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를 든 행렬이었다.
  모두가 예전의 국경(國境)을 넘어서 가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20세기 국경>이라고 쓰인 안내판을 행렬은 지나가고 있었다. ㅎ이 문득 가치를 찾는 일이 5세기 전의 국경을 걷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 까 생각했다. 걷는 일이 바벨탑을 쌓아가는 것만 같이 여겨졌다.
  그 순간 ㅍ도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이어 모두가 외로운 피로감에 휩싸였다.
  “우린 어딜 가는 거지?”
  까만 얼굴의 ㅍ이 말했다. 얼핏 ㅍ의 눈동자가 빛났다.
  “모르겠어”
  ㅎ이 풀이 죽어 동행에게 대답했다.
  “일을 하고 싶어”
  행렬 가운데 어느 누구가 나지막히 내뱉었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까마득한 의식의 실타래가 풀리듯 ㅎ은 덜컥 숨이 막혔다.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되도록이면 잊고 싶은 말이었다. 독재자의 야심을 무너뜨려 만든, 노동이 없는 낙원을 모두가 힘겹게 지켜나가고 있었다.
  아직 도시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말없이 걷고 있었다. 행렬은 황폐해진 풍경을 앞에 두고 묵화속의 사람처럼 뒷모습을 보였다. 곁에 ㅍ이 걷고 있어도 ㅎ은 여전히 지겨웠다. ㅍ이 퉁방울만한 눈을 또록또록 굴릴수록 ㅎ은 자신은 쓸쓸한 기분을 감추고 싶었다.
  “옛날이 그리워”
  ㅍ이 역시 어느 누구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ㅎ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동행이 하고자하는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인들이 노래하던 구름 위로 플루우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하얗던 구름이 잿빛으로 흐려졌다. 음침한 공장 구석에서 돌아가는 기계소리가 오염된 구름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따뜻한 마음을 갖을 수 없다면 차라리 무엇이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아웅다웅했던 예전의 배부른 노예상태가 ㅎ도 더 좋을 것 같았다. 모두가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ㅎ은 어쩔 수 없이, 사막에서 떠도는 애급을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폐허의 길 위에 악마의 손길 같은 햇빛만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두들 연구했다. 그리고 가치를 찾는 일만이 소중할 수 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할 일이 없었다. 일은 기계가 다 해주었다. 대부분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루소처럼 괴테처럼 걸어서 순례하는 것이 낭만이 있을 것이라는 어느 누구의 의견에 모두들 동조했다.
  개성(個性)을 죽여야 했다. 낙원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길은 감정(感情)을 억눌러 가장 이성적(理性的)으로 합일점(合一點)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월급쟁이였을 땐 휘파람이라도 부를 수 있었는데…”
  “조용히 해!”
  ㅍ의 말에 ㅎ은 마침내 화를 냈다. ㅍ은 반역을 꾀하고 있었다. 물론 엄벌을 당할 일이었다. 지팡이는 그들이 들고 다니는 유일한 짐이면서 순례길에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지팡이의 발명은 복잡한 일상용품에서 사람을 해방시켰다.
  기계문명의 꽃인 지팡이는 자신을 보호하거나 행렬을 지키는 무기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ㅎ은 지팡이로 ㅍ을 벌주는 것도 귀찮았다. 도리어 화를 낸 자신이 부끄러웠다.
  멀리 도시의 첨탑이 나타났다. 모두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ㅎ은 기묘한 자연경관과 많은 문화유적을 감상했다. 행렬의 수도 불었다. 그러나 검둥이 흰둥이 등 어떤 인종들로부터도 ㅎ은 소외 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연으로부터, 유적으로부터 소외되어 버렸다. 도시를 바라보는 ㅎ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도시는 일과를 마칠 때쯤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컴퓨터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처리했다. 사람들의 바램과 기분까지도 도시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주거와 본능적인 쾌락까지도 충족시켜 주었다. ㅎ은 지극히 짧은 순간의 사람을 생각했다. 웬지 미래가 가졌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타구니를 움켜쥐어도 잡히는 것이 없던 ㅎ이 미래와 잠자리에 들어서서는 풍선처럼 부풀었다. 여자는 거칠었다. 여자의 손톱이 목덜미를 파고들 땐 ㅎ은 숨이 막혔다. 하나를 느꼈다. 여자는 동이 틀 때까지 자기의 몸을 ㅎ에게 바짝 밀착시켰다. 그러면서도 미래에게는 소녀스러운 수줍음이 있었다. “이젠 정말 지겨워, 대체 이게 뭐야” ㅍ이 또 투덜거렸다. “옛날 그 사나운 마누라한테 바가지라도 긁히고 싶단 말이지?”
  “그게 더 좋겠어”
  ㅍ이이 얼싸하고 말을 받았다.
  “마누라에게 팔목 잡히고, 자식새끼한테 발목 잡히는게?
  ㅎ은 여전히 냉소적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것이 행복일 거야”
  ㅍ의 눈에서 곧 눈물이라고 쏟아 질 듯 떨림이 고조되었다.
  ㅎ은 다시 여자를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고 싶어요. 미래에게는 아직 얄팍한 모성애가 남아있었다. 병원에서나 할 일이었다. 컴퓨터는 아기를 건강하고 합리적으로 키웠다. 발정난 여자의 헛소리였다. 웃기는 소리마. ㅎ은 그런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입술을 조금 일그러뜨리며 여자를 적당히 비웃어 주었다. 아침이 되자 미래는 불꽃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밀폐된 방안의 붉은 조명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타오르는 아쉬움이었다. 도시에서 반대방향으로 제각기의 순례길로 돌아갈 때, ㅎ은 미래의 뒷모습을 보았다. 여자의 이야기를 쓸데없는 정욕 같은 걸로 몰아세울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ㅎ은 자신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기를 낳을 거예요”
  “새벽부터 재수 없게 굴지 마”
  언제나 미래의 목소리가 이명(耳鳴)으로 들려왔다. 그것은 ㅎ의 발걸음을 정신없이 흐트려 놓았다. 사물을 자세히 바라볼 수 없었다. 행렬 속에서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었고, 전혀 자유롭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ㅎ은 그동안 가졌던 자유가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절실하게 느꼈다. 그러면서 이명과 함께 다가오는 여자의 기억이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여자에게 연연해하는 일만큼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적어도 ㅎ자신은 그렇게 믿었다. 연모의 노래를 부르는 시인이 싫었고, 정욕으로 달아오른 속물들도 싫었다. 여자는 하나의 상품일 뿐이었다. 저마다 고급스러워지기 위해 치장하고, 머리로 사람을 재려고 했다. 처음에는 ㅎ도 여자의 젖가슴을 바라보며, 정욕에 오염되지 않은 여자의 당당함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에게도 가슴이 없었다. 그들은 가슴으로 말하는 걸 잊어버렸다. 다만 외모가 멀쩡한 사내와의 하룻밤을 꿈꾸는 상품이었다.
  “나는 오늘, 나와함께 자게 될 여자를 죽이고 말거야”
  ㅍ이 소리쳤다.
  ㅎ은 동행의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ㅍ이 싫었다. 외로움을 대변해 준답시고 뇌리를 산만하게 어지럽히는 ㅍ과 동행이라는 것이 괴롭기조차 했다. 그건 성격 탓이겠는데, 자신을 마구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면 잠시 감동적일 수 있고 자각(自覺)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면서도 그런 사람과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귀찮고 짜증났다.
  “분명히 해낼거야”
  ㅎ은 ㅍ의 말에서 전해오는 느낌에 몸서리쳤다. ㅍ은 자신이 뱉어낸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할 것이었다. 누구보다 의식이 깨어있으면서도 ㅍ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치 못했다. ㅎ은 ㅍ과 동행이 된 것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혁명을 하는 거야. 나는 나의 나라를, 여자를, 나만의 일을 갖고 싶어 난 오늘밤 나의 세계를 찾게 되는 거라구”
  “위선이야”
  “그래, 난 위선자다. 그러나 위선이 없는 놈은 사람도 아냐. ㅎ, 당신은 나보다 더 위선적이다”
  ㅎ은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는 정확히 ㅍ의 심장을 겨누워 찔렀다. 온힘을 다해.
  토론이나 언어의 유희가 배격되는 순례의 질서를 ㅍ은 깨뜨렸다. 동행간의 불문율을 어겼다.
  ㅎ은 망연히 서 있었다. 행렬이 ㅍ의 주검을 밟으며 묵묵히 도시를 향하고 있었다. 석양을 걷는 그들은 모두들 볼이 붉은 여자를 연상하며 하복부를 팽팽히 긴장시키는 위선자였다.
  그때 ㅎ은 미래가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순례하는 모습이 행렬의 끝어림에서 피어나는 걸 보았다. 이제 ㅎ은 자신의 가치를 바꾸었다. 순례의 목적을 달리 하였다. 길을 돌아섰다. 멀어지는 ㅎ은 여자와 아이의 환영을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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