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을 태운 열차가 움직이기 직전의 플랫홈은 호각소리들과 함께 스산하게 술렁이고 있다. 옆자리에 앉은 녀석의 애인인듯한 여자가 질퍽한 콧물과 함께 뺨 위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진구는 배웅 나온 친구들의 틈새와 키 너머로 부산하게 미경이의 모습을 찾았다. 종내 미경이는 나와 주지 않을 것인가 등굣길에서든, 도서관에서든, 휴게실에서든 만나기만 하면 쪼르르 달려와 귀여움을 떨곤 하던 그녀.
  흰 겨울 어느 날 포켓에 그의 손과 그녀의 손을 집어넣고 그렇게 걷다가 주머니의 입구가 좁은 탓으로 실밥이 떨어져 나가자 하얀 눈 위에서 우습다고 한참 깡총거리면서 꺄르륵거리다가 겨우 웃음을 멈춘 후에 핸드백 속에서 예쁜 색실들 중 한올을 뽑아 손을 호호 불면서 포켓을 깁는 모습을 보며 사랑하고 싶은 여자라는 감정을 느꼈지만 사랑한다는 소린 입에서만 맴돌 뿐이었었다.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미묘한 선상에서 그 겨울을 보냈고 봄이 되어도 그녀 쪽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조금의 표현도, 틈새도 발견하질 못했다.
  그녀가 입은 노란치마와 개나리의 꽃빛이 어우러져 그녀가 개나리인양, 개나리가 그녀인양 흔들리던 날 그는 불쑥 군에 입대한다는 소릴 꺼냈고 그녀에게 사랑의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자기는 누구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고 자기로서는 친구이상의 관계를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대답에 그는 누구에겐가 뺨을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고 그녀를 뒤에 둔 채 아무 말 한마디도 않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었다. 말은 안했지만 그녀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렇게 믿었었는데.
  열차가 덜커덩거리자 호각소리는 더욱 삑삑거렸고 사람들은 애절한 이별에 더욱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렸다. 열차 밖은 점점 북적거렸지만 열차 안은 서서히 냉랭한 공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열차는 서서히 미끌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오, 하느님. 미경이, 미경이가 저쪽 끝에서 발돋움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창밖으로 몸을 내어 손을 흔들었다. 미, 미경이 “야 새꺄, 몸 집어 넣어”하는 소리와 함께 군화가 엉덩이에 날아들었다. 열차안의 동료들이 부르는 군가소리가 귀에 쩌렁거렸지만 그는 미경이의 이름만 되뇌이고 있었다.
  재수가 없는지 좋은지 그는 하사에 차출되었다. 몇 번이나 편지를 했지만 신병훈련과 하사훈련을 마치고 나도 미경이에게선 답장이 오질 않았다.
  전방 어느 구석 독립된 포병중대에 배속된 이틀 후 “야, 미경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그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놀랐다. 여기에 나를, 나와 미경이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단말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중대본부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에서 병장 한 녀석이 세퍼드 비슷한 잡종 개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개 이름이 미경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병장이란 녀석이 미경이란 개를 군화로 걷어차기 시작하자 그 개는 깨갱거리면서 고통스러워했다. 미경이, 미경이를 순간 진구의 뇌리에서는 깡총거리던 미경이의 모습이 지나갔고 진구는 병장을 불렀다. “야, 그만 두지 못해” 그 소리에 병장은 고개를 홱 돌리곤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진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침을 퇘 뱉고는 사라져 버렸다. 진구는 그 개에게로 다가갔다. 개는 여전히 낑낑거리면서 진구를 피했다. 진구는 미경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잠시 고개를 돌리던 미경이는 다소곳이 목을 맡겨두고 순하게 진구를 대했다. 흐흐 네가 미경이란 말이냐.
  그날 밤, 낮의 그 병장 녀석이 진구를 불러내었다. 변소 뒤에서 두 명의 병장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그들을 확인하고 사태를 대충 짐작해내자마자 하복부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왔고 숨이 막혔다. 구부린 등위로 두세 번의 발길질이 오가고 난 연후에야 그는 한쪽 구석에 기대어 서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병장 녀석이 “이 신출내기 짜식이 영 겁이 없어” 하면서 발을 들어 가슴을 차려고 할 때 그는 몸을 홱 돌려 병장 녀석의 복부와 등줄기에다 연속동작으로 가격했다. 그 병장 녀석은 맥없이 나동그라졌고 나머지 두 명의 병장들이 동시에 덤벼 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에서는 별이 총총하였고 달이 3내무반의 막사위로 막 넘어가고 있다. 손으로 코 아래를 훔치니 피가 말라버린 듯 가루 같은 부스러기들이 떨어진다. 미경이는 하늘에서 개나리처럼 웃고 있었다. 으으, 미경이 진구는 입에서는 신음과 오열이 벅벅이 되어 흘러나왔다.
  다음날 진구는 중대본부 선임하사에게 불려갔다. “이 새끼들 말야. 모조리 영창 보내야지 안되겠어” 중대본부로 들어섰을 때 진구는 선임하사의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등짝을 볼 수 있었다. “너야?” “네” “넌 이 새끼야, 하사란 놈이 병(兵)들에게 첫날부터 그렇게 터져. 그따위 병들 하나 못 다루고 하산 어떻게 해쳐먹겠어, 이 새끼야. 고향어디야? “진줍니다” “진짜야? 논개치마폭에서 큰 놈이 그 따위야?” 그는 곧 누그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도 고향이 진주였다. 그래도 그는 계속 그놈들은 영창에 보내버리겠다고 씩씩거렸다. 진구는 모든 잘못은 자기에게 있으니 제발 참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렇게 그 일이 겨우 일단락되고 난 후 진구는 중대에서 의외로 쉽게 병들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고 선임하사와는 각별한 사이가 됨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미경이란 개와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미경이란 개도 진구만 보면 꼬리를 치면서 두 앞발을 들고 기어오르면서 좋아했다. 곧 중대원들은 미경이를 임하사(진구)의 애인이라 불렀다. 일조 점호때 전 중대원들이 정렬해 있으면 미경이는 그 대열사이로 돌아다니다가 진구의 옆에 와서 함께 서기도 하면서 재롱을 떨었다. 그럴 때 마다 간혹, 미경이는 이렇게 자기를 따르는데 개나리꽃 미경이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까하는 상념에 이르면 진구는 흔들리고 말았다.
  끝없는 결핍감의 빈자리에서 흔들림의 어지러움과 외로움과 그리움과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진 바닥에 넘어져 딩굴다가 비틀거리며 일어설 적마다 뼈속까지 저며드는 추움을 앓고 말았다.
  선임하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0월 마지막 주에 포상휴가를 받았다. 나오자마자 진구는 미경이에게 전화를 했다. 거절할 줄 알았던 그녀가 너무 쉽게도 만남을 승낙해 주었다.
  그녀는 싸늘한 날씨마냥 너무 무표정했다. 10여분을 함께 걷도록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솔가지에 앉았던 새한마리가 포르르 날아갈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드시죠?” “별로”… “많이 변했군” “뭐가요?” “너무 무거워졌어” “형이 군에 가고난 뒤부터 였어요” … “왜 답장 안했어?”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해서요” 둘은 또 침묵했다.
  침묵은 그들 사이에서 매우 두렵고 높은 벽이 돼주었다. 그벽을 사이에 두고 미경이와 진구는 서로 다르게 걷고 있었다. “미안해요”, 벽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러나 벽 저 쪽에서는 또 조용해졌다. “나 곧장 귀대하겠어” 그래도 벽 너머에서는 조용했다.
  진구는 그날로 부대로 돌아와 소주댓병 하나를 들고 선임하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선임하사는 대뜸 진구의 표정을 알 수가 있었고 아내에게 안주장만을 부탁했다.
  소주가 반 병 넘어 비워졌을 때 진구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야, 임하사 정신차려 육군하사란 놈이 그 따위 여자하나 때문에 찔찔 짜? 여자란 있다가 없을 수도 있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거야, 자 털어버려” “그런 말씀 마십소, 미경이는 있다가 없을 순 있지만 없다가 있을 순 없는 겁니다.”
  곧이어 주임하사가 전해주는 술잔에 미경이의 모습이, 개나리꽃이 화사하게 어른거리는 것을 보면서 진구는 모로 누웠다.
  부대에 돌아오니 하루 만에 돌아온 그를 모두 의아해 바라 볼 뿐이었고 반기는 건 미경이 뿐이었다. 미경이의 목덜미는 너무도 포근했고 미경이는 혀로 진구의 손을 핥아주었다. 진구는 시간을 거의 미경이와 함께 하게 되었으며 미경이도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면 으르렁거릴 정도로 진구만을 따르게 되었다.
  12월초, 첫눈에 이어 ‧‧‧‧ 사흘 내내 눈이 내리던 날에 미경이에게서 하얗게 꼿꼿한 편지가 왔다.
  “…이 군에 입대하기 전, 형이 절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은 후 나는 나를 내가 묻어 둔 기억 속에서 건져 올렸습니다. 제가 너무 철없는 여자였음을 저는 그때서야… 친구로서의 형을 막상 사랑이라는 곳에 대입시키기는 저로서는 너무 무리였습니다.… 제가 형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 없는 한 저의 편지는 형에게 무익하리라 믿었기에… 그 이후로도 형과의 사랑에 대해 계속 생각을 했으나 그 결론 또한 형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가 없었기에 미안했던 것입니다.… 이제 형은 저를 스치는 여자로 기억해주세요. 형은 미경이라는 여자를 쉽게 잊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진구는 편지를 구겨쥐고 미경이에게로 다가섰다. 영문을 모르는 미경이는 앞발을 들고 반겼으나 순간 진구는 미경이의 얼굴에 발길질을 가했고, 깨갱거리면서 물러서는 미경이를 진구는 보이는 대로 걷어찼다. 한참 깨갱거리던 미경이가 풀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부러진 것이었다. 헐떡거리면서 너무나 순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는 미경이의 눈엔 물빛이 어른거렸고 진구 또한 물빛을 흘리며 미경이의 부러진 다리를 부여안았다.
  미경이의 다리는 진구의 간절한 치료로 쉽게 아물었고 미경이는 언제 그랬느냐 쉽게 진구를 종전 이상으로 따랐다.
  연말이 되자 부대 안은 술렁거렸다. 그러나 모두 흰 눈 위로 세상을 지나가는 흰 달을 보며 한숨을 내쉴 뿐이지, 결코 즐거운 얼굴들일 수가 없었다. 진구는 잠시 막사를 나와 달을 맞이하고 섰다.
  그의 포켙에서 꼼지락거리던 손, 떨어진 포켙을 깁던 하얗게 작은 손, 하지만 미경이는 이런 흰 눈에서는 찾을 수없는 개나리꽃이었다. 누군가 진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임하사였다.
  “자네 아직 미경이 생각인가? 그만해 건 그렇고 내일 신정(新正)이기도하고 그러니 우리 집에 와. 내가 대접 하겠네”
  이미 선임하사의 집에는 손병장, 김하사, 전병장, 박하사, 곽하사가 와있었고 그들은 제법 거나해진 모양으로 진구를 맞았다. 보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슬픔 속으로 진구도 곧 스며들게 되었고 쇠고기 맛도 아니고 돼지고기 맛도 아닌 질긴 고기를 질근질근 씹으며 진구는 미경이의 생각을 씹었고 부모생각을 씹었다.
  밤새껏 그들은 그것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인 양 그리움과 외로움과 아픔을 마셨다. 그 술로 진구는 다음날 하루 종일 의무실에서 누워 있어야 했고 약 삼일 간을 오랜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처럼 무기력하게 지내야 했다. 그러던 그는 홀연히 한구석이 빈것 같은 공허감을 느꼈다. 미경이를 약 삼일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구석 저 구석을 뒤져도 미경이는 보이지 않았고, 진구는 자기내무반원들을 시켜 부대 안을 온통 뒤지게 해도 아무도 미경이를 보지 못했다. 그때 양 일병이 슬그머니 다가와 선임하사가 미경이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일러주었다.
  진구는 중대본부로 달려가 숨넘어가는 투로 물었다. “선임하사님, 미경이를 못 보셨습니까?” “미경이? 미경이는 그 신정 날 자네도 몇 그릇 먹었잖아? 그날 먹은 질긴 고기가 미경이었다니…. 그 자리에서 구토가 치미는 듯 했다.
  진구는 거의 이틀간을 밥을 먹지 못했고 그 사흘째 되던 날 미경이의 편지를 받았다. 약혼을 하게 되었노라고 이젠 정말 잊어 달라고,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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