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를 붙이지만 아파서 일을 제대로 못하겠어”

  ‘요사이는 팔꿈치와 어깨가 시리고 아파서 일을 못하겠어. 날마다 파스를 붙이고 다니지만 어떨 때는 눈물이 나와’
  어둠이 깔린 거리를 바라보며 재호는 말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모양으로 거리를 휘젓고 다녔고 우리는 길 한모퉁이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너울거리는백열전등 아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투영되고, 이어서 오뎅 국물의 구수한 냄새가 술기운을 상기시켰다.
  ‘누가 내 심정을 알아줄까? 그까짓 월급 몇 푼 받자고 하루종일 짐승처럼 일만해도 살기는 점점 어렵고 동생 학비도 걱정이 되고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어’
  재호의 말 마디마디가 깨어진 유리의 파편 조각처럼 가슴에 박혀오는 것 같았다.
  집안사정으로 대학을 진학 못하고 곧바로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친구의 푸념속에 나는 여태껏 안이했던 나의 대학생활과 노동 현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힘들 땐 좀 요령을 부려가며 하지 그래. 할수 없잖니. 힘들어도 참아야지’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에 친구에게 해줘야 할 말을 나는 가슴 속에 품고 있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엉뚱한 것이었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함께 입시를 걱정하고 장래를 생각하며 가슴 조이던 처지에서 나는 보다 깊은 학문의 세계로 뛰어 들었고 친구녀석은 산업전선으로 뛰어든 차이밖에 없었는데 이젠 서로 다른 의식 세계 속에서 우리는 만나야 될 입장이었다. 자유와 학문의 상아탑인 대학의 캠퍼스에서 때론 학우들과 잔디밭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민주주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도 흥에 겨우면 시대와 현실을 탓하며 목청껏 노래 부르던 지난날들! 나는 시대와 현실의 모순을 가슴 아파하는 것이 참다운 지성인의 사명이라고 외쳤지만 어두운 전등 옆에 앉아 있는 재호의 늘어진 어께를 바라보며 오늘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내 월급이 얼마인 줄 아니? 하루 일당으로 갈비집에서 갈비 한두 대 뜯으면 그만이야. 어떤 사람은 그러지. 열심히 일하고 노력만하면 잘 살 수 있다고... 하루종일 뼈빠지게 일했어. 그래도 맨날 그 꼴이라구. 이런 나에게 그런 분홍색 빛 감언이 해당되겠니?’
  재호는 술기운에 몸을 뒤틀었다. 녀석의 못박힌 꺼끌한 손을 만지며 나는 그의 말 속에서 슬픈 냄새를 맡고야 말았다. 자욱히 깔리는 니코친의 연기 속에서 나는 서서히 침몰되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이것이 어떨 때는 즐거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보고 싶은 사람에겐 편지도 쓰고 싶은 계절에 그 낭만을 접어두고 돌파이프와 보일러 속에 묻혀 일해야만 될 재호의 모습이 뇌리에 사무쳐 왔다. 정당한 댓가도 받지 못한 채, 아니 기계처럼 부림을 당해도 어디에다 하소연 할 수 없는 그 암울한 가슴에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옆에 앉아있는 재호에게 아무말도 해줄수 없는 나의 침묵이 과연 나만의 침묵일까?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가는 재호의 뒷모습에 차가운 밤공기는 여전히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이 침묵의 밤에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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