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壤說(평양설) 명확한 根據(근거) 있다”

1.序論(서론)

  樂浪君(낙랑군)의 立置問題(입치문제)에 있어서 기존의 平壤設(평양설)에 대하여 最近學界(최근학계)의 一部(일부)에서 종래의 遼西說(요서설)을 새로운 論旨(논지)로 주장하는 내용이 있었다. 樂浪君(낙랑군)의 立置(입치)는 古朝鮮(고조선)의 위치와 직결되는 것으로 韓國上古史(한국상고사)의 무대를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에 따라 古朝鮮(고조선)의 위치와 아울러 樂浪君(낙랑군)의 위치는 여러 先學(선학)들에 의하여 연구된 바 있으며 많은 論難(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歷史(역사)의 記錄(기록), 즉 史料(사료) 속에는 동일사건이나 사항에 대하여 서로 다른 記事(기사)가 존재하기도 한다. 樂浪郡(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 있다.
  어떤 사료는 낙랑군의 위치를 平壤(평양)일대로 명시하고 있으며 어떤 사료는 遼東(요동)이나 遼西(요서)일대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료의 규명에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역사의 연구에 역사학자라는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樂浪郡(낙랑군)의 위치가 平壤(평양)일대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에 속일 수 없는 증거들이 보이고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三國遺事(삼국유사)’에 郡(군)예하의 縣名(현명)들이 百濟(백제)·新羅(신라)의 인접지명으로 보이는 점이나, 中國正史(중국정사)의 韓半島(한반도)관계기사에 郡縣(군현)들에 대한 지리적 사항이 보이는 것 등은 일단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볼 수가 있다.
  이에 비해 낙랑군의 위치를 遼西一帶(요서일대)로 비정하는 데에 근거가 되는 사료들을 보면 遼西(요서)에 대한 명시라기보다는 추측과 他使料(타사료)와의 연결을 필요로 하는 내용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이에 本稿(본고)에서는 먼저 最近(최근) 遼西說(요서설)의 주요 맥락을 이루는 세 개의 樂浪論(낙랑론)을 비판하고 기존의 平壤說(평양설)의 근거를 보완해보고자 한다.
 

2. 3개의 樂浪論批判(낙랑론비판)

  최근의 遼西說(요서설)에서는 세 개의 서로 다른 樂浪(낙랑)을 상정하였다.
  첫째는 前漢(전한)의 武帝(무제)가 衛滿朝鮮(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遼洞(요동)서쪽에 설치했던 漢四郡(한사군)의 樂浪郡(낙랑군)이고, 둘째는 평양지역에 있었던 崔理(최리)의 樂浪國이며, 셋째는 崔理(최리)의 낙랑국이 멸망한 후 후한의 광무제가 그 지역을 치고 세운 군사기지로서의 낙랑이다. 최리의 낙랑군의 존재여부에 관한 검토를 중심으로 3개의 낙랑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최리의 낙랑국설정에 대한 근거를 살펴보자. ‘三國史記(삼국사기)’ 高句麗本紀 大武神王(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年條(연조)를 보면 ‘王子好童(왕자호동)이 沃沮(옥저)를 여행하였는데 낙랑왕 최리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 물어 말하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상인이 아닌데 혹시 북국 (고구려)의 神王(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드디어 함께 돌아가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최근의 遼西說(요서설)에서는 前漢(전한)과 後漢(후한)의 낙랑군과는 별개로 낙랑국을 상정하였다.
  이에 따라 平壤地域(평양지역)에는 두 개의 樂浪(낙랑)이 동일한 시간에 존재 할 수 없는바 자동적으로 漢四郡(한사군)의 樂浪郡(낙랑군)은 平壤地域(평양지역)에 있을 수 없고, 韓半島(한반도)밖의 遼西(요서)서부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또 同書 大武神王 20年條(동서 대무신왕 20년조)와 同書 新羅本紀 濡理尼師今 14年條(동서 신라본기 유리니사금 14년조)의 記事(기사)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 五天來投 分居六部(고구려왕무신 습낙랑멸지 기국인 오천내투 분거육부))를 인용하여 이 樂浪國(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筆者(필자)는 두 가지 論據(논거)에 의해 3個(개)의 樂浪(낙랑)은 같은 맥락에서 전개시켜야 된다는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첫째는 ‘三國史記(삼국사기)’의 筆法上(필법상)으로 樂浪郡(낙랑군)과 樂浪國(낙랑국) 그리고 樂浪(낙랑)의 명칭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新羅本紀 基臨尼師今 3年條(신라본기 기임니사금 3년조)를 보면 ‘3月(월)에 牛頭州(우두주)에 이르러 太白山(태백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니 樂浪(낙랑)·帶方 兩國(대방 양국)이 歸服(귀복)하였다.’ 至牛頭川 望祭太白山(지우두천 망제태백산) 樂浪(낙랑)·帶方(대방)이라는 명칭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이러한 筆法(필법)은 玄菟郡(도토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高句麗本紀 太神大王 59年條(고구려본기 태신대왕 59년조) 기사를 참조). 이리하여 ‘三國史記(삼국사기)에 樂浪國(낙랑국)이라는 명칭이 보인다고 해서 樂浪郡(낙랑군)과 별개로 樂浪國(낙랑국)을 상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둘째는 3개의 樂浪(낙랑)은 서로 동일한 지역에서 일정한 맥락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遼西說(요서설)의 내용에서는 前漢(전한)과 後漢(후한)의 樂浪(낙랑)을 동일지역으로 연결시키기에는 論理的(논리적)인 모순이 있다고 하였다. 즉 이미 자기들의 땅이 되어있는 漢西郡(한서군)의 樂浪郡(낙랑군)에 새로이 군사를 파견하여 그곳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군)·縣(현)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後漢 光武帝(후한 광무제)의 樂浪地域(낙랑지역)정벌이 있기 전의 樂浪郡(낙랑군)의 狀況(상황)을 살펴보면, 原住民 王調(원주민 왕조)가 반란을 일으켜 郡太守(군태수)를 살해하는 정도의 큰 혼란에 빠져 樂浪郡(낙랑군)은 中國本土(중국본토)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상황 이었다 (後漢書光武帝紀 建武 6年條(후한서광무제기 건무 6년조) 및 同書循吏列傳 王景條(동서순이열전 왕경조)참조). 즉 光武帝(광무제)의 원정은 반란진압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 최근의 遼西說(요서설) 내용 중에 崔理(최리)의 樂浪國(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하고 그 地域(지역)이 아직 高句麗(고구려)에 동화되기 전인 서기 44년에 後漢 光武帝(후한 광무제)의 樂浪遠征(낙랑원정)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三國史記(삼국사기)’ 高句麗(고구려)본기 大武神王 20年(대무신왕 20년)과 27年條(년조)의 기사에 依據(의거)한 것인데 이러한 年代設定(년대설정)에 무리가 있음도 밝히고자 한다. 中國史料(중국사료)에는 光武帝(광무제)의 樂浪遠征年代(낙랑원정연대)가 建武6年(건무 6년), 즉 서기30年(년)으로 일치되어 하나의 年代(년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中國(중국)이나 韓國側 史料中(한국측 사료중) 中國武帝 遠征年代(중국무제 원정연대)에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이때 中國史料(중국사료)를 저본으로 하여 ‘三國史記(삼국사기)’ ‘三國遺事(삼국유사)’가 만들어진 것을 고려할 때 後漢書(후한서)의 年代(년대)에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주의를 하고 볼 때 崔理(최리)의 樂浪國(낙랑국)이 서기 37년에 멸망하였다는 주장에 대한 문제점도 같이 발견이 된다. 첫째는 年代上(년대상)으로 崔理(최리)의 樂浪國(낙랑국)이 멸망한 시기에 의문이 간다. 光武帝(광무제)의 遠征年代(원정연대) (서기 30년)와 樂浪國(낙랑국)의 滅亡年代(멸망연대) (서기37년)와 비교할 때 平壤一帶(평양일대)에 두 개의 樂浪(낙랑)의 공존할 수 없는 바,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보이는 崔理(최리)의 樂浪國 滅亡年代(낙랑국 멸망연대)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둘째는 ‘三國史記(삼국사기)’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20년 (서기 37년) 條(조)에 보이는 後漢(후한)의 樂浪郡(낙랑군)이 서기 37년에 멸망하기 않은 것은 주지의 사실인바 그 이외의 지역에 樂浪國(낙랑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며 記事(기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과장된 표현에 문제가 있든지 同書 大武神王 27年條(동서 대무신왕 27년조)의 記事(기사)처럼 年代設定(년대설정)에 錯誤(착오)가 생긴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3個(개)의 樂浪論(낙랑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여러 모순들이 생긴다.


3. 平壤地域說(평양지역설)의 主要 根據(주요 근거)
 
  최근의 遼西說(요서설)에서도 3C초에서 4C초에 존재했던 帶方郡(대방군)이 韓半島(한반도)내에 위치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을 않고 있다. 필자는 먼저 帶方郡(대방군)의 위치를 확인한 후 시간을 역으로 거슬러 이를 통해 樂浪郡(낙랑군)의 위치를 고찰하고자 한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고구려본기 美川王(미천왕) 15년 9월條(조)를 보면 남으로 帶方郡(대방군)을 공격하였다 (南侵帶方郡(남침대방군)) 라고 하였으며, 同書百濟 責稽王 元年條(동서백제 책계왕 원년조)를 보면 高句麗(고구려)가 대방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라고 하였다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고구려벌대방 대방청구어아).
  즉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의 위치를 고려할 때 帶方郡(대방군)의 위치가 半島(반도) 중북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志 魏書 韓傳(삼국지 위서 한전)도 참조). 그리고 前漢(전한)·後漢(후한)·삼국시대에 이어 등장한 晋(진)의 역사서인 ‘晋書(진서)’ 地理志 帶方郡條(지리지 대방군조)를 보면 ‘帶方 列口 南新(대방 열구 남신) 장잠 제해 含資 海溟(함자 해명)’ 의 7개 縣名(현명)이 보인다. 아울러 ‘後漢書(후한서)’ 郡縣志 樂浪郡條(군현지 낙랑군조)를 보면 ‘朝鮮(조선) 왈한 패수 含資(함자) 점선 逐成 增地 帶方(측성 증지 대방) 사망 海冥 列口(해명 열구) 장잠 屯有 昭明(둔유 소명) 누방 제해 혼명’ 의 18개 縣名(현명)이 보인다. 이 때 帶方郡(대방군)이 後漢(후한)의 일을 알게 하는 자료가 된다.
  또한 ‘漢書(한서)’ 地理志 樂浪郡條(지리지 낙랑군조)를 보면 ‘朝鮮(조선 왈한 패수 含資(함자) 점선 逐成 增地 帶方(축성 증지 대방) 사망 海溟 列口 (해명 열구) 장잠 屯有 昭明(둔유 소명) 누방 제해 渾彌(혼미) 탄렬 동이 不而(불이) 아태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화려 사두매 전한 부조)’ 의 25個(개) 縣名(현명)이 있는데 上記(상기) 6개현명이 보인다. 이처럼 前漢(전한)·後漢(후한)·晋(진)의 3代(대)를 통해 동일 縣名(현명)이 보이는 것은 前(전)·後漢(후한)의 樂浪郡(낙랑군)과 晉(진)의 帶方郡(대방군)이 동일지역, 즉 韓半島 中北部(중북부)를 중심으로 변천하였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三國史記(삼국사기)’ 신라본기 基臨尼今 3年後 (기임니금 3년후)를 보면 ‘牛頭州(우두주)에 이르러 太白山(태백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니 樂浪(낙랑)·帶方(대방) 兩國(양국)이 歸服(귀복)하였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樂浪(낙랑), 帶方國(대방국)은 물론 樂浪郡(낙랑군)과 帶方郡(대방군)을 말하는데 이들이 신라와 인접한 지역에 있음을 알게한다. 同書 百濟本紀 (동서 백제본기) 분서왕 7年條(년조)를 보면 ‘春二月(춘이월)에 몰래 군사를 내어 낙랑의 서쪽현을 취하였다. 冬十月(동십월)에 王(왕)이 樂浪太守(낙랑태수)가 보낸 刺客(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春一月 잠사습 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薨(춘일월 잠사습 취낙랑서현 동십월 왕위낙랑태수소견자객적해훙)라 하였다. 여기서 만일 遼西(요서)로의 원정이었다면 地理上(지리상) 서쪽의 縣(현)을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三國志(삼국지)’ 魏書(위서)를 東夷傳(동이전)을 살펴보면 東沃沮(동옥저)와 濊(예)가 韓半島(한반도) 동쪽에 위치했음과 함께 동옥저와 예가 樂浪郡(낙랑군)의 영토 속으로 편입되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4.結論(결론)

  이상에서 漢四郡(한사군)의 樂浪郡(낙랑군)이 平壤一帶(평양일대)를 중심으로 韓半島(한반도)의 西北部(서북부)에 위치했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韓國歷史(한국역사)에 漢四郡(한사군)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歷史的 意味(역사적 의미)를 導出(도출)하고자 한다.
  서기전 108년과 107년 사이에 漢(한)의 西君(서군)이 설치된수 불과 26년 만에 眞番郡(진번군)과 臨屯郡(임둔군)이 韓民族 土着勢力(한민족 토착세력)의 압력으로 폐지되었으며 급기야는 현도군마저 韓半島(한반도)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韓半島(한반도)안에는 樂浪郡(낙랑군)만 남게 되었으며, 그나마 많은 수모를 겪으며 점점 위축·소멸되어 갔었다.
  이러한 漢西郡(한서군)의 설치와 소멸의 과정을 고찰해 볼 때 오히려  精氣(정기)어린 韓民族(한민족)의 鬪魂(투혼)을 느낄 수 있었다. 즉 우리 민족의 성역으로 들어왔다가 허둥지둥 쫓겨다니는 수모를 겪으면서 소멸된 異質勢力(이질세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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