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목소리에는 어떤 힘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파마기를 찾아볼 수 없는 곧은 생머리, 회색을 주 바탕색으로 한 가을쉐터와 검정색 통바지, 핼쓱하게 여윈 두 볼, 까칠한 피부, 피곤해 보이면서도 강한빛의 두 눈동자.
  5년만에 만난 선영은 이런모습을 하고있었다. 고등학교때와 변하지 않은 것은 목소리뿐.
  ‘마음은 항상 있었어. 가끔씩 전활 해봤지만 늘 없었던 것 같아. 학교는 잘 다니니? 이제 졸업반이지?’
  말하는 선영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응. 영예스럽지 못하게도 졸업하게 됐어.’
  ‘너희같은 여대에서는 졸업하기가 어려울텐데 영예스럽지가 못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계속 물고늘어지는 선영이로인해 난 당황했고, 순간 스쳐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선영은 S대 조소과에 다닌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는 항상 조용하게 그림만 그리는 이미지로 남아있는 친구이다.
  ‘학교 아이들의 소비지향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에 환멸을 느꼈어.’
  ‘여자의 미를 외모에서만 찾으려는 남자들과, 그것을 위해 돈으로 장식하고 암내 풍기는 기집애들의 속물 근성, 휴학했어. 그림같은 것,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작업이라고 생각해’
  선영의 목소리에는 어떤 힘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학내 문제로 항상 시끄러운 가운데서 생활했지만. 한계와 자학에만 그칠 것 같아 걱정도 되고.’
  선영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과 오빠를 핑계로 내가 거기에서 손을 끊은 것은 2학년2학기 들어가면서 부터였다 당시 오빠는 강집이란 형태로 군대에 가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내게 대한 제재는 거의 강압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가 될 수는 없으리라. 어쩌면 두려움과 공포심이 계속 짓누르는 그 힘겨움을 견뎌내지 못해서 스스로 손을 들게 된 것인지도. 그렇게해서 나는 두더지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생활에 있어 무수히 가로막고 방해하는 보이지않는 어떤 힘의 작용들 난 그것들을 떨쳐버리기위해 늘 어두운 생활을 즐겨야했다.
  선배나 친구 후배들이 눈에 띨새라 구석진 장소나 도서관을 애용해야했다. 아이들이 스크럼을 짜고서 교정을 돌 때 나는 그늘에 숨어 방관자가 되어야했고, 돌맹이와 최루탄이 공중에서 육박전을 할때는 안전한 장소로 몸을 피해야했다. 나 자신 그렇게 무기력하고 나약한 방관자이면서도 나와 같은 분류의 또다른 방관자들에게 적대심을 품어야하는 모순을 저질러야 했다.
  ‘집 나온지 몇 개월 됐어. 내 마음 이해할지 모르겠는데 가족조차도 의식화 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그런 것을 외치고 다닌다는게 모순인 것 같아서야’
  외모에만 치중해 세태와 융합해 버리는 여대생들의 한심스런 작태를 욕하고 개탄하면서도 정작 내 동생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는 손을 쓸 수가 없었고, 실리만 추구하는 기업가들을 욱하면서도 나의 아버지에겐 감히 손가락질도 못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선영에게서 다시 걸려온 것은 열흘 정도 지난 후였다.
  그동안 선영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이 생긴 나는 다른 볼일 다 제쳐놓고서 약속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그날 선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정해놓고서 연락 하나 없이 무산시켜버린 선영이 밉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도 선영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신학기 접어들면서 각 대학교로부터 제법 시끄러운 소리들이 울려 나가고 있었다. 졸업한 마당에 직접 느껴볼 순없지만 신문이 있기에 어느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었다.
  신문을 펴고서 훒어 내려가던 나의 눈에 들이닥치는 기사가 있었다.
  ...최선영 (24 · xx전자 부품해고 근로자, S대 조소과 휴학) 구속 ... 공장내 파업 주동...
신문을 접은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직까진 차가운 바람과 맑고 밝은 초봄의 햇살. 패션잡지를 옆구리에 끼고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여대생의 화사한 화장만이 햇살의 벗이 되어 줄 듯 싶었다.
  나는 신문을 쥔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