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曾靜(증정)의 ‘大義覺迷錄(대의각미록)’ 頒行(반행) 경위를 중심으로

序言(서언)

  明末(명말), 淸初(청초)의 三大巨儒(삼대거유)였던 黃宗義(황종의), 顅炎武(간염무), 天夫之(천부지) 이래로 크고 작은 抗淸(항청)운동은 계속 그 세를 가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투쟁에너지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그 사회의 지식인이었던 만큼, 신흥淸朝(청조)는 반체제 漢族(한족) 사대부에 대한 思想統制(사상통제)를 통하여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그 주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 雍正帝代(옹정제대)의 曾靜(증정) 모반사건이다. 曾靜(증정)은 呂留良(여유량)이라는 明末(명말) 학자의 朱子華夷思想(주자화이사상)에 심취된 나머지 中華(중화)지상주의라는 중국의 전통사상에 의거하여 마침내 이민족의 지배체제에 대한 일종의 문화투쟁을 벌이게 된다.
  한편 이에 따른 雍正帝(옹정제)의 抗淸(항청)사상 통제방법도 다각적으로 그리고 다분히 정략적인 성격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雍正帝代(옹정제대)의 曾靜(증정)모반사건에서 발단되어 반체제사상에 對(대)한 옹정제의 반박과정에서 생겨난 大義覺迷錄(대의각미록)의 頒行(반행)경위를 살펴봄으로써 淸初(청초) 사상통제의 주요한 목적과 특징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曾靜(증정)사건의 경위와 反淸華夷思想(반청화이사상)

  曾靜(증정)사건의 발단은 雍正帝(옹정제) 6년(1728) 川陜總督(천합총독) 岳鍾琪(악종기)가 西安(서안)에서 上奏(상주)한 奏報(주보)에서 나타난다.
  그것을 缶鍾琪(부종기)가 廣東(광동)의 張悼(장도)(本名(본명)이 張熙(장희)로서 後(후)에 缶鍾琪(부종기)의 僞盟(위맹)에 속아 그의 스승 曾靜(증정)의 謀叛事實(모반사실)을 實吐(실토)한다.) 이라는 자에게 반란권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內容(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실지로 당시 缶(부)은 반란미수설이 湖廣(호광)일대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고, 數年來(수년내) 그의 반란가능성마저 있어서, 그를 攘夷反淸(양이반청)을 선동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曾靜(증정)사건은 바로 이러한 缶鍾琪(부종기)의 모반가능성과 함께, 역시 缶(부)의 호광일대의 省民(성민)들의 惒苦(화고)를 上奏(상주)한 사실에도 공감함으로써 그 직접적인 모반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曾靜(증정)은 康熙(강희) 18年生(년생)으로 湖南州(호남주) 永興縣人(영흥현인)이었다.
  독서인으로는 정도가 낮은 자이었으나 浦潭先生(포담선생)이라 불린 曾(증)은 楚邊山谷(초변산곡)에서는 그래도 명망이 있어 湖南(호남) 第一等(제일등), 詩禮大家(시예대가) 등의 이름이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曾靜(증정)에게 있어서 앞서 언급한 2가지의 직접동기 외에 모반사건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보다도 사상적인 면이었다. 그의 사상은 浙江名儒(절강명유) 呂留良(여유량)의 華夷論(화이론)에 입각한 反淸論(반청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曾(증)이 처음 呂(여)의 時文選評(시문선평)과 시고를 통하여서였다. 曾(증)은 그것을 읽고 呂(여)의 반청사상에 전폭적으로 공명하였다.
  이른바 중국의 전통적 대외관으로서의 화이사상은 자기를 세계의 중심인 中華(중화)라고 존대하고, 주위의 부족을 夷狄(이적)이라 하여 천대한 것인데, 이러한 사상이 신흥 청조의 統治體制(통치체제)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夷狄(이적)은 人(인)이 아니고 物(물)(禽獸(금수))이므로 物(물)과 人(인)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華夷論(화이론)의 地理的(지리적) 區分論(구분론)은 이미 朱子(주자)에서 淵源(연원)하지만, 贈(증)의 이같은 遺老的(유로적) 사고는 呂(여)에게서 강렬한 영향을 받아 華夷之分(화이지분)과 君臣(군신)관계가 서로 어긋날 경우에는 그 관계를 희생하여도 좋다는 논에서 그것이 夷狄(이적)과의 경우일 때는 마땅히 무시 부정해도 된다는 과격한 攘夷(양이)를 主張(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위와 같은 曾(증)의 華夷論(화이론)과 그에 근거한 淸朝否認(청조부인)내지 淸朝可滅論(청조가멸론)에 대한 雍正帝(옹정제)의 대책은 어떠하였는가.


華夷論(화이론)에 대한 反論(반론)

  雍正帝(옹정제)는 처음 文字獄下(문자옥하)에서 일어난 이러한 사건을 단순히 정치적인 모반으로서가 아니라 思想的(사상적)인 面(면)에서 公開的(공개적)으로 다루어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그쳤는데, 張熙(장희)가 갖고 있던 것과 缶鍾琪(부종기)가 進呈(진정)한 몇 가지 문서내용 중에는 반청사상만이 아니라 雍正帝(옹정제) 個人(개인)에 대한 악평이 민간에 널리 유포된 사실을 알고, 이에 대한 변명의 필요를 느끼면서부터 曾(증)의 사건을 공개적으로 다루게 된 것이다.
  華夷論(화이론)에 대한 雍正帝(옹정제)의 반론은 우선 華夷(화이)의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즉 華(화)와 夷(이)의 구분은 지리적 요인보다는 문화(仁(인), 義(의), 德(덕), 五倫(오륜))의 유무에 있다고 하였다. 비록 所生之地(소생지지)가 변방이라 할지라도 문화만 갖추어져 있으면 구태여 華夷(화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蒙古(몽고)(元(원))까지도 문화가 있으므로 夷(이)가 아니라고 함으로써 漢人(한인)의 華夷論(화이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또한 呂留良(여유량)등이 夷狄(이적)을 禽獸(금수)로 비한데 대해서는 인간과 금수의 차이는 윤리의 유무로써 표상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역시 지금의 몽고도 ‘尊君親上愼守法度(존군친상신수법도)’하므로 夷(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옹정제는 군신관계를 유교의 기본덕목의 五倫(오륜)중 최고의 것으로 강조함으로써 華夷(화이)구분의 기준인 문화의 주내용을 주로 군신관계로 규정해 버렸다.
  그는 이 君臣之義(군신지의)의 막중함을 孔子(공자)의 ‘夷狄之有君(이적지유군) 下如諸夏之亡也(하여제하지망야)’라는 문구로 예를 들면서 ‘夷狄(이적)이라도 有君(유군)이면 華夏(화하)보다 낫다’라고 해석하므로써 그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曾靜(증정)이 맹자에서 인용한 ‘無父無君(무부무군) 是禽獸也(시금수야)’라는 말 역시 위의 논리에 의거 君王(군왕) (淸朝(청조))이 존재함에도 그것은 부인함이 바로 無君(무군)의 禽獸(금수)가 아니냐고 그 모순을 말하였다.
  이리하여 옹정제는 충의(군신)사상으로서 華夷論(화이론)에 대항, 統一之盛世(통일지성세)인 청조에서는 華夷(화이)를 논할 의의가 소멸하였다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得國論(득국론) 및 封建論(봉건론)에 대한 반론

  이상에서 비록 淸朝强盛(청조강성)의 目誇(목과)로 인해 華夷論(화이론)이 설파되었다하더라도 淸得國(청득국)의 정당성이 밝혀지지 않는 한, 漢人(한인)에게 떳떳하게 복종을 요구할 수는 없다. 더욱이 呂(여), 曾華夷論(증화이론)의 중요한 지주의 하나가 淸朝得國(청조득국)부정론이고 보면, 청조君權(군권)의 정통성, 정상성의 論究(논구)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옹정제는 明(명)의 亡(망)은 流賊(유적)이라는 내부세에 의한 것이며, 淸(청)의 건국은 오히려 백성을 고통에서 구해 주었다는 재래의 논을 말하고, 동시에 淸(청)이 明(명)에게서 천하를 절취하지 않았다는 한 예로서 능력이 있으면서 淸太宗(청태종)이 京城(경성)근방까지 가서도 그냥 돌아온 사실을 들고 있다.
  따라서 淸(청)의 得國(득국)은 湯武(탕무)의 征誅(정주)보다 오히려 名正言順(명정언순)이라 강조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明裔(명예)에 대한 勳爵(훈작), 明帝陵(명제릉)에 대한 奉祀(봉사)등을 예로 들었다. 그러므로 明(명)을 위해준 淸(청)에 대하여 반역하는 것은 동시에 明(명)에 대한 반역이라는 비약된 논리로까지 전개된 것이다.
  이와 함께 항청운동의 또 한가지 표현은 淸(청)의 郡縣制(군현제)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유교체제인 봉건제의 논의 문제였다.
  중국의 역대 정치사상에 있어 봉건과 井田(정전)을 시행하자는 논의는 복고적인 의미로서보다는 대개 현실에 대한 개혁적 입장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淸代(청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봉건론은 君權(군권)의 一尊(일존)강화를 강조하는 옹정제로 볼 때 悖逆之說(패역지설)이고, 더구나 淸(청)의 제도가 군현제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淸朝(청조)를 부정하는 뜻으로 볼 수 있고, 郡縣(군현)을 私天下(사천하)한다고 할 경우, 그것이 夷狄(이적)이 中華(중화)를 사유한다는 反淸論(반청론)과 連繫(연계)될 때 더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雍正帝(옹정제)가 주목한 것은 봉건론에 관한 이론적인 면보다 봉건의 분권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즉 三藩(삼번)의 亂(난)에다 下僚(하료)의 권력비대가 封建論(봉건론)과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봉건론 반박은 절박한 감정적 문제가 큰 작용을 하였음을 알 수있다.


結語(결어)

  曾靜(증정)사건을 총괄하는 ‘大義覺迷錄(대의각미록)’은 그의 논점을 친히 반박하는 上諭(상유)를 중심으로 雍正帝(옹정제)의 寬仁(관인)에 歸服(귀복)한다는 曾靜(증정)의 歸仁說(귀인설)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曾靜(증정)이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다 하더라도, 승복당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그의 지식과 사상은 소박했다는 점에도 기인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옹정제가 그 사건을 단순한 정치적 사건으로보다는 그것을 역이용하여 反淸思想(반청사상)을 가진 자들에게 공연한 설복을 꾀하려던 동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정제의 전제군주로서의 성격과 淸朝(청조)의 華夷思想統制(화이사상통제)의 특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淸朝(청조)의 漢人(한인) 士大夫(사대부)에 대한 이론적 도전은 바로 자기합리화의 일환으로서 통치체제에 부분적인 안정에는 기여하였겠지만, 華夷思想(화이사상)의 근본적 토대가 문화의식과 결합된 일종의 뿌리깊은 종족적 감정에 근저한 것인 만큼, 그들의 합리성만으론 극복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曾靜(증정)의 ‘大義覺迷錄(대의각미록)’은 그의 전향의 기록이나, 화이론 극복의 의미로서보다, 사대부의 존립자체를 위협하는 이질적 세계의 도전에 대하여 그들 心中(심중)의 華夷思想(화이사상)이 더욱 강화되고, 그것이 현실적 군신관계의 배정하에서 전통질서의 옹호라는 실천적 의미를 가질 때 더 구체화된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도 인식되어야할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