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始(원시)와 現代(현대)… 낙타와 캐딜락이 함께 달린다

  李政(이정) 본사 前(전)편집부장은 文敎部(문교부) 대학생 해외 파견 계획에 의해 지난 8월7일부터 17일까지 제 2차 대한민국 대학생대표 중동 방문단의 일원으로 사우디아라비아王國(왕국)을 방문하고, 바레인과 필리핀 등지를 거쳐 23일 귀국하였다. 특히 李君(이군)은 대학신문 기자출신의 단 한명의 방문단원으로서 주목을 끌었는데, 이 글은 李(이)군이 사우디아라비아王國(왕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보고기다.
<편집자註(주)>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라고 하면, 대체도 世界(세계) 제1의 産油國(산유국), 이슬람敎(교)의 宗主國(종주국), 韓國企業(한국기업)이 진출한 外貨(외화)획득의 場(장)등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말은 역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깊이와 넓이에 대해서는 다소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있다고 믿어진다. 우리의 過小(과소) 또는 過大(과대) 평가의 폭을 줄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의문들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①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의 생산만으로 자족한 것이며, 그것만이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인가, ②이슬람敎(교)는 다분히 宗敎(종교)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한 것인가. ③韓國(한국)의 기업진출은 어떤 형태로 전개되고 있으며, 과연 언제까지 그 곳에서 외화를 벌어들일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의 답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명백한 오해가 있었으며, 그 오해의 결과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희망적인 자애를 간과해왔음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점에서 이러한 의문들을 확대해 나갈 필요성이 있으며, 그때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상에 한 걸음 더 근접해 가고, 그들과 한국과의 관계를 보다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밝힐 수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의 명확한 답을 구하기에 사우디아라비아는 너무 넓었다. 다시 말하면 넓은만큼 다양했다. 人口(인구)는 서울시 인구에도 못 미치는 고작 7백만명 (76년 현재)에 불과하지만 면적은 2백40만평방km로서 南韓(남한)면적의 20배가 넘는다. 駐(주)사우디아라비아 柳陽洙(유양수) 大使(대사)는 ‘볼모지일망정 韓國(한국)에도 이렇게 넓은 땅이 있었었으면 좋겠다.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만이 사방을 에워싸는 지역이 한반도 어느 한 곳에라도 있는가’라고 말한다. 한 예로 젯다에서 타북, 알자프, 사카카, 알바틴, 리야드에 이르는 3천km가 넘는 이 나라의 북부 사막을 횡단하는데 우리는 자동차로 3日(일)을 꼬박 달려야만 했다.
  이렇게 광활한 사막의 땅에는 그만큼 다양한 생활집단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석유생산을 통한 富(부)의 급진적인 중대 (78년도 現在(현재) 1人當(인당) GNP 9천2백10달러)가 사회적 문화적 발전의 결과로 평가될 만한 도시로 장정돼 있는가 하면, 그러한 부의 중대와는 상관없이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유목 생활을 즐기는 배두윈族(족)들이 아직도 국민의 27%s나 있기도 하다.
  이 나라의 도시의 거리에서 우리는 넘쳐나는 물처럼 富(부)의 넘쳐남을 볼수 있었다. 오히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가를 우리는 보았다. 도시에 들어서면 거기에는 완성된 도시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흡사 어느 건설업체의 공사현장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사방에서 철골로 에워싸인 공사장을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건물들의 내부시설도 수도꼭지조차 金製(금제)로 주문하고, 양탄자는 양피로 대신할 만큼 초호화판이었다. 이 나라에서 질이 좋은 대리석이 생산됨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産(산) 대리석을 수입해 장식한다. 곳곳에서 만나는 어린 아이들의 손목에는 금줄로 된 로렉스나 오메가의 어른용 시계들이 異邦人(이방인)의 눈길을 끌고, 어느 것은 숫자판 주위를 수십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것도 흔하다. 길옆에는 우리나라의 장관이나 대기업체의 사장쯤되어야 부담없이 탈 수 있는 벤츠, 케딜락등의 승용차들이 주인없이 즐비하게 버려져 있다. 조그만 접촉 사고에도 그들은 자신의 차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아마 이나라는 머지않아 車(차)쓰레기로 고민할 것이 틀림없다.
사막길 주변에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다. 차갑도 싸서 최고급이라고 해야 7천달러를 넘지 않는다. 더구나 젯다에 있는 밀입국자를 ‘위한’ 감옥은 우리나의 웬만한 호텔급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운동장처럼 원형의 건물로 된 이 감옥에는 수감되기를 기다리기나 하는 듯한 얼굴이 검은 예멘, 파키스탄 등지에서 온 밀입국자들이 거지떼처럼 앉아서 ‘수감을 기다리고’ 있겠다.
  정부에서는 길주변에 나무를 심어 녹지를 형성하는데, 그 나무는 제각기 튼튼한 철망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나무 한그루를 기르는데는 한사람을 大學(대학)까지 교육시키는데 드는 비용과 맞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5, 6년만 기르면 우리나라에서 30년을 자란 나무의 크기와 같다. 이들은 한 그루의 나무를 위해 5, 6년의 엄청난 집중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사치로 여긴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엄청나게 남아도는 돈을 쓸 곳을 몰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달러를 사용하지 않는다. 외국인도 이 나라의 돈리얄로 폭락하는 달러를 바꿔 사용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돈이 없는, 또는 돈 쓰기를 모르고 사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예멘 등지에서 올라와서 거리에서 1리얄을 구걸하는 외국인말고도, 도시의 한 가운데 모래밭에 관자촌을 짓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 판자집을 짓고서 정말로 불쌍하게 살고 있다. 어느 외국의 건설업체에서 잡역부로 일하기도 한다. 제다市(시)의 중심가 주변에도 약 1백여채의 관자집들이 버려진 차처럼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이러한 풍경을 ‘18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도시’ 또는 ‘6․25사변 중의 부산市(시)’에 비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보다는 좀 낙천적인 돈을 거의 모르고 사는 부류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배두윈族(족)들이다. 아직도 이들은 사막의 가운데에서 의연히 거주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일체의 문화적, 사회적 혜택을 거부하고, 사막 중에서 낙타 양 당나귀 등을 기르면서 ‘참된 아랍人(인)은 황야에 거주하는 遊牧民(유목민)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북부의 사막길을 횡단하면서 그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검정텐트를 치고서 수십명 내지 수백명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부족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사막의 가시같은 작은 풀이 있는 곳에 양떼를 치면서, 그 양떼의 배설물을 연로로 사용하고 있다. 차를 구입해서 물차로 이용하는 정도가 그들 문화생활의 전부처럼 여겨졌다. 25년 무이자 상환조건의 자금융자로 정부에서 정착할 아파트를 지어주어도, 그들은 양을 그곳에 재우고 자신들은 모래위에서 잔다고 한다. 우리는 건설중인 리야드의 왕자궁을 방문할 기회도 있었는데, 거기에도 궁안에 모래밭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생활은 이러한 사막의 생활이 체질화 되었고, 그것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애착까지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최근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王(왕)이 신병 치료를 마치고 영국에서 귀국한 뒤 王(왕)은 자신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국민들에게 알리면서,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다소의 돈을 나눠주기를 원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 유목민들은 왕의 사신이 지나는 길가로 일시 주거지를 옮겼는데, 그건 돈을 받기위한 것이 아니고, 다분히 사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들은 사신을 만나서 왕의 병세나 근황을 묻거나, 또는 그들의 불만을 ‘先王(선왕)은 그러지 않았는데…’라는 서두로서 전달한다고 한다.
  이처럼 그들은 돈이나 명예등의 그 어떤 세속적인 ‘허영’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사막에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최상의 생활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나라의 사람들은 대체로 물질에 대한 두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고, 그것에 따라 세가지의 유형으로 구분할수 있는 것이다.
  ①도시주변에서 근대화의 의욕을 갖고 사는 개화된 사람들중 돈이 있는자. ②개화가 되고 안되고와 관계없이 가난하게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연명하고 있는자. ③근대화의 의욕을 조금도 가지지 않고 사막중에서 古代(고대)로부터의 생활을 누리는 遊牧民(유목민).
  또한 이들을 석유생산으로 인한 부의 증대가 미치는 영향권의 안에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또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자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의 다양한 국민적 사고방식, 또는 생활방식은 이 나라를 세계 제 1의 産油國(산유국), 또는 그로인한 經濟富國(경제부국)으로서 이해하는데 다소의 어려움을 던져준다.


  그러나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 더 넓게는 아랍을 얘기하는데 한가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실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건 이슬람敎(교)에 대한 이나라 백성들의 믿음이다. 차라리 이슬람敎(교)는 이들이 回敎(회교)로 신봉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대로 생활 방식, 또는 생활의 전부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슬람敎(교)는 알라신을 섬기는 종교로 6백10년에 마호멧이 메카를 중심으로 펴나가기 시작했는데 中世(중세)의 한 때에는 그 세력을 西(서)로는 모로코에서 東(동)으로는 印度(인도)까지 확장했던 적이 있었다. 이슬람敎(교)를 믿는 이들이 생활규범으로 여기는 코란은 政敎一致(정교일치)시대를 시작케한 제3대 칼리프(Khaliph)인 오트만(Othman)이 마호멧의 말을 편찬한 것으로서 약80개의 금기사항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들의 모든 실생활을 규제하며, 可法制度(가법제도)를 운영케 하는 것은 이슬람法(법) (이 法(법)은 Sharia라고 하는데, 코란과 마호멧의 언행록인 Hadith, 이슬람 律士(율사)들이 규제하는 Ulema를 합한 것이다)과 王(왕)의 칙령이다.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사회생활을 규제하는 法(법)에 대하여 확실히 조소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禁酒(금주)나 오락활동의 제한, 여성의 社會(사회)참여 금지 (초등학교 교사는 가능), 종교적 의식의 철저등 그들 사회의 법은 매우 보수적이며, 폐쇄적이다.
  아직도 매주 金(금)요일이면 각 도시마다 범죄자에 대한 公開(공개) 刑罰(형벌)이 전통적 방법에 의해 자행된다고 한다. 도둑질한 자의 손목을 자르거나, 살인한 자의 목을 자르거나 하는 일에 아무도 전율하지 않고 그들은 묵묵히 바라보며, 오히려 형벌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카카市(시)에는 우리나라의 東亞建設(동아건설)이 진출해 있는데, 한번은 기능공 한 사람이 면도를 하기위해 사카카市(시)의 근교에 버려진 차에서 무심코 빽밀러를 떼어왔다고 한다. 이 일이 사카카市(시) 경찰서에 고발되어서 그 바람에 아주 혼이 났었다고 東亞建設(동아건설)의 그곳 현장소장은 전한다. 또한 성모마리아처럼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이나라의 모든 여성은 첫 멘스를 경험한 이후에는 챠들(검은천)을 쓰고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다닌다. 남자가 그 여자를 바라보아도 안되고, 그 여자가 남자들을 바라보아도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리야드의 한 가게에서 우리나라의 간호원인 듯한 女子(여자)와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의 반가와하는 마음은 가게 주인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그는 우리에게 ‘말하지 말라’고 완강한 손짓을 했던 것이다.
  특히 거리의 골목길에 여자가 많이 지나게 되는 경우에도 그들은 골목입구를 가로막고 일체남자의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나라를 방문했던 시기는 마침 라마단(Ramadan) 기간(7월25日(일)~8월24일)이었다. 이 기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禁食(금식)을 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 한 모금, 입안의 침까지도 삼키지 말 것을 대사관으로부터 권고받았다. 이 금식이 행해지는 낮시간에는 상가의 문도 닫으며, 관공서도 쉰다. 대신 밤이 더 번화하고 요란하다. 禁酒(금주)에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세밀하게 규제가 가해지는데, 우리가 들고가는 가방에 술병이 그려져 있을 경우, 우리는 입국전에 공항에서 그것을 빼앗기고 만다.
  이처럼 엄격한 이들의 종교적 생활규범에 그들은 철저히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것들은 섭씨50도를 넘는 이 나라의 기후나 사막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지리 조건을 염두에 둔다면 곧 수긍하게 될 것이며, 아무도 조소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생활이 몸에 배어있었고, 또한 그러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가 이 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젯다 공항의 입국자 대합실에서도 목격한 일인데, 그들은 대합실의 한쪽 한 방향을 향하여 절을 하거나 업드려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입국수속을 관리하던 한 관리조차 업무를 중단하고 그들 틈에 끼어 절을 하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처럼 하루에 5회나 되는 聖地(성지) 메카를 향한 기도를 그들은 생활처럼 꼬박 하고 있었고, 그러한 모습은 市內(시내)의 路上(노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또한 예배를 위한 장소인 이슬람사원은 공공건물에는 틀림없이 그 부속건물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敎(교)의 율법 자체가 안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의 점진적인 사회문제화는 이 나라의 변화의 한 방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것은 1부4처제의 모순을 들 수 있다.
  여성은 나이에 따라 값이 정해져 남자에게 ‘팔려’가는데, 그 여자를 택할 수 있는 최우선권은 그녀의 사촌에게 주어진다. 여자편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전혀 남자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이렇게 하여 남자는 대체로 10살의 나이 차이를 두어 4명의 여자를 취할수 있다. 이 때문에 여자가 부족하여 장가를 못가는 자가 남성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들 남성의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 남자끼리 호모를 즐기기도 하는게 이나라의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사카카市(시)에 사는 슈만이라는 이나라 청년은 ‘난 한 여자와 결혼할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英國(영국)에서 대학을 나온 인텔리였다.
  그러나 교육의 보급과 함께 그들이 점차 한 여자만을 배우자로 생각하고 있는 현상이 확실히 두드러져 가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근대화의 악영향으로서 이보다 더 큰 질서의 와해가 눈에 띄기도 한다. 이슬람敎(교)를 믿는다는 大使館(대사관)의 金相男(김상남) 勞務官(노무관)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대화, 또는 서구화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를 의미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 나라의 장래를 상당히 부정적인 측면으로 파악할수도 있는 충분한 요인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서구화, 또는 근대화의 영향으로 인해서 이슬람율법이 서서히 붕괴를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서 가치관의 혼란을 둘 수가 있다. 그들은 알라神(신)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믿었던 시대에서 향락의 즐거움을 맛볼수 있는 시대로 서서히 변모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일부 백성들은 술을 알기 시작했고, 일부의 여자는 집안을 나와서 ‘샤넬넘버5’의 향수를 바르고 도시의 밤거리를 배회할 줄도 알게 되었다. 남편이외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엔 미소 지을 줄도 알게 되었다. 라마단기간의 낮에 가제의 뒷전에서 빵을 사먹을 줄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땅에 가서 일하고 있는 韓國人(한국인)은 고민한다. 기후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나라의 생활관습이 우리와 영 판이한 점에서도 그렇다. 經濟的(경제적)인 富(부)의 증대가 그들의 콧대를 높혔고, 외국인하면 무조건 ‘일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그들의 사고방식도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62年(년)10月(월) 이나라와 大使級(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을 합의하였고, 75년 1月(월) 한‧사經濟(경제) 및 技術協力(기술협력)협정이 발효한 이래 現在(현재) 60여개 회사에 9만명에 육박하는 근로자가 이 나라에 진출해 있다.
  이들 근로자들은 그야말로 피와 땀을 흘리면서 이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나라의 자그마한 도로건설에서부터 크게는 9km에 달하는 항만 건설까지도 우리의 근로자들이 맡아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금년8월 현재의 공계약고는 1백50억달러나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보다 우리나라의 영향력을 더욱 분명하게 말하여 주는 것은 이 나라의 도시에 있는 상가 어디를 가도 간단한 우리말이 통한다는 점이었다. 東南亞(동남아) 제국에서 일본말이 통할수 있는 것처럼 이 나라에서는 영어와 우리말이 거의 같은 비중으로 통하고 있었다.
  가게에서 물건을 달라고하면 똑똑한 우리말로 ‘이건 싼 것이다’ 혹은 ‘○○○원이다’등을 말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올바른 눈으로 보기를 꺼려한다. ‘한국인은 일하는 사람’, 또는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등으로 평가하는 ‘칭찬’의 저변에는 ‘우리는 돈을 주며 일을 시키는 사람’이라는 수직관계로 파악하려 하는 확실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외국인에게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이에대해 柳(유)대사는 ‘그들이 돈이 많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식구조가 변화되어 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기술이 없다는 점엔 커다란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이러한 ‘우물안의 개구리’ 格(격)인 사고방식 탓으로 우리의 근로자들과의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다소 마찰을 빚는 경우가 드물게 있기도 한게 사실이며, 그들의 엄격한 종교법에 저촉되어 고민하는 일도 있기도 한게 속일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韓國人(한국인)은 이 나라에서의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이 나라의 방방곳곳에 ‘꾸리(코리아의 이 나라 사람들의 發音(발음))’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실제로 이 나라의 모든 도시에 우리의 공사현장이 수 없이 펼쳐져 그 곳에서 오늘도 쉼없이 일하고 있는 것이다. 아부하드리아의 한 도로공사장에서 만난 근로자들은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서 섭씨 50도가 넘는 폭염을 견디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색깔이 강하게 들어간 선그라스를 끼어야만 눈물을 흘리지 않고 눈을 뜰 수 있는 공사현장의 정경은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러나 우리의 최근 4년간의 비약적인 이 나라 진출 (75년 현재의 파견 근로자수는 1천2백여명에 불과했었다고 柳大使(유대사)는 전한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가지 점에서 반성을 하여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먼저 기술인력의 진출부족을 들 수 있다. 우리 업체가 담당하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이 기능공의 힘을 빌면 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보다 큰 차원의 기술의 개발과 그것의 진출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 질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음으로는 국산 자재의 사용이 부족한 점이다. 우리가 일하면서도 우리의 자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웠다. 이것은 기술의 개발 및 진출이 이루어질 때 자연스럽게 극복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시기를 위해서라고 하루 속히 국산 자재의 질을 UN규격으로 높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나라에 대한 우리의 기업진출도 이 나라의 기간산업이 그 모습을 완성해감에 따라 곧 퇴조를 보일 것이 예상된다. 그것은 머지않은 장래에 곧 이루어 질 것이고, 그 때는 파견인력의 국내 유입에 따른 사회적 물의도 예상된다.
  柳大使(유대사)는 그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벌어들인 외화로 국내 산업시설을 확장해서 유입인력을 흡수하고, 한편으로 또 다른 해외진출을 꾀해야 될 것이다’ 고 말하면서 ‘다음은 아프리카의 진출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확실히 사우디아라비아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추세를 염두에 두고 이 나라의 20년후를 상상해 본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무시못할 强大國(강대국)을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경제대국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의식도 점차 개발되어서 선진국형의 사회구조를 이루어 놓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군사적인 측면도 절대 등한히 하지 않고 있다. 알바틴의 미사일기지나 타북의 공군기지는 놀라울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계속 증대되어서 마땅하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이 나라와 관계를 계속하고 있는 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을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산업기술 개발이 선결조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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