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2019.10.15 19:10

동대신문

상단여백
HOME 문화 엔터테인먼트
[꽁뜨] 우리들의 戰場(전장)뒤에서는 ‘적 출현!’ 하는 악에 바친 목소리와 ‘원위치이’의 느긋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 權一榮(권일영) <경상대 전산과>
  • 승인 1979.10.23
  • 호수 751
  • 댓글 0

  언덕을 넘어서자 우리분대는 적의 시야에 드러나지 않도록 낮은 포복으로 고지를 향해 접근해 갔다. 완전군장을 갖추지 않은 지라 몸은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M1소총의 무게가 새삼스러웠다.
  언덕을 넘어서며 이어지는 평지에는 그물모양의 철조망 방해물이 가로로 길게 널려져 있었고, 그 놈은 우리 분대가 적의 점령지역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킬만 했다. 분대장의 명령으로 우리는 철조망을 통과하기 위해 ‘엎드려 쏴’자세를 취했다.
  손톱만한 돌멩이들이 우리의 팔꿈치를 날카롭게 찔러왔으며 무르익어가는 가을의 아침답게 땅에서 치밀어, 오르는 차가운 기운이 우리를 밀쳐내려는 것 같았다. 돌멩이와 한기. 온몸을 던져 우리가 포옹한 이 땅이 우리를 이렇게 맞아들이며 다시 한번 경각심을 일깨웠다.
  우리는 이 철조망을 밑으로 통과할 수밖에 없다. 오늘 아침 우리 9중대 중대장의 작전지시에 의하면 우리분대는 현재 숱하게 많은 적과의 치열한 전투지역 속에 이번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인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투입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철조망을 위로 통과한다면 우리들의 가슴에는 시원하게 환기통이 마련될 것임은 물론이려니와 작전상 막대한 차질을 초래해 아군은 이번 전투에서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중대장의 협박스러운 주의사항을 듣지 않았더라도 철조망 밑으로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철조망에 부비츄랩이 설치되어 있으리라는 짐작을 해야 한다고 중대장이 말한 바도 있고,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안전하게 이 철조망을 우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로로 길게 널려 있는 철조망의 한쪽 끝은 절벽에 꼬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다른 한쪽은 저쪽 언덕 너머까지 흘러내려 10시30분까지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기 때문이다.
  온 몸으로 스며드는 땅의 한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뺨에선 땀이 흘렀다. 그물처럼 널려진 이 철조망을 옷깃 한번 스치지 않고 통과해야만 한다. 어디에선가 서치라이트 같은 눈을 번득이며 경계를 하고 있을 적의 시야에 드러나면 만사는 끝이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이 전쟁으로 인하여 비인간적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우리들의 멋진 명제는 만신창이가 되어 사정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목숨을 지속시키기 위해, 유지하기 위해 두 눈에 불을 켜고 적을, ‘이리의 탈을 쓴’ 내 민족을 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 중에는 차라리 이런 행위들이 눈물겨울 만큼 인간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질 녀석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지금은 단지 개펄 바위틈에 숨어 아무리 쑤셔대도 다리하나 떼어주고 나오지 않던 게 마냥 무엇을 주고라도 우리자신을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 하물며 그까짓 겉만 번지르르한 명제쯤이야 다리 하나는커녕 군화 한짝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분대장의 철조망통과지시가 내려지자 우리는 재빨리 몸을 뒤집었다. 그리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영자, 순자, 춘자의 알몸보다 더 소중히 다뤄야하는 우리의 생명 M1소총을 가슴께로 올려 잡았다. 그리곤 발뒤꿈치와 어깨죽지를 번갈아 움직여가며 철조망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얼마안가서 등에는 땀이 시내를 이뤘고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싸늘한 M1의 촉감으로 어깨에서는 경련이 일고 날카로운 철조망의 끝이 가을 하늘을 유린했다.
  전투기 한 대가 길다란 꼬리를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아마 잘은 보이지 않겠지만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면 색 바랜 국방색 작은개미들의 행진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건너 골짜기에선가 산새 한 마리가 철딱서니 없이 파란 하늘로 미끈하게 날아올라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철조망을 완전히 벗어난 우리는 다시 엎드려 쏴 자세를 취했다. 소나무숲 사이로 저절로 생긴듯한 길이 토막토막 끊어져있었다. 날개에 햇살을 꽂은 채 원을 그리며 날고 있던 새가 산등성이 너머로 꽂히듯 떨어졌다.
‘약진 앞으롯!’
  뒤통수를 두들기는 분대장의 목소리에 우리는 M1을 움켜쥐고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날쌘 동작으로 소나무 수풀사이를 돌진해 나갔다.
  출렁이는 수통, 발을 옮길적마다 덜컥거리는 철모. 나무들이 획획 스쳐 지나갔다. 작은 도토리 나뭇잎이 군화에 채어 튀어올랐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맵게 후려쳤다.
  바로 그 때
‘적 출현!’
  하는 단말마적인 분대장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흙이 둑처럼 쌓여있는 엄폐를 뒤로 몸을 던졌다. 그리곤 M1을 둑위에 내밀고 고지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가늠자 사이로 적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걸리기만 해 봐라. 사정  없이 갈겨버리리라. 아직도 중대장의 목소리가 메아리 치고 있었다. 방아쇠에 건 둘째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
  이때였다.
‘원위치이-’
  이 느지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작전 지시 중 문무대의 이 ‘대머리 고지’ 점령이 가장 어려운 코오스 중의 하나라는 듯이 중대장의 옆에 입을 굳게 다물고 서있던 경상도 출신의 조교였다.
  나는 무릎에 묻은 시뻘건 흙을 툴툴 털며 출발지점으로 몸을 돌렸다.
  건너편 골짜기에서 또 산 새 서너마리가 날아올랐고 나는 또 다른 국방색들의 꿈틀거림을 지나쳤다.
  그리고 뒤에서는 ‘적 출현!’ 하는 약에 받힌 목소리와 ‘원위치’의 느긋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權一榮(권일영) <경상대 전산과>  .

<저작권자 © 동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