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만 씁시다

  한글전용이냐 國漢文(국한문) 혼용이냐! 1945년 해방과 함께 논란의 대상으로 되어왔던 이 문제는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새로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세로체제로 만들던 전통적 일간지들도 차츰 가로체제로 바뀌고 있으며 몇몇 잡지는 한글전용화를 하고 있어 80년대는 한글전용이냐 국한문혼용이냐 하는 문제가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 것 우리가 쓰자는 측과 우리의 文化(문화)의 형성과정을 생각하며 지나치게 고집하지 말자는 측이 팽팽히 맞선 이 시점에서 本紙(본지)에서는 가로쓰기 문제와 함께 이 문제를 論(논)하고자한다.
<편집자 註(주)>


들어가는 말

  우리 겨레가 우리말을 적은 방법에는 대체로 다음 다섯 가지가 있다. ①중국말 식으로 바꾸어 한자로 적은 것 (한문), ②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어 적은 것 (향찰, 이두글), ③한자·한문에 한글을 섞어 쓴 것, ④한글에 한자를 섞어 쓴 것, ⑤한글로만 쓴 것.
  일반적으로 ③과 ④를 크게 묶어 ‘국한혼용’, ⑤를 ‘한글전용’(한글만 쓰기)이라고 한다. ‘한글만 쓰기’란 우리의 글자살이를 ③④와 같이 하지 말고 ⑤로 하자 (한자말도 한글로 쓰자)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위의 차례 벌임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글자살이는 ①→②→③→④→⑤의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긴 역사의 흐름은, 때에 따라 굽이치는 일이 있기도 하겠지만, 마침내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 때문에 누가 애써 부르짓지 않아도 한글만 쓰기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긴이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순조로운 흐름이 되도는 일 없이 우리의 모든 글자살이에서 한글만 쓰기가 더욱 빨리 이루어지길 바리기 때문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좀 더 뚜렷이 다짐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Ⅰ. 한글만 쓰기 어디까지 와 있는가?

  여러분은 아마 날마다 신문을 대하고, 한 주일에 한번쯤은 문학작품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길을 오가면서 길거리의 알림판들을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이에 나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1. 여러분이 늘 대하는 이들 글속에 한자가 몇 자나 있는가?

  8월25일자 조설일보와 경향신문의 제1면 머리기사 (본문)에 쓰인 한자는 둘을 합쳐 25군데 76자 (평균하면 38자) 이었다.
  같은 기준으로, 그 다음날짜 동아일보를 보면 어느 사람의 이름 3자가 1군데 쓰였을 뿐이며, 한국일보에는 아예 1자도 쓰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설이나 교양·여성잡지들에서는 한자를 찾아보기가 더욱 힘들다.
  중국음식점이 아닌 다음에야 거리의 알림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뿐만 아니다. 요즈음에는 깊이 있는 학술서적이나 논문도 100% 한글로 내는 일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나도 그렇게 했고 나의 얼안에는 그러한 분들이 많이 계시다.
  이처럼, 우리가 보아서 알고 있는바, 한글만 쓰기가 보편화되어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2. 이처럼 한글로만 적힌 글들에서 이겨내지 못할 불편을 겪고 있는가?

  신문이나 소설이 한글로만 적혔다고 해서 거기에 한자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976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일간 신문에 쓰인 어휘의 30%는 한자말이라고 한다. 그 한자말이 한자 아닌 한글로 적혔다고 해서 글 뜻을 몰라 신문을 내팽개치는 일이 있는가?
  한글로만 적혀 온, 친구의 편지를 받고, 그 편지의 내용을 몰라 약속을 어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며, ‘化粧室(화장실)’을 몰라 곤란을 겪은 일은 있을지라도 ‘화장실’을 몰라서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과서, 아동들이 즐겨 읽는 동화, 전기 들은 모두 한글이다. 그러나 한자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모르겠다고 하는 아니는 못 보았다. 그들은 한글로만 적힌 설명글을 보고도 모형 비행기니 장난감 기차니 예쁜 인형들을 척척 만들어낸다.
  그러한 것이 발전하여 인구 문제를 해결하고, 우주를 개발하고, 나라를 빛내는 힘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한자를 아무리 파보아야 거기에서 나올 것은 없다.
  ‘집 宇(우)’ ‘집 宙(주)’ ‘배 船(선)’이라고 아무리 외어 보았자 ‘우주선’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글자는 기호요 도구일 뿐이다. 그 자체가 지식이 아니오, 목적은 더구나 아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간혹 이런 불편을 겼었노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그렇게 써 놓은 사람의 잘못이다. ‘방화강조’라고 써서는 <불을 더욱 지르자>는 뜻으로 오해될 것 같으면 (실은 그렇게 생각할 멍청이도 없을 것이지만) ‘불조심(강조)’라고 썼어야 할 것이다.
  한글만 쓰기가 아무 불편이 없으며 우리에게 더 편리하다는 것은, 지금 이글과 이 이웃 어딘가에 있을 한자 섞인 글들과 비교하여 읽어보면 다시 한 번 깨닫게 될 것이다.


Ⅱ. 왜, 한글만 쓰기를 해야 하는가?

  사실 이 부분은 여러분에게 그렇게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지금 한글만 쓰기를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말이니 끝까지 가 보자. 읽어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1. 우리말의 올바른 앞날을 위하여

  글이 곧 말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말이 한자로부터 받은 영향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에 있다. 게다가 한자는 우리말의 밑바탕과 거리가 먼 글자이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지금 국어사전에 올려 있는 말 (올림말)의 50~70%가 한자말이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말의 숙명적인 설움과 고난의 역사가 숨어있다. 그만큼 우리말(토박이말)이 죽거나 밀려나거나 자라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기 3백72년(?)에 들어와 1천6백년 만에 한자는 국어사전 올림말의 50~70%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1천6백년 가운데 앞 1천년 동안은 우리 글자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자. 우리 글 한글이 만들어진 (1446년)뒤에도 한글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한자말은 자꾸 불어나 지금과 같은 꼴이 돼 버린 것이다.
  50~70% -이것을 들어 우리는 한자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짧은 생각이다. 이처럼 한자말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빨리 온 분야에서 한글만 쓰기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자말이 늘어나는 것을 점차 줄여 나갈 수가 있으며, 그와 함께 우리 토박이말은 완성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소리 같고 뜻 다른 한자말도 제각기 쉬 구별할 수 있는 말로 바뀌게 될 것이다. 공병(工兵(공병))―빈병(空甁(공병)), 공석(公席(공석)―빈자리(空席(공석)), 과실(果實(과실))―잘못·허물(過失(과실)).
  또 하나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옛날 ‘중국’을 받아들인 것에 못지않을 만큼 ‘일본’의 한자말을 들여와 쓰고 있는 사실이다. ‘追越(추월)’ ‘進陟(진척)’ ‘殘高(잔고)’ 등 많은 말이 이미 국어사전에 올랐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도 손 놓고 앉아만 있다면, 앞으로 1천6백년이 더 흐른 뒤에 국어사전의 올림말이 온통 한자로 뒤엎이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이제, 우리의 각오를 더욱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한자가 우리말에 입힌 해를 보기를 들어 살펴보자.

  【가】우리 토박이말을 죽여 없애고 그 자리를 차지한 보기 = ①되팥→決明茶(결명차), 소리마→菖蒲(창포), 두여맞→天南星(천남성). ②온→百(백), 즈믄→千(천), 골→萬(만), 잘→億(억). ③다삼어미→繼母(계모), 맏님→上典(상전), 보피랍다→放湯(방탕)하다. ④버들골→柳等(유등), 가래올→楸洞(추동), 된골→直洞(직동) ‘④는 올해 3월 15일, 건설부의 결정’.
  【나】토박이말을 다른 데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보기 = 나이―年歲(연세)·春秋(춘추), 아드님―令郎(영랑)·令息(영식), 큰아버지―伯父(백부), 이―齒牙(치아)….
  이 경우, 밀려난 토박이말은 대부분 낮은말이나 막 쓰는 말로 떨어져 버렸다. 우리 겨레의 스스로를 못났다고 생각하는 밑뿌리가 여기에 와 닿음을 볼 때 가슴이 터진다.
  【다】우리 토박이말의 생겨남을 방해한 일‥당장 눈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에 끼친 해로 말하면 (가)나 (나)의 경우 보다 이것이 더욱 클지 모른다. 한자는 토박이말의 창조력, 생산력을 거의 마비시켜 버렸다. 그래서 국어학자들 가운데에도 토박이말에는 말 만드는 힘이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부터라도 잘 가꾸어 나간다면 그 힘을 부쩍부쩍 늘려 갈 수 있다. ‘먹거리’ ‘섞어찌개’ ‘모듬회’ ‘따로국밥’ ‘접부채’ ‘손수 운전’등이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2. 글자살이의 속도화를 위하여

  현대는 속도의 시대이다. 속도를 이야기 할 때 한자는 가장 원시적이라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증명이 되고 있다.
  먼저 사람이 글자를 적는 것부터 생각해 보자. 한글은 평균 6.5획이면 한 글자(가령‘감’이면 6획이 된다.)가 되는데, 한자는 우리가 쓰는 이른바 상용한자만을 대상으로 해도 평균 13.5획이라고 한다. 2배의 노력과 시간이 든다는 셈이 나온다.
  인쇄면에서는 어떠한가? <우리의 소원>을 조판하는 방법은 다음 4가지가 된다.
  ①우리의 소원 ②우리의 所願 ③우리의 소원(所願) ④우리의 所願(소원)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번거롭겠는가.
  인쇄하는 데에는 활자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이 모아쓰기를 하는 경우 한글의 활자는 보통 2천~2천2백 개가 필요하다. 한글만 해도 이처럼 많은데, 여기에 한자 2천자를 섞어 쓴다고 하면 인쇄소는 4천개 이상의 활자가 나열되어 있어야 한다. 이 숫자는 한 홋수에 필요한 활자의 숫자이다.
  가령, 8호·9호·10호, 3종류의 활자만을 갖춘다고 해도 1만2천자 이상이 필요하게 된다.
  글자살이를 속도화하려면 기계의 힘을 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글자살이의 기계화, 여기에 이르면 한자로써는 두 손을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타자기가 글자살이에 얼마나 편리한가는 서양 사람들이 1714년에 그것을 개발하여 오늘날까지 쓰고 있는 것으로써 능히 알 수가 있다. 우선 치는 속도에 있어서 사람이 손으로 쓰는 것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2배는 빠르다. 그 밖의 잇점은 말하지 않겠다.
  우리 한글 타자기는 1914년에 처음 나왔다. 서양에 비하여 2백년이나 뒤졌으나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여 오늘날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로마자와는 달리 모아쓰기를 하는 지금, (글)자판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2벌식(낱글자 26개)에서 3벌식, 4벌식, 5벌식(낱글자 70개)까지 있다. 이를 연구, 통일하여 온전한 타자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벅찬 문제인데, 여기에다 한자까지 합해서 좋은 타자기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가 없다.
  지금 타자기의 글자쇠(키)는 44개, 그것도 많아서 줄이려는 판인데, 수천수만 자가 되는 한자를 다 수용하려면 타자기가 장롱보다 더 커야 할 것이니….
  세계는 지금 글자살이도 컴퓨터로 하고 있다. 우리 한글도 그 시대에 들었다. 텔레비전 방송에서 컴퓨터로 가족을 찾아 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여기에다 한자를 섞어서는 소도 중도 안 된다. 더구나 요즘 나돌고 있는 것과 같이 약자까지 겹치게 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령으로 빠지고 만다.
  우리에게 해만 입히는 글자, 우리 것도 아닌 본고장인 중국에서까지도 내던지려고 발버둥치는 쓰레기를 가지고, 왜,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다시 빠져들어야 하겠는가‧
  설령, 한자 타자기, 한자용 컴퓨터 장치가 개발된다 해도 그것이 몇 십 년, 몇 백 년 뒤가 될지 모른다. 몇 십, 몇 백 그 사이 다른 나라 글자 기계는 가만히 낮잠이나 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니, 한자 기계는 완성되는 그날로 고무단지가 되고 말 것이 뻔하다.
  우리는 바다 건너 섬사람들의 한자 기계 선전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저들과 우리는 글자살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저들은 이 땅을 그들의 소비시장―글자 기계, 글자 문화의 소비 시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한글만 쓰기를 가장 싫어한다.

  3. 글 읽기의 능률과 눈의 건강을 위하여

  그 밖에, 한자는 획이 복잡하기 때문에 눈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 한글에 한자가 섞이면 글 읽기가 더디다는 것 등의 실험보고를 소개하고 싶은데, 지면사정 때문에 줄이기로 한다.


  끝맺는 말

   누가 한자를 이 땅에 들여왔는가? 한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 한자말은 자꾸 생겨나고 토박이말은 자꾸 죽어만 갔는데, 이는 누구의 손에서 비롯된 것인가?
  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 한글을 뒷전으로 밀어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중국만 떠받들고 제 나라를 얕본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일본만 따라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모두 우리가 저지른 일이다. 까닭이야 어떠하든 우리 조상들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깨달아야 하며, ‘자기’를 되찾아야 한다. 없는 것을 찾자는 억지가 아니다. 한글이라는 훌륭한 보물이 있다. 이로써 겨레를 지키고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
  나아가는 길에 어려움도 따를 것이고, 훼방을 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어려움, 이 훼방 때문에 우리가 주저앉고 만다면 우리 겨레, 우리 문화는 영영 일어나기 힘들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한글 말고 세계에 자랑할 것이 몇이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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