을 공격하였으며 교묘하고도 신속한 작전으로 武昌(무창), 漢口(한구) 및 漢陽(한양) 등 3개의 중요도시를 점령하였다. 그와 같은 勝戰(승전)의 報道(보도)가 전국에 파급됨에 따라 大都市(대도시)와 各省(각성)에서는 淸朝(청조)에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武昌(무창)에서의 우발적인 봉기세력은 1개월이 채 못 되어 楊子江以北(양자강이북)의 各省(각성)을 지배하게 되었다.

  難局(난국)에 직면한 北京(북경)의 淸朝(청조)는 이미 해임된 상태에 있었던 袁世凱(원세개)를 불러들여 혁명국에 대한 討伐軍(토벌군)을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袁世凱(원세개)는 淸朝의 명령을 받아 그의 독특한 군사작전에 의해 한때 혁명군을 진압하는 듯하였으나 淸朝(청조)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武力(무력)에 의한 진압이 아무 이익도 없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유혈현상을 일으키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혁명파 지도자와 淸朝(청조)를 代表(대표)하는 袁世凱(원세개)와의 교섭이 진행되었다. 그 교섭기간 중 혁명지도자들은 동년 12월 18일 상해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袁世凱(원세개)의 立憲君主制 思想(입헌군주제 사상)을 반대하고 淸朝(청조)만이 아니라 어떤 君主制(군주제)도 타도할 것을 결의하고 그것을 전국에 선포하였다.

  그 결의에 따라 16個省(개성)의 공화제 대표자들은 때마침 해외에서 귀국한 孫文(손문)을 中華民國(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大統領(대통령)으로 선출된 孫文(손문)은 1912년 1월 1일 취임과 동시에 임시정부를 南京(남경)에서 수립하였다.

  다른 한편 淸朝(청조)의 宣統帝(선통제)는 계속 君主(군주)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912년 2월 12일 공화제파와 이와 상반되는 입헌 군주제파간의 교섭이 성립됨에 따라 공화제 정부로부터 다액의 연금을 그 가족들에게 지불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황제의 지위에서 퇴위하였다. 결국 이것은 淸朝(청조)의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으며 辛亥革命(신해혁명)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양파간의 교섭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나 어쨌든 3일 뒤에 孫文(손문)은 大統領(대통령)의 지위를 사임하였고 그 후임으로 袁世凱(원세개)가 옹립되었다. 결과적으로 辛亥革命(신해혁명)은 淸朝(청조)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군주제의 유지를 근본적으로 부인하였으며 공화체제를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革命(혁명)이란 종래의 피지배계급이 기존적 지배계급의 권력을 타도할 뿐 아니라 그 國家權力(국가권력)을 탈취, 장악하고 자체적 계급이익의 달성을 유효하게 추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기존의 국가권력기관이나 국가기구를 재편성하고 舊(구)지배계급이나 그 지배세력의 반항을 통제하여 再起(재기)의 기회를 근절시킨다.

  특히 사회의 경제조직이나 일반적 諸(제)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 또는 재조정할 뿐아니라 기존의 국민의식과 사상을 변혁 혹은 재조직하는데 역점을 둔다. 이것을 광의적 시각에서 분석하면 사회혁명이기도 하다.
  辛亥革命(신해혁명)은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일종의 정치혁명일 뿐 사회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는 약점이 있다. 辛亥革命(신해혁명)의 가장 중요한 표어는 漢族(한족)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제고였다. 그들이 주장한 민족주의는 세 방향에서 분석 고찰할 수 있다.

  첫째, 만주족이 장악하였던 군주권의 타도와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사조를 타도하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혁명정부는 唐(당)나라 때부터 明朝(명조)에 이르기까지 찬란하게 빛났던 문화적 정통성을 회복할 뿐 아니라 강대국들에게 빼앗긴 많은 영토들을 회복하는데 큰 목표를 두었다. 이것은 일종의 쇄국주의적 배타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 당시의 많은 열강제국으로부터 간섭을 받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실 당시의 열강국인 러시아·영국 및 불란서로부터 강한 간섭을 받아 혁명정부의 활로가 크게 제지당한 바 있다.

  둘째, 辛亥革命(신해혁명) 지도자들은 강력한 민족주의에 의해 방대한 권력을 장악한 중앙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제국주의자들의 침해를 방지할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혁신책을 강구하였다.

  만일 그들이 정치혁명을 완성한 뒤 점차적으로 사회혁명과 문화혁명을 추진하였더라면 비교적 안전하게 혁명적 과제를 해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과격한 방법에 따라 모든 방면에 혁신을 강요하였으며, 그 자체를 가속적으로 추진하였던 관계로 모든 분야에서의 새로운 반발을 일으키게 하였다.

  中國(중국)은 영토가 방대하며 전통적인 특히 儒敎文化(유교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인간대인간의 상호관계를 중요시하는 의식적 정의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혁명주의자들은 서구적 관점에서의 혁명논리를 받아들였을 뿐 自國(자국)의 전통적 문화성을 소홀히 하였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결국 하나의 혁명논리가 어느 나라에서나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국의 역사성, 윤리 도덕성 및 전통적 가치관 등을 이해한 상태에서 혁명논리가 형성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中國(중국)의 辛亥革命(신해혁명)은 결코 불란서의 市民革命(시민혁명)이나 아시아의 共産革命(공산혁명)의 모형을 본받을 수 없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셋째, 革命(혁명)은 기존적 사회구조의 근본적 變革(변혁)이며, 사회변화에 의해 요청되는 변혁 중 가장 근본적 또는 전체적 유형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일 뿐 아니라 社會(사회)나 國家(국가)에 대한 근본적 변혁이다. 또한 새로운 진보적인 사회질서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정치체제의 변혁을 가져왔을 뿐 社會(사회)변혁에 무성의하였다. 즉 국민적 혁명이나 사회혁명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혁명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정치세력간의 갈등, 대립 및 충돌이 있었을 뿐 새로운 진보적 사회질서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 있었겠으나 무엇보다도 혁명주도세력들이 청조의 타도라는 한정된 혁명목표에 치우쳤으며, 국민은 그 목표만을 위해 선동하였기 때문이다. 보다 적극적인 국민적 사회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지지하에 혁명과정이 전개되었다면 더욱 큰 성공과 빠른 성공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국민의 눈이 무서워 혁명세력내부의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신해혁명으로 본래의 목표인 淸朝打倒(청조타도)를 성공시켰으나 그것에 따르는 손해도 많았다. 특히 各省(각성)에 도사리고 있었던 군벌세력이 亂舞(난무)하였으며 그 군벌세력간의 충돌과 협상으로 일관하였다. 물론 중국의 방대한 지역이란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의 장기화가 불가피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였고 국민형성이 불가능하였다. 결국 혁명이 아니라 일종의 ‘쿠데타’의 성질로 변질되었으며 그러한 誤認(오인)도 많았다.

  국내에서 정치투쟁이 계속되게 작용하였으며 특히 청조의 조공국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본래 몽고나 新彊(신강)등은 중국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오랫동안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겨온 나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辛亥革命(신해혁명)으로 中國改體(중국개체)가 약화되었음을 認知(인지)하고 곧 독립을 선언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결탁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신해혁명이 가속적인 차원에서 성공하였더라면 그와 같은 국위손상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며 强大國(강대국)이나 朝貢國(조공국) 등이 革命(혁명)의 성공을 축하하는 절차를 취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차원에서 볼 때 革命(혁명)이란 國民形成(국민형성)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쿠데타’적 성격은 실패하거나 아니면 성공의 과정이 長期化(장기화)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辛亥革命(신해혁명)의 敎訓(교훈)을 거울삼아 앞으로 革命(혁명)을 試圖(시도)하는 國家(국가)나 社會(사회)는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보다 歷史意識(역사의식)과 國民意識(국민의식)을 전제로 政治運動(정치운동)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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