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새벽.. 같은 문체속 따뜻한 공간

  문학의 언어가 사회적 언어와는 다른 기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은 굳이 로랑바르트의 말을 빌지 않아도 이제는 문학의 상식이 되어버린 이야기다. 문학은 신념의 체계, 지성이라는 인식의 체계를 뛰어 넘는 데에서부터 그 가능성이 찾아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문학의 가능성을 그 작품의 내용(메세지)보다는 문장(문체)에서 찾으려는 문학적 편견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문학작품을 향유하려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표현, 주체의 존재성만을 강조하는 단견적 결론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견해는 문학적 언어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명증하게 하는데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작품이든 소설은 이야기를 통해서 의미공간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작가의 의도적인 메시지 전달계획이 있든 혹은 없든간에 상관없이 독자는 일정하게 고정된 의미를 원한다. 일반 독자의 경우에는 감동적인 문학의 언어를 원하기 보다는 의미가 분명한 사회적 언어를 원한다. 그러나 저술자가 아닌 작가는 독자의 요구에 부흥할 수만은 없다.
  작가의 소명은 사회적 언어가 요구하는 고정된 의미로부터 일탈하는 새로운 문학언어 창출에 헌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의미 언어를 해체하고 새로운 문학의 언어를 창조하여야하는 소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달의 소설을 검토하는 자리에 앞서 굳이 이런 문학적 상식을 재론하는 것은 사회적 언어 차원에 머물러 있는 작품들이 현작단을 장악하고 있어 그 정체성을 우려하고 그것의 극복문제를 다루기 위함이다.
  정찬주의 ‘無門寺(무문사)에 가서’(현대문학 10월호)는 이런 점에서 이달에 주목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서사적 시간 구조로 볼 때, 수평구조는 나레이터인 ‘나’가 해운 스님을 찾아 무문사를 가서 만나는 서사로 되어있다. 그리고 수직 구조는 몇 개의 삽화를 통해 그 난리 (6·25)의 의미, 즉 살아 남기의 방식을 회상적처리로 구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사회적 시각으로 보게 되면 무문사 방문의 서사 구조는 6·25의 의미를 환기하기 보다는 수평구조로 만들어진 ‘나’와 혜운스님의 인연고리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소설 구조의 특별함이 우선 기존의 6·25소설에서부터 벗어나고 있어 주목된다.
  기존의 소설들에 있어서 구성의 제도적 장치는 메시지 전달에 원용되어 왔다. 의미를 실어 나르기 위한 트릭으로 차용해 왔다. 그러나 ‘無門寺(무문사)에 가서’의 수평의 서사구조는 수직으로 세워놓은 의미구조를 전언하기 위한 장치로 구조한 것으로 보아지지 않는다. 상황의 흐름에 따라, 혹은 서술의 흐름에 따른 의미 언어, 예컨대 해묵은 얼룩 같은 언어를 연결 고리로 해서 자연스럽게 회상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정찬주의 주목받은 소설 ‘夢外鳥(몽외조)’ ‘겨울남행’에서도 익히 시도된 구조이다.
  사회적 발언에 유혹된 독자에 있어서는 정찬주의 이런 소설 구조에는 회의를 가질 것이다. 소설은 메시지를 담는 그릇이어야한다고 믿는 독자에게는 정찬주의 이런 소설 구조는 신봉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이 소설은 삽화에 따라 몇 가지의 의미망으로 엮어져 있다. ①혜운스님 집안과의 관계를 말하는 난리 때 삽화에서는 군당 위원장을 지낸 그녀 할아버지와 난세를 카메레온처럼 대처하여 살아온 ‘나’의 아버지와의 대조를 통해서 사회에 대응하는 인간형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고 ②예비군 훈련장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메꽃에 돌을 던지는 예비군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그것의 무용성을 얘기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파행적 현상을 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위와 같은 사회적 언어를 애써 드러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정찬주의 이 소설의 ①의 삽화를 통해 혜운 스님과의 前代(전대)로부터 지속되어온 인연의 끈을 예시하는 한편, 이념을 초월한 생존의 중요성을 가볍게 그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②의 삽화를 통해서 여래와 십이지신상의 불교적 관계양식의 단면과 불성, 화해의 의미를 환기하기 위한 이야기로 유도한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수평 서사 구조인 혜운스님과의 상관물인 동자상 의미를 부상시키는 연결 삽화로 사용하기도 한다.
  ‘無門寺(무문사)에 가서’의 경우, 왜 쓰여졌는가? 주인공인 ‘나’가 왜 무문사를 찾아 갔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 소설은 우선 당혹해 할 것이다. 문제 해명적 답변을 명쾌하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이다. 비구니인 혜운스님과의 사랑이야기라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불교적 질료가 사용된 만큼의 불교문학적 소설이라 명쾌하게 규정할 수도 없는 이 소설의 묘사적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사회적 언어와 문학의 언어가 어떻게 다른가를 점검하게 하는 계기적인 작품으로 주목된다. 가을 새벽 같은 문체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한 의미 공간을 느끼게 하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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