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학생 및 학원문제라고 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진통을 몸으로 겪고 있다. 어찌 보면 학생 및 학원문제는 우리의 사회·정치문제가 집중적으로 표출되는 단면이기도 하다. 이 부분만을 떼어놓고 문제로 삼으면 그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하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들 알고 있다. 더구나 지금의 학생 및 학원문제는 이데올로기·이념문제라고 하는 것으로 집약되어서 아주 심각한 정치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학생운동이라고 하면 3·1독립운동 이래 광주학생 사건이란 항일 민족운동을 거쳐 건국 후에는 4·19혁명이라고 하는 맥을 이어온 진단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학생 운동의 전개는 5·16군사정변이후 한일굴욕 외교 반대투쟁을 거쳐 60년대 후반의 민주·민권운동으로 기존 정권과의 대결이 격화되면서 72년 이른바 ‘유신’정변이후에는 무수한 희생자들을 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중국의 胡適(호적)은 5·4운동을 기념하는 글에서 학생운동은 기성지도층 또는 기성세대가 중대한 민족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에 그 괴리를 돌파하는 역할을 한 것을 들고 있다. 사실 독일이나 중국의 학생운동, 또 우리의 학생운동에서 그러한 점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우리의 경우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실마리를 풀어가야 하는가 하는 점은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할 일이다. 요즘 뜨거운 정치 쟁점이 되는 학원내 대자보의 좌경용공성을 걱정하는 사람은 학생사회의 용공성향의 만연을 걱정하고, 한편에서는 반대로 학생들의 문제 제기에 대한 일을 긍정적인 평가하기에 이르기까지 보는 시각이 논자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 아주 다르다.
  나는 여기서 이데올로기문제라고 하는 점을 두고 몇 가지 문제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앞서의 胡適(호적)은 ‘思想(사상)이란 見地(견지)·誠力(성력) 및 理想(이상)이 3자의 총칭’이라 말한 것을 생각해본다. 사상 또는 이데올로기란 것에 대한 추상적 정의보다 실감있게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見地(견지)는 어떠한 입장에 서는가하는 것이고 誠力(성력)은 사회 정치적인식의 정확도나 깊이를 말하는 것이며 理想(이상)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하는 가치의 문제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사상·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볼 때 우리가 사상·이데올로기를 따지는 것은 자기가 처한 現實(현실)과 認識(인식)과 그 개선 또는 개혁을 위한 어떤 이론을 추구하는 것에서 思想(사상)문제가 제기된다. 어느 사상체계이고 특정시대, 특정사회에 대한 문제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歷史性(역사성)에서 따져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가 6·25 전쟁을 겪고 아직도 남북사이의 갈등과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있다. 그러한 현실을 두고 體制(체제)방위라고 하는 관점에서 ‘反共敎育(반공교육)’ 또는 이념교육은 끊이지 않고 해오고 있다. 그런데 지금 중등교육에서까지도 학생들은 ‘이념교육은 재미가 없다’고 하는 여론이 나오고 있고, 대학에서의 이념교육은 特定政權(특정정권)에 대한 비호가 아닌가 하는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된 누명을 아직도 벗지 못했고 또 지도층이나 교원이 학생의 인식이나 관심을 따라가는데 미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먼저 이념교육이나 ‘安保(안보)문제’가 특정 정치인의 편의대로 악용되었다고 하는 점이 있다. 이에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일은 70년대 전후의 상황 변화에 대해 기성 지도층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본다.
  72년이란 해만 보아도 7·4남북공동성명이 불쑥 나온다. 당시로선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서민일부는 남북이 곧 통일이 되는가하고, 환상을 품기도 했고 기존 가치체계로서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많은 사람이 당황하게 된다. 더욱이 닉슨의 북경방문과 다나까의 북경행은 미·소 양대국 중심의 냉전 이데올로기로 훈치되어 온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이해하기 어려운 당혹스러운 것이었고 또 이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도울만한 점보다 지식이 정치 인식의 바탕을 가지도록 준비되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한편, 4·19혁명이후 각성의 실마리가 풀린 민족자주의식은 내 나라, 내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분단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모색하게 했다.
  이에 대해 후진국문제나 사회 부조리의 척결문제 등을 논구하는 학도는 종속이론이나 네오 마르크스주의나 해방신학에 눈을 돌리게도 된다. 특히 여기서 기성지도층의 상황인식의 빈곤은 종래의 도식적 이념교육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1950년대의 논리에 안주하였다. 그런데 또 여기서 중대한 변화를 지나치는 태만도 있었다. 전파미디어가 국경의 장벽을 허물고 정보교류의 국제화 시대를 열어놓았는데도 국경장벽에서 도서검열이 감지하지 못한 채 시간을 허송하였다. 금년 28회 사법시험 2차 국민윤리문제의 하나를 보면 현대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변질을 논하라고 하는 것인데, 제3차시험 위원을 하면서 수험생에게 그 정답을 물으니, 티토주의·모택동주의나 체코의 개혁이나 유도 콤뮤니즘이 아니라 네오 마르크스주의·종속이론 및 해방신학이 정답이라고 한다.
  그것은 당국이 이미 거의 공식으로 위의 이론은 현대판 공산주의라고 규정한 것을 뜻한다. 그러면 종속이론이나 해방신학이 모두 공산주의라고 하는데 학자나 논자의 의견이 일치될 것이라고 할까?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여기서 학생들의 입장을 돌아볼 때 학생들이 현실개선이나 개혁에 대한 理想(이상)과 사명감을 지니고 知的(지적)인 모험과 호기심으로 문제가 되는 이론에 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상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현실 부정이 격렬해지기도 하고 모험으로서의 지식탐구이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고, 정열이 앞서기 때문에 주장의 급진성도 이해가 되고, 현실불만이 줄수록 그 주장의 원색적인 반발도 나타나는 것을 안다. 학생이 그간의 사정을 겪어 오고 보아오면서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知性(지성)의 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 분단과 통일의 문제, 권위주의체제의 민주화의 필요, 인권과 사회복지의 구현 및 민족의 긍지와 자주성의 확보, 민족적 동질성의 회복 등은 우리시대의 문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이라고 하는 땅에 발을 부치고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다.
  대학생은 학설의 자유가 있듯이 자주적인 지적 판단에 자유와 함께 책임을 지는 독립된 인격주체이며 이 사회에서 남보다 많은 혜택을 받으며 내일의 주인이 될 보배임을 스스로가 자부하며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말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만, 좀 더 자기를 바르게 아끼고 이 강토, 내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서로가 모자라고 잘못된 것이 있을지라도 최선을 다하면서 실제로 가능하며 해야 할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책임을 느껴 고뇌하는 지성인으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확인하며 우리 주변을 돌아볼 일은 우리의 통치양태가 조선조이래 정통유교의 완고한 고수속에서 정통에서 일탈하는 이단을 관용하지 못하고 정치투쟁이 정통시비란 모습으로 이어져왔고 日帝(일제)아래서는 思想(사상)의 탄압속에서 자유로운 思考(사고)를 억제당해 왔으며 해방후에도 分斷(분단)은 사상·이데올로기의 劃一化(획일화)속에서 다양한價値體系(가치체계)의 共存을 체험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것을 택한다고 할 때 정통의 이름을 띤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서로간의 밀폐된 장벽이 너무나 두렵고 그로 말미암은 知性(지성)의 왜소화와 자기 소모가 많았다 . 그러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볼진데 스스로가 바로 그벽을 허물고 독단의 밀폐된 우리 속에 갇히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지금 우리는 다들 알고 있듯이 아주 어려운 고비에 다다르고 있다. 그 일부가 사상,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너나 그가 어떻다는 비판과 함께 나와 너 및 그가 무엇으로부터 참으로 실마리를 풀어가는가 하는 점을 솔직하게 터놓고 따져야 할 시기인 것이다. 知性(지성)은 탐구이고 탐구는 검증이며, 검증을 통한 理性的(이성적) 批判(비판)이 知性(지성)의 참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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