克服(극복)의 대상으로서의 4․19

  인간의 자기실현 의지는 자신에 대한 思惟(사유), 즉 자기의식을 통하여 구체화되며 주체적 행위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자기의식은 無媒介的(무매개적)인 순수한 思惟(사유)만이 아닌 객관적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형성된다. 그러나 우리들 삶의 구체적․객관적 세계인 역사는 항상 변화한다. 그러한 변화는 역사를 이끌어가는 인간주체의 자기반성과 능동적 작위의 계속성 속에서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 近代史(근대사)에서 東學(동학), 3․1운동, 4․19로 이어지는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대응양식속에서 일관되는 이념은 半封建(반봉건), 反外勢(반외세) 자주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항상 내재돼있었다. 또한 外部(외부)로부터 주어진 抑壓的(억압적)타율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主體的(주체적) 극복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外的强壓(외적강압)을 극복할 수 있는 外的力量(외적역량)이 성숙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8․15는 우리민족에 있어서 진정한 解放(해방)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지금우리들 立場(입장)으로는 매우 난처하다. 그 이유는 앞으로 살펴볼 4․19의 社會經濟的(사회경제적) 배경에서 잘 나타난다.


  농업에 있어서 봉건적인 지주․소작 관계의 淸算(청산)과 日帝(일제)의 韓國支配(한국지배)의 경제적 기초인 일본독점 자본과 買辨資本(매변자본)의 민족자본화를 통한 민족경제확립의 기반조성과, 舊植民母國(구식민모국)들의 완전한 척결을 통한 역사의식창조로 민족 자본주의 실현을 수행하려했다.
  그러나 식민지통치하 구체적인 자기생활속에서, 反(반)식민주의적 저항세력으로 성장해온 근로자․농민․중소생산자들은 민주적인 새로운 국가기구창출의 힘을 결집하지 못했다.
  해방-남북분단의 와중에서 해방을 독립투쟁과정에서 민중적 기반구축을 하지 못하고, 개별적 생활유지에 급급해온 소시민적 민족주의의 분파들이 미국의 한반도정책에 편입되면서 일제하의 매판적 기득권층들의 경제적 기반을 발판으로 비정통적 정부수립이라는 모순을 낳았다. 이것을 그 이후 한국현대사를 규정짓는 모순, 악순환의 주요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농지개혁은 개혁의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귀속재산의 불하는 민족경제확립을 위한 민족자본형성이 아닌 일부정상배들과 매판자본의 원시축적을 가능케 했을 따름이다. 여기에다 6․25를 경험하면서 전세계적상황으로 주어진 냉전체제의 고정화는 전후 세계경제재편성 과정에서 선진자본의 자기운동관철수단의 하나인 授助經濟(수조경제)속에서 밑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민중의 생활상의 요구는 안보나 반공이라는 미명하에 압살되고 반민주․買辨的(매변적)인 상황속에 정체하게 되었다.
  여기서 8․15후 한국경제구조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농지개혁과 귀속재산불하 및 원조경제의 성격은 앞으로 전개될 모든 사회․경제적문제들의 이해에도 도움을 줄 것이므로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농지개혁의 결과는 지가상환액상승등으로 농민부담이 과중된 반면지주에게는 정부가 여러 가지 특혜를 주어 지주의 산업자본가化(화)를 적극 보장해주었다.
  그런데 49~57년까지 분배된 총토지면적은 총분배대상 면적의 56.6%에 불과했다는 것은 농업에 있어서 봉건성이 여전히 잔존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48~58년까지 歸財企業拂下(귀재기업불하) 2천29건중 70%가 53년이전 혼란기에 처리되었으며 정부특혜융자․인플레이션 및 불하가격의 비현실적 책정등으로 귀재불하는 거의 무상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권층과 긴밀한 유착을 통한 관료독점자본형성의 여지가 있었다.
  셋째로 소비재중심의 원조는 정상적인 생산구조에 기초하지 않는 왜곡된 고소비성향의 야기로 고정자본소모율 조차 충당하지 못하는 국내저축율을 보였다. 특히 미국 잉여농산물도입은 농지였다. 특히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은 농지개혁의 불철저로 인한 農業停滯(농업정체)를 더욱 가중시켜 식량 및 공업원자재의 대외의존성강화와 저농산물, 저임금정책을 통한 독점자본형성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또한 후진국경제개발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綿紡織工業(면방직공업)은 미국과잉원금해소방안과 연결되어 ‘農(농)․工(공)’의 유기적 분업관련이 파괴되었다. 이는 45년에 1억9백21만근이던 棉花生産量(면화생산량)이 57년에는 4천2백90만근으로 격감하게 됨을 보아도 직감할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國內土着資本(국내토착자본) 및 民族資本形成(민족자본형성)의 諸要因(제요인)들이 소멸되었고 授助物資導入過程(수조물자도입과정)에서도 權力(권력)과 밀착된 자본형성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經濟構造(경제구조)속에서 사회변혁의 요구는 量的(양적)․質的矛盾蓄積(질적모순축적)의 심화과정에서 커지게 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農村經濟破綻(농촌경제파탄)에 따른 自然離農(자연이농)으로 48년에 17.6%에서 28%로 도시인구증가를 보게 된다. 이중 55~60년까지 都市流入人口(도시유입인구)는 1백 80만 3천5백64명이었는데 아직까지 産業化(산업화)가 進展(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들을 工業勞動者化(공업노동자화)시키지 못한 결과 30만정도의 雇傭增大(고용증대)를 나타낸 이기간중 기존도시거주실업자를 합쳐 약2백50만을 上廻(상회)하는 失業率(실업률)을 나타내게 된다.
  한편 52~58年(년)까지 勞動者平均賃金(노동자평균임금)은 各 家口當 總收入(각 가구당 총수입)의 50%정도이고, 노동자총수입중 借入金(차입금)이 10%였다. 따라서 노동자 평균임금의 차입금에 대한 비율은 무려 25%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낭비적 성향때문이  아님은 당시의 엥겔계수가 40%이상이고 문화비는 9%정도이었다는 것이 代辯(대변)해준다. 이러한 絶對的貧困深化(절대적빈곤심화)와 함께 當(당)의 偏重現象(편중현상)의 極大化(극대화)는 62年(년) 6月(월)10日(일) 2次(차) 貨幣改革當時(화폐개혁당시) 全體(전체) 11.2%가 現金總額(현금총액)의 53.5%을 占(점)하고 있었다는데서 經濟構造性格(경제구조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러한 絶對的(절대적)․相對的貧困(상대적빈곤)의 深化(심화)로 가장 고통받는 계층들은 물론 直接生産者(직접생산자)들이다.
  이들이 자신의 생활상의 정당한 요구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요구들의 收斂過程(수렴과정)의 필연적인 결과인 社會變革(사회변혁)의 의지가 사회의식으론 상승과정을 거치면서 一般化(일반화) 되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자신들의 小市民的(소시민적) 의식을 매개로 民族的(민족적) 요구를 제기한 것이 4․19에 의해 제기된 大前提(대전제)는 진정한 민족해방을 위한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가 형성기반인 自立經濟達成(자립경제달성)과 우리 歷史上(역사상) 한번도 실현되지 못한 民主主義確立(민주주의확립)을 통해 우리시대의 最大(최대)의 아픔인 조국분단을 극복하려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관철되지 못한 채 5․16에 의해 전환되어 진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4․19가 갖는 한계성을 파악해야 한다. 즉, 어떤 역사속에서 진정한 변혁은 구 지배계급의 물적 기반인 사회경제적 구조자체변혁과 함께 그것에 의해 다듬어진 상부구조가 낡은 것을 대체했을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4․19는 농민 및 도시근로자들의 생활상의 요구에 부응하여 정치적 변혁을 수행할 수는 있었지만 학생 자신들이 진정한 변혁의 주체가 될수 없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직접적인 생존권이 걸린 利害當事者(이해당사자)들 특히 60년당시 全人口(전인구)의 58%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층대다수의 不參(불참)은 4․19가 일면적 정치혁명으로 밖에 끝날 수 없었던 요인이라고 한다. 한편 산업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여 객관적으로 성숙된 분위기속에서도 완결된 사회변혁을 지양하기에는 미약했다.
  이것은 그들을 變革(변혁)의 核心勢力(핵심세력)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층부재라고도 볼 수 있다. 民主黨內閣(민주당내각) 또한 外的壓力(외적압력)과 內的(내적)으로는 軍部(군부)를 압도할 만큼 민중적 지지기반을 갖지 못한채 5․16을 맞게 된다.


  5․16이후 우리경제는 근원적인 치유를 받지 못했다. 4․19에 의해 제기되었던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3차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저곡가-저임금과 외자를 결합한 수출을 통해 지극히 노동수탈적인 초과이윤획득을 추구하는 독점자본과 직․합작투자 및 각종 차관에 의해 자국 상품수출을 증대시켰다. 자국에 의한 시장지배 및 동일경제권내로의 통합으로 독점적 초과이윤을 달성하려는 외국자본에 의해 과중되는 부담을 직접생산자들이 지게 되었다. 또한 독점자본의 지배하에 있는 중소기업은 다시 근로자에 대한 억압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산업화과정자체가 농업부문의 경제적회생과 표리관계로 되기 때문에 도시와 농촌 모두에게 피해요소들을 누적시켰다.
  여기에서 4․19가 가졌던 한계성을 생각한다면, 이제 民族(민족)의知性(지성)과 良心(양심)을 대변하는 우리 大學人(대학인)들은 구호나 소란에만 그치는 소극적태도보다는 더 內密化(내밀화)되어 적극적인 자세로서 問題(문제)의 핵심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문제들로부터 오는 제약에 의해 歪曲(왜곡)되어진 우리들 의식의 올바른 교정과 그것의 자기 삶에로의 실천과정에서 보다 나은 우리들의 生活(생활)터전이 이룩될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민족의 가장 큰 課題(과제)인 분단극복의 실마리가 될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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