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 carr는 ‘歷史(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對話(대화)’라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韓國古代史(한국고대사)중 쟁점의 하나인 樂浪郡(낙랑군)의 위치규명은 뜻있는 일이라 생각해 2회에 걸쳐 遼東·遼西說(요동요서설)과 平壤設(평양설)을 지지하는 논문은 게재한 바 있다. 이를 정리하는 입장에서 두 筆者(필자)의 辯(변)을 싣는다. 이에 대한 眞僞(진위)는 훗날의 역사가 말해주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편집자 註(주)’


◇ 樂浪郡(낙랑군) 요동·요서설
최근 考古學的(고고학적)성과는 遼東遼西說(요동·요서설) 뒷받침

Ⅰ. 머릿말

  前漢 武帝(전한 무제)때 설치된 樂浪郡(낙랑군)은 漢四郡(한사군)의 대표적 존재로서 古朝鮮(고조선)의 中心疆域(중심강역)에 설치되었으므로 그 위치의 정확한 인식은 韓國古代史(한국고대사)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에 관하여 근대한국사학이 시작된 이래로, 일찌기 申采浩(신채호), 張道斌(장도빈), 鄭寅普(정인보)등 여러 학자들은 그 위치를 오늘날의 遼東·遼西(요동요서)지역으로 비정하였으며(遼東遼西說(요동요서설)), 최근에 까지 일부학자들은 그 위치를 평양지역으로 보는 기존의 다수적 견해 (平壤地域設(평양지역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異議(이의)와 反論(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한편 北韓(북한)의 역사학계는 이 문제에 대하여 1960년대에 큰 논쟁이 있은 이후 요동요서설이 우세한 입장에 있는 사실은 참고할 만하다.
  낙랑군의 위치를 규명하는 작업은 考古學(고고학)등 다각적인분야의 연구검토가 병행되어야 하며 낙랑군에 앞서 존재했던 古朝鮮(고조선)의 위치를 규명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Ⅱ. 中國文獻(중국문헌)에 나타난 古朝鮮(고조선)의 位置(위치)

  고조선의 중심강역은 곧 樂浪郡(낙랑군)의 위치를 의미하는데 고조선이 존재했던 戰國時代부터 前漢初(전한초) 또는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기의 中國文獻(중국문헌)은 고조선의 위치를 오늘날의 요동·요서 지역인 발해의 북쪽연안으로서 그 서쪽境界(경계)가 중국 河北省(하북성)의 난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山海經(산해경)은 ‘고조선은 남쪽이 바다와 접해 있었고 북쪽은 산과 접해있었으며, 중국동해(황해)의 안쪽, 북해(발해)의 귀퉁이에 위치하였다. (朝鮮在列隔東 海北山南: 東海地內 北海隔 有國名曰朝鮮: 海內經 (조선재열격동 해북산남: 동해지내 북해격 유국명왈조선: 해내경 )’라고 기록하였다.
  史記集解(사기집해)와 史記索隱(사기색은)은 조선열전에 기록된 衛滿朝鮮(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의 위치가 昌黎險漬縣(창려험지현), 遼東險漬縣(요동험지현)지역에 있었다고 전하는데 (都王險(도왕험)의 注: 徐廣曰 昌黎有險漬縣也, 應劭注 地理志遼東險漬縣 朝鮮王舊都(주: 도광왈 창려유험지현야, 응소주 지리지요동험지현 조선왕구도) 그 곳은 오늘날의 요동요서지역(난하부근 昌黎(창려)지방)에 해당된다.
  문헌에 의하면 古朝鮮(고조선)과 中國(중국)과의 서쪽 경계에는 遼水(요수)가 있었는데 史記(사기), 呂氏春秋(여씨춘추), 淮南子(회남자), 管子(관자)등을 통하여 볼 때 당시의 요수는 지금의 遼河(요하)가 아닌 중국 하북성의 난하임을 알 수 있다. (一例(일례)로 泰二世皇帝(태이세황제)가 난하동부연안의 갈석산지역을 다녀온 사실을 遼東(요동)에 다녀왔다고 기록 : 史記(사기) 泰始皇本紀 二世皇帝 元年條 (태시황본기 이세황제 원년조))
  이런 기록들에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遼東·遼西(요동·요서)지역 (특히 遼西(요서)지역) 이었으며 중국과의 경계가 난하와 갈석산부근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 멸망직후 그 중심지에 설치된 樂浪郡(낙랑군)의 위치를 오늘날의 요서지역 갈석산 부근으로 전하는 史記 夏本紀(사기 하본기) (樂浪遂城縣 有碣石山 (낙랑수성현 유갈석산))와 漢書 賈損傳(한서 가손전)(東過碣石以玄菟樂浪爲郡(동과갈석이현토낙랑위군)등의 기록은 정확한 것이 된다.
 

Ⅲ. 考古學的 考察(고고학적 고찰)

  위에서 살펴본 견해는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와도 연결되고 있다.
  고조선의 초기문화는 靑銅器文化(청동기문화)인데 중국의 청동기문화와 동방의 청동기문화의 경계선이 遼西地方(요서지방)의 난하라는 점은 결코 우연으로 볼 수 없다.
  아울러 요서지역의 청동기문화 開始年代(개시연대)는 BC 2400년경으로 밝혀지는데 이 시대는 사회제도의 정돈, 계층분화 등이 시작되므로 고조선과 같은 정치권력의 등장을 상정해볼 수 있다. 그럴 경우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의 개국연대를 B·C 2333년경으로 기록한 것과 일치한다.
  또한 史記(사기)에서 B·C11c경에 중국으로부터 고조선으로 이동해 간 것으로 전하는 箕子(기자)의 유물이 요서지역(喀左縣(객좌현))부근에서 발굴되었으며, 최근에는 같은 지역에서 韓國(한국)의 신석기문화의 대표적 유형인 빗살무늬토기, 積石塚, 石棺墓(적석총, 석관묘)들과 함께 대규모의 유적유물이 발굴 출토된 사실 등은 고조선 및 그 뒤를 이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요서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지금까지의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平壤(평양)의 樂浪遺蹟(낙랑유적)은 평양지역설의 적극적인 증거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韓國古代史(한국고대사)에 요서지역의 樂浪郡(낙랑군), 평양지역의 樂浪國(낙랑국), 그 뒤의 후한 광무제의 군사기지 樂浪(낙랑)등 3개의 낙랑이 존재하였다는 견해가 가까움을 알 수 있다.


Ⅳ. 問題(문제)를 보는 시각

  지금까지 밝혀진 關聯史料(관련사료)를 살펴보면 체계성이나 사료의 양에 있어서 遼東遼西設(요동요서설)의 근거 사료는 상대적으로 零星(영성)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관련사료 전체가 무시되어야 한다거나 요동요서설을 부정할 수 있는 논거는 성립되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日本學界(일본학계)가 古代(고대)의 南韓(남한)일대에 수백년간 존재하였다고 주장하는 任那日本府設(임나일본부설)의 관련 사료만을 살펴보면 그 존재를 부정해온 현재까지의 우리 學界(학계)의 논거는 대체로 약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歷史的 史實(역사적 사실)의 규명과 학문의 발전을 위하여서는 오히려 빈약한 史料(사료)의 활용과 그 연구가 장려되어야 하듯이 漢四郡(한사군)의 문제도 같은 차원에서 고찰되어져야 하겠다.
  다만 소박한 민족감정이 앞서는 주장은 반드시 지양되어져야 하겠고 아울러 새로운 견해에 대한 반발이 사료의 비교, 검토를 통한 것이 아니라 종래의 통설에 의한 선입견의 영향 때문이라면 역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정재남 (법정대 법학과)

 

◇ 樂浪郡(낙랑군) 평양지역설
평양설의 주요근거는 三國志(삼국지) 魏書(위서)를 東夷傳(동이전)

Ⅰ.序言(서언)

  해방이후 韓國史學界(한국사학계)는 植民史觀(식민사관)의 克服(극복)이라는 과제속에 日帝(일제)의 韓國史硏究(한국사연구)에 많은 손질을 가하게 되었고 지금은 어느 정도의 결실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 많은 부분에 수정이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연구를 통해 한국사는 새로운 모습을 지닐 수 있었다. 樂浪郡(낙랑군)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여서 여러 검토를 통해 장기간 韓半島(한반도) 대부분에 걸쳐 존재했었다는 日帝官學者(일제관학자)들의 設(설)에 수정이 가해졌었다.
  이때 일부 실학자들의 設(설)을 이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요동·요서설에 관해서도 검토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료와 전후 시대적 상황, 그리고 고고학적 성과 등을 통해 平壤設(평양설)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樂浪郡(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論難(논란)의 歷史(역사)는 매우 오랜 것으로 특히 唐代(당대)에는 많은 注海(주해)들이 나왔었다.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복잡한 것이며 다각적인 검토를 요하는 것이다.


Ⅱ. 三國志 東夷傳(삼국지 동이전)의 檢討(검토)

  平壤設(평양설)의 성립에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 三國志 魏書 東夷傳(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記事(기사)이다. 同富濊傳(동부예전)을 살펴보면, ‘濊(예)는 南(남)으로 長韓(장한)과 北(북)으로 高句麗(고구려)·沃沮(옥저)와 더불어 接(접)하고, 東(동)으로 大海(대해)에 이른다. 지금 朝鮮(조선)의 東(동)이 모두 그 땅이다. ... 漢武帝(한무제)가 朝鮮(조선)을 滅(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四郡(사군)으로 삼았다. ... 單單大山領 以西(단단대산령 이서)는 樂浪(낙랑)에 속하였으며, 領(령)의 以東 七縣(이동 칠현)은 諸尉(제위)가 주관하였는데 모두 濊(예)로서 백성을 삼았다. 뒤에 諸尉(제위)를 없애고 그 渠師(거사)를 봉하여 候(후)로 삼으니 지금의 不耐濊(불내예)가 모두 그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예는 半島(반도)의 동부연안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單單大領(단단대령)은 반도의 등줄기를 이루는 太白山脈(태백산맥)을 가르키는 것으로서 그 좌우가 모두 樂浪(낙랑)에 속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일단 樂浪郡(낙랑군)이 반도내에 존재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同書 東沃沮傳(동서 동옥저전)을 보면, ‘東沃沮(동옥저)는 高句麗(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의 東(동)쪽에 위치하며 大海 海邊(대해 해변)을 따라 거주한다. ... 北(북)은 挹婁·夫餘(읍루·부여)와 더불고 南(남)은 濊貊(예맥)과 더불어 접한다. ... 漢初(한초)에 燕國亡人(연국망인)이 衛滿(위만)이 朝鮮(조선)의 王(왕)이 되었는데 이때 옥저는 모두 그에 속하게 되었다.
  漢武 元封(한무 원봉) 2년 조선을 정벌하여 衛滿 孫子(위만 손자)인 右渠(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四郡(사군)으로 삼으매 옥저로써 玄菟郡(현토군)을 삼았는데 뒤에 夷貊(이맥)이 침략하여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기니 지금 소위 玄菟故府(현토고부)가 이것이다. 옥저는 낙랑에 속하게 되었는데, 漢(한)은 그 토지가 멀어 單單大嶺(단단대령) 동쪽지역에 東部諸尉(동부제위)를 설치하였으며 不耐(불내)에서 다스렸고 따로 領東七縣(영동칠현)을 주관하니 이때 옥저는 모두 縣(현)이 되었다. 漢光武(한광무) 6년 변두리의 郡(군)의 諸尉(제위)를 없앴는데 이때 없어졌다. 그 후 현의 渠師(거사)로서 縣候(현후)를 삼았는데 不耐(불내)·華麗(화려)·沃沮(옥저)등이 모두 侯國(후국)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東沃沮(동옥저) 또한 반도의 동부해안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동옥저를 상관하여 玄菟(현토)가 설치된 내용과 뒤에 동옥저가 樂浪(낙랑)에 속하게 되어 東部諸尉(동부제위)가 설치된 내용은 樂浪郡(낙랑군)이 遼西(요서)에 설치된 경우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내용이다.
  또한 華麗(화려)·不耐(불내)라는 명칭은 ‘三國史記(삼국사기)’에 新羅(신라)의 北邊(북변)과 관계된 地名(지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同書(동서) 新羅本紀(신라본기) 儒理尼師今17年條(유리이사금17년조)참조)
  이상에서 장구하게 原文(원문)을 인용하면서 論議(논의)를 전개시켜 보았는데 매 구절이 樂浪郡(낙랑군)의 위치규명에 중요한 史料(사료)가 되기 때문에 짧은 지면이나마 原文(원문)그대로 인용하였다.


Ⅲ. 南新縣(남신현)의 考察(고찰)

  지난 947號(호) 論稿(논고)에서 帶方郡(대방군)의 위치를 확인한 후 帶方郡(대방군)의 7개현 중에 6개현명이 後漢(후한)과 前漢(전한)의 낙랑군의 현명과 일치하고 있음을 통하여 前(전)·後漢(후한)의 낙랑군과 晋(진)의 대방군이 동일지역, 즉 한반도중북부를 중심으로 변천하였음을 고찰하였다. 이때 ‘晋書(진서)’ 대방군條(조)에 보이는 7개현 중에 南新縣(남신현)이 있는데 남신현은 ‘三國史記(삼국사기)’에도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同書 新羅本紀 婆娑尼師今 5年條(동서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5년조)를 보면 ‘古陀君主(고타군주)가 靑牛(청우)를 바치고 남신현에서는 보리가 岐(기)를 連(연)하였더니 풍년이 크게 들어 行人(행인)이 양식을 싸가지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古陀郡主獻靑牛(고타군주헌청우) 南新縣麥連歧(남신현맥연기) 大有年(대유년) 行者不䝴糧(행자불재량))’라 하였다.
  또 同書(동서) 신라본기 我休尼師今(아휴이사금) 3년조를 보면 ‘南新縣(남신현)에서 嘉禾(가화)를 進上(진상)하였다 (南新縣進嘉禾(남신현진가화))’라 하였다. 즉 帶方郡(대방군)이 설치되기 이전인 서기 84, 186년에 南新縣(남신현)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있다. 또 同書(동서) 신라본기 奈解泥師今(내해이사금) 27년조를 보면 ‘南新縣人(남신현인)이 죽었다가 달을 지나 다시 살아났다 (南新縣人死 (남신현인사) 歷月復活(역월부활))’라 하였다. 이러한 신라본기속에 보이는 남신현의 기사를 고찰해볼 때, 帶方郡(대방군) 및 帶方郡(대방군)과 지리적으로 연결되는 前·後漢(전·후한)의 樂浪郡(낙랑군)의 위치를 지금의 平壤一帶(평양일대)로 比定(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Ⅳ. 結語(결어)

  樂浪郡(낙랑군)의 문제는 고조선의 문제와도 관련되는 등 韓國上古史(한국상고사)의 중대문제의 하나이다. 그런데 한국사 관계의 論著目錄(논저목록)들을 살펴보면 낙랑군을 비롯한 漢四郡(한사군)을 다룬 논저들이 만족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아직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주요 史料(사료)들에 대한 일반적 검토만을 통해 平壤設(평양설)에 대한 結論(결론)을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기존 通說(통설)에 대하여 일부에서나마 反論(반론)이 제기되고 있는 이때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뿐 아니라 나아가 諸縣(제현)의 세밀한 考證(고증)과 함께 우리 民族史(민족사)의 문제까지도 밀도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인비의 말을 빌어 표현해보자. 漢四郡(한사군)의 설치는 분명 우리 民族史(민족사)에 대한 挑戰(도전)이었으며 그에 대한 우리 民族(민족)의 應戰(응전)은 훌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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