産業化屍臺(산업화시대)에 있어서 佛敎(불교)의 기능

[당선소감] 윤근길 <經大院 經營科(경대원 경영과)>

  본교로부터 연락받은 경주대학 기자의 갑작스런 入選所感(입선소감)부탁에 순간적으로 당혹한 느낌이 들었다. 글을 쓸 때는 몇일동안 밤을 새우면서 썼고 가까스로 마감기일을 앞두고 제출하였는데 그 뒤의 결과는 기대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선의 소감을 미리 생각해두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은 기쁘다. 晩學(만학)이라할 수 있는 不或(불혹)의 나이에도 젊은 學徒(학도)들과 더불어 現想(현상)과 現實(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토론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위안 때문이고, 젊음과 패기가 넘치는 知性(지성)의 광장에 참여한 느낌으로서 이다.
  우리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면 지나친 산업문명에 의한 非人間化(비인간화), 人間(인간)소외라 하겠다.
  人間(인간)과 人間(인간), 人間(인간)과 自然(자연)의 交流(교류)는 도시에서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없는 것처럼,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다.
  경제성장과 도시발전이 진행되면서 동시에 따뜻한 가족과의 대화가 있는 가정과 인정이 흐르고 법과 질서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깨뜨려지지 않는 신뢰의 사회가 될 수 없는지, 그리고 사회정의와 이익균등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國土統一(국토통일)의 단합된 힘을 축적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달성 등은 나의 평소, 연구과제이며 心的(심적)갈등의 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外來文物(외래문물)과 宗敎(종교)의 지혜스러운 受容(수용) 못지않게 전통문화와 종교의 계승, 발전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어느 한 가지라도 인위적인 붕괴와 배증은 정신적 調和(조화) 물질적 均衡(균형)을 깨는 要因(요인)이 될 것이므로.
  변변치 못한 所見(소견)의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교수님들께 감사드리며 本校(본교)의 창조적인 발전을 부처님전에 기원한다.


Ⅰ.序論(서론)

  우리사회가 단순한 農耕社會(농경사회)에서 복합사회로 전환된 것은 불과 二十(이십)여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다. 서구에서 1~2백년 걸려서 전환 되었던 것이 우리의 경우 극히 짧은 기간에 이행이 됨으로써 경이로운 찬탄과 성취감의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移行(이행)속도가 완만한 것이 아닌 매우 경사가 급한 것이므로 이에 따르는 부작용과 충격도 매우 커서 심각한 사회문제를 유발함은 필연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컨대 기성세대에 있어서는 아직도 전통적 윤리관이나 가치관에 매여 있는데 반해 현실적 구조는 그렇지 못해 적응하기가 어렵게 되어있으며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한 채 갈등과 방황의 늪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곧 사회적 혼란과 침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사회의 당면한 여러 문제점들을 철저히 올바르게 인식하고 진단하는 일이 先行(선행)되어야 하며 이에 따라 적절한 처방이 필요하리라 본다.
  그리고 佛敎(불교)는 이 사회에서 무엇을 어떻게 베풀어 줄 수 있고 그 기능과 역할이 가능할 것인가가 초점이 되어야 하며 무엇을 왜? 라는 의문이 먼저 제기되어야만 어떻게 라는 해결책의 당위성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産業化(산업화)시대라 해서 그냥 경제 또는 기술적인 분야만 가지고는 성립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관련분야의 접촉과 영향으로 하나의 사회가 유지, 발전되는 것이므로 편의상 몇 가지로 분류해서 파악해 보고 그에 대한 불교적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Ⅱ. 本論(본론)

  1. 現代産業社會(현대산업사회)의 特性(특성)

  사회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산업사회의 특징을 다음 네 가지로 구분된다.

    (1) 技術(기술)(Technology)

  산업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기술우선시대로서 단순히 기계를 중심으로 한 육체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단순기술시대를 一次産業(일차산업)시대라 하며 기계와 전자산업에 의한 복합기술의 시대를 二次産業(이차산업)시대라 한다. 그리고 정보혁명의 전자기술과 光通信(광통신), 유전공학 등의 기술혁신과 더불어 곧 우주산업시대로 연결되는 3차, 4차 산업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직까지 단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一次産業(일차산업)에 머물러 있고 전자와 기계의 二次産業(이차산업)에는 아직 성숙되지 못하고 있으며 三次産業(삼차산업)은 연구, 개발 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술이라고 할 때 반드시 기계산업기술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이것을 조작하고 개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두뇌 및 정신이므로 경영, 관리기술이라던지 더 나아가서 최종결정을 내리는 정책적 뒷받침을 요하는 정치적기술도 포함된다 하겠다.

    (2)조직(Organization)

  현대산업사회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는 조직과 기구라 한다.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느 독립된 한 개인은 무력하나 조직은 강력한 힘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단순노동의 농경시대가 아닌 복합노동인 물질산업시대의 특징이다. 싫던좋던간에 현대인은 어느 집단, 조직에 속해 적응해 가야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生存(생존)이 가능하게 되었다. 집단과 조직이 물량가치화 되고 기계와 전자기술의 직접·간접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현대에 있어서의 조직은 뚜렷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3)환경(Environment)

  인간이 아무리 과학기술을 개발하여 혁신적인 생활방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人間生命(인간생명)이 존재하고 또 이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주위 환경이다. 작게는 개인의 住居(주거)환경 직업환경이 있으며 크게는 국가적 사회적환경의 人爲(인위)적환경이 포함된다. 특히 자연환경은 가장 중요한 환경이라 하겠다. 환경에는 물질적환경과 정신적환경으로 나눌 수 있고 人爲(인위)적 환경과 自然(자연)적환경으로 나눌 수 있다. 生存(생존)에 필요한 衣(의)·食(식)·住(주)같은 것은 물질적 人爲(인위)적환경 이라 할 것이고 정치·사회·문화 같은 것은 정신적인 환경이 더 우선 한다고 본다. 그리고 人爲(인위)적 환경은 人工的(인공적)으로 얼마던지 바꿀 수 있지만 자연환경은 만들지 못하므로 최대한 파괴하거나 汚損(오손)시키는 일이 없이 적극 보호하여야한다. 人爲(인위)적으로 자연환경을 파괴함으로 生態界(생태계)에서도 변화가 오며 그것이 끝내는 생명유지에 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바다.

    (4) 인구 (Population)

  물질의 풍요와 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많이 연장됨으로써 세계는 지금 폭발적 인구문제로 시련을 겪고 있다. 더욱이 공산권을 제외하고는 自由(자유), 民主資本主義(민주자본주의)시대를 맞고 있으므로 민중의 권리나 발언권도 숫자만큼이나 드높아져 가고 있다. 어떤 체제나 제도에 얽매임이 없이 당당히 자기의 권익을 주장하거나 내세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人間回復(인간회복)의 길인지 모른다. 어떤 카리스마적인 神(신)이나 그것을 빙자한 人間(인간) 그리고 體制(체제)에 맹종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인간답게 살려는 意志(의지)는 當爲性(당위성)을 띤 것이며 또한 産業社會(산업사회)의 한 特性(특성)이라 할 수 있다.

  2. 産業(산업)시대의 문제와 佛敎(불교)의 역할
 
    (1) 生命尊重(생명존중)사상의 확립

  물질산업사회의 전환으로 우리사회는 급격히 의식구조가 변화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부정적인 변화가 있다면 생명의 경시풍조가 아닌가한다.
  우리 先祖(선조)들의 전통적 가치관의 하나였던 生命畏敎思想(생명외교사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도, 뜨거운 물을 그냥 버리면 죽을까 염려해서 식혀서 버렸던 佛家(불가)의 생명존중사상은 간데없고 사람의 목숨에서 다른 동물까지 무차별 살상하는가 하면 대기오염과 공장폐수로 사람과 자연이 병들고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좋은 표어로서 인상 깊었던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는 구호에만 그친 느낌이다. 인간 정신의 황폐화가 진행되고 있고, 이에 따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사회에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동·식물뿐만 아니라 山河大地(산하대지)도 사랑할 수 없게 되며 끝내는 자연환경마저 파괴하게 된다.
  생명자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이 산업시대의 과업인바, 정치와 종교계가 담당하여야 하며 특히 생명존중사상의 뿌리인 佛敎(불교)가 자비의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一切衆生(일체중생)이 皆有不生(개유불생)이라는 思想(사상)은 人間(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해주는 가르침이지만, 동시에 일절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생명존중의 극치이다. 죽은 것 같이 보이는 化石(화석)이나 無生物(무생물)일지라도 언젠가 오랜 세월이 흘러 생존의 조건이 주어지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의 테임즈江(강)이 산업혁명으로 오염되어 죽은 江(강)이 되었는데 1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는 다시 물고기와 식물이 살아나고 맑은 물이 되어 배를 띄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와 시민의 줄기찬 노력 덕분이다.
  또 중금속에 오염된 땅이라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 다시 좋은 땅과 흙이 될 수 있으며, 용암이 폭발하여 화산재로 덮힌 山下(산하)일지라도 수천, 수만 년이 지나면, 생물이 살 수 있는 땅이 된다고 자연과학에서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모든 것은 佛敎(불교)에서의 輪廻思想(윤회사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2)가치관의 정립

  우리는 전통적 가치관을 저버렸거나 망각한지 오래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산업화시대의 새 가치관을 지니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바야흐로 가치관의 혼돈시대를 맞고 있다. 顚倒(전도)된 가치관은 沙上樓閣(사상누각)과 같아서 언제 허물어 질줄 몰라 항상 불안하다. 너와 나를 믿지 못하고 이웃과 사회를 믿지 못하며 국가와 法律(법률)까지도 믿지 못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삶의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는 사회라고 보는가, 원리원칙이 지켜지고 있는가. 국민대다수 개개인의 생활철학이 굳건히 서있는가를 냉철히 성찰하여야 한다. 국가민족의 힘찬 기상을 위해서는 올바르고 밝은 면은 크게 신장되어야 하나, 산업화시대에 맞지 않는 부정적인 측면은 철저히 가려져야 할 것이다. 철저한 부정은 철저한 긍정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요, 원리인 것이다.
  부정과 비판을 싫어하는 지도층과 국민이 있다면 나약한 성향으로 흐르기 쉬우므로 긍정의 영광된 삶 또한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가치관의 정립에는 정치적인 것도 있고 경제적·사회윤리적인 것도 있으며 종교·문화·교육적인 가치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공통된 원리는 다 한가지인 것이다. 진실이며 사랑이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주자연의 법리를 들고 있다. 우주자연이 생성·변화해 가는 것은 외재적 법이요, 국가사회가 어떤 일정한 규범을 세워서 서로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조화해 나가며 인간의 마음에는 누구에게나 참되고 지혜스러운 마음 (佛性眞如(불성진여))이 있어 진선미의 덕목을 추구해 나가고저 하는 것을 내재적 법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와 자연의 원리이며 사회와 인간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산업사회라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불변의 가치관과 능변의 가치관을 자각케 한다.

    (3) 佛敎(불교)의 정치적 기능

  佛敎(불교)는 원래 인도의 차별적 四姓(사성)계급의 타파를 위해서 일어난 현실종교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신문이나 계급이 정해진 운명론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나는 것이며 그 인격과 행위로 말미암아 貴人(귀인)도 될 수 있고 賤民(천민)도 될 수 있다는 후천적운명론인 것이다. 또 사람뿐 아니라 모든 만물이 佛性(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一切萬物 皆有佛性(일체만물 개유불성)의 사상이 핵심적인 골격이다. 이는 어느 종교, 사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佛敎(불교)특유의 사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던지, 神(신)이 인간을, 체재와 조직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非佛敎的(비불교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佛敎(불교)의 자비, 평등사상은 빈부, 귀천, 권력자, 피지배자의 구분을 처음부터 정하지 않으며 있다면 지도자가 국민을, 권력자가 피지배자를 다스릴 때 물리적인 힘이나 폭력으로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은 佛敎(불교)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지배자나 권력자가 자비와 평등의 정신으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고 사랑을 베풀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보살행을 실현하는 지도자라고 하며 正法(정법)에 입각한 지도자라 하여 칭송하는 것이다. 그런데 올바른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탐욕심을 自制(자제)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대중을 위해 봉사, 헌신을 아끼지 않으며 국민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拔苦與樂(발고여락)의 지도자여야 한다. 또, 지도자는 평화를 사랑하고 자비스러운 덕성을 지녀서 어버이가 자식을 돌보듯이 항상 온화한 얼굴과 마음으로 대해야 하며, 瞋恙心(진양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본다.
  지도자가 자주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수양부족과 덕망에도 결여가 되겠지만 권력을 무분별하게 행사함으로써 국민대중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독일의 나치스와 군국주의 때의 일본 그리고 과거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는 확고한 통치철학과 신념이 확실해야 할 것이다. 자신감이 없다던지 좋지못한 자만심은 모두 우치함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감이 넘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당황하고 불안하게 되어 중대한 일을 그르치게 되는데 이것은 자신과 용기가 없는 소치이다. 봉건사회가 아닌 현대산업사회에서는 특히 부적당한 지도자의 상인 것이다.

    (4) 경제 및 경영적 기능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암이라 규정했다. 니이체는 종교를 가리켜 아편이라 했는데, 육체노동이 아닌 정신노동에 의한 불로소득이라함은 타당치않다. 현대와 같은 전자산업시대에 있어서는 두뇌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마르크스가 오늘에 와본다면 크게 틀린 말인 줄 깨닫게 될 것이다. 자가도취적이고 광신적인 유태계 종교에서는 아편같다는 말이 해당될지 모르나 동양종교에서는 전혀 그런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다. 특히 불교에서는 空(공)과 假有(가유) (無(무)와 有(유))의 존재론과 이의 상호모순점을 해결하기위한 中道論(중도론)의 철학적 체계가 있으므로 外存的神(외존적신)이나 물질, 인간관계에 현혹, 집착하는 것은 正道(정도)라 보지 않으며 경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佛敎(불교)는 흔히 비현실적종교이며 경제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종교라 알고 있는데 사실은 큰 오류인 것이다. 심은 만큼,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 因果法則(인과법칙)은 經濟倫理(경제윤리)가 될 수 있으며 百年禪師(백년선사)의 一日不作(일일불작) 一日不食(일일불식)의 禪佛敎精神(선불교정신)은 현대의 훌륭한 노동윤리가 될 수 있다.
  佛敎(불교)의 究竟(구경)목적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아실현과 인격완성의 成佛(성불)에 있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지상에 佛國士(불국사)를 건설하는 일이다. 정신이 빈곤한데 물질만 풍부해서는 개인의 자아와 사회적 평화가 이룩될 수 없고 정신세계가 풍요하더라도 물질이 빈곤해서는 또한 현세적 삶을 충실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정신과 물질의 조화가 균등히 이루어진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는데 곧 物心不二(물심불이)이며 色空不異(색공불이)의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이상이 成佛(성불)과 地上淨土(지상정토)를 이룩함에 있다 하지만 세상사람 모두가 이를 위해서 출가수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세상에 살면서 成佛로 향할 길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金剛經에 이르기를 一切法皆是佛法(일체법개시불법)이라 했다.
  올바른 佛敎(불교)의 정신에만 투철하면 모든 法(법)이 成佛(성불)에 이르는 길이므로 때와 장소, 직업, 신분에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교정신을 계승하여 定着(정착)된 곳은 우리나라가 아닌 日本(일본)이다. 우리나라는 儒敎(유교)의 對建社會倫理(대건사회윤리) 때문에 佛敎(불교)의 自由經濟倫理(자유경제윤리)가 설자리를 잃었던 점이다. 日本(일본)에서는 어떻게 佛敎(불교)의 社會經濟倫理(사회경제윤리)가 전개 되었는가 四百(사백)여년 전의 禪宗(선종)승려였으며 社會思想家(사회사상가)였던 鈴木正三(영목정삼)에 依(의)하면, 농민이 밭을 갈고 곡식을 심어 거두는 것 자체가 修道(수도)로서 成佛(성불)로 나아가는 길이라 한다.
  또한 匠人(장인)(工業(공업))이 열심히 망치를 휘두르고 제품을 생산해 내면 물건이 풍요해져서 세상을 위하는 길이 되는데 이것도 부처님의 길이며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佛性(불성)을 갖추게 된다 한다. 장사하는 商人(상인)이 두루 다니면서 수요와 공급 사이를 연결해 주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을 편리하고 자유롭게 해주는 공덕을 베푸는 동시에 스스로 成佛(성불)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그의 사상인 禪宗社會倫理(선종사회윤리)라 할 수 있는 이유며 그 기초가 되는 것은 組織禪學(조직선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령 상인이 어떤 이윤을 남겼다 해서 그것으로 만족하거나 이윤자체에만 탐닉한다면 그 사람은 有漏善(유루선)에 빠지게 되어 成佛(성불)의 길에 중도 탈락하고 만다는 점이다. 즉 결과로서 이윤은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복덕을 얻었다 해서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타락하기 쉽고 반드시 악의 길에 들어가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無漏善(무루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儒家(유가)에도 盡人事, 待天命(진인사, 대천명)의 心境(심경)을 가꾸라는 말이 있으나 有漏善, 無漏善(유루선, 무루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메이커가 물건을 생산해 내는 것도 부처님의 분신으로서 세계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다. 세일즈맨은 순례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모두가, 이로써 貪瞋痴(탐진치)의 三毒心(삼독심)에서 해방되어 成佛하기 위해서이다. (山本坪著(산본평저)·日本(일본)자본주의의 정신에서) 成佛(성불)로 나아가는 길이므로 자기의 일시적 이익을 위해서 양심을 속인다거나, 제품을 잘못 만드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일본자본주의의 바탕에는 선불교의 정신이 깔려져 있으며 불교적 윤리가 사회윤리로 전용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우리나라와는 너무 대조적이며 우리는 지금도 비불교적 사회 윤리속에서 살고 있음이 명확해진다.

    (5) 사회, 교육적 기능

  불교는 넓은 의미에서 특정종교만 아니라, 인간교육학이라 할 수 있다. 우선기본계율인 五戒(오계)만 보더라도 어떤 종교적인 색채가 거의 없다. 不殺生戒(불살생계)는 인간과 자연생명의 기본질서인 자연윤리를 밝힌 것이고, 不倫盜戒(불윤도계)는 경제윤리를 뜻하는 것이며, 不妄誤戒(불망오계)는 사회윤리를 천명한 것이고 不邪淫戒(불사음계)는 家庭倫理(가정윤리)를 밝힌 것이다.
  人間(인간)과 社會(사회)의 죄악과 부조리는 三毒心(삼독심)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간단명료하면서 함축성이 깊은 것이어서 놀랍고 위대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六波羅密(육파라밀)과 八正道(팔정도)는 인간이 행복과 지혜로 이르는 길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華嚴(화엄) 法華經(법화경)의 敎說(교설)은 어떻게 개인의 해탈(구원)과 사회의 淨土化(정토화)가 가능 한지를 밀도 있게 실증해 보이고 있다. 교육이나 사회학이 지향하는 바는 한 개인의 훌륭한 인격도야를 통하여 행복한 인간이 되게 하고 그러한 개개인의 인간이 한 사회를 이룰 때 평화스럽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되기를 목적함에 있어서 방법과 차원의 문제만 다를 뿐 불교의 이념이나 목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Ⅲ. 結論(결론)

  (1) 産業化(산업화)시대라 해서 佛敎(불교)의 기능이나 역할은 근본정신에 있어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사회는 갈수록 多邊化(다변화), 細分化(세분화) 해지고 있으므로 佛敎(불교)의 기능도 정신만 가지고는 부족하며 다양하게 응용되어야 할 것이다.

  (2)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적 에너지를 부여함
  어떤 人間(인간)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三毒心(삼독심)을 제거하고 六波羅密(육파라밀)이나 八正道(팔정도)의 정신으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자신의 꿈과 이상을 성취할 수 있다는 무한한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정신적 지도자나 사상가가 많이 나와야 하며 특히 佛敎倫理(불교윤리)가 社會(사회)에서 活性化(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3)人材養性制度(인재양성제도)의 개혁화
  다른 국가사회에 비해서 우리사회는 옛날부터 人材養性(인재양성)을 소홀히 해왔다. 百年大計(백년대계)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교육정책이 실현되어 본 일이 없음을 통감한다.
  하나의 人材(인재)를 양성하는데는 개인과 단체, 국가가 모두 合心(합심)해서 뒷받침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과 어느 집단의 名利(명리)를 위해서 인재를 키운 일은 가끔 있으나 국가차원에서 진정으로 인재를 양성한 적이 없었다. 지난날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이다. 佛敎(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宗團次元(종단차원)에서 또는 국가차원에서 佛敎(불교)가 育成(육성)되어야 하며 人材(인재)가 배출되어야 한다. 옛날 禪師(선사)들은 국가를 위하는 길이 佛法(불법)을 위하는 길이고 佛法(불법)을 위하는 길은 국가를 위하 는길로 不異法(불이법)을 깨달아 행했다. 衆生(중생)이 없는 곳에 부처가 있으며 人間(인간)이 없는 곳에 神(신)이 존재할 것인가. 부처는 衆生(중생)을 위해서 있고 神(신)은 人間(인간)을 위해서 있다할 것이다.

  (4) 經濟倫理(경제윤리)의 확립
  한국경제는 高度成長(고도성장)의 政策(정책)으로 경제성장이 뚜렷하며 앞으로도 계속 성장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고도성장의 와중에서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앓고 있다. 특혜금융의 대기업편중, 대기업에의 한 중소기업분야의 침투와 잠식, 대도시, 경제편중으로 인한 도시인구집중화 富益富, 貧益貧(부익부, 빈익빈)으로 표현되는 소득불균형은 사회적 不公正(불공정)과 갖은 사회적 病理現狀(병리현상)을 낳고 말았다. 그리고 절제없는 소비문화는 퇴폐적 풍조를 조장할 뿐 아니라 날로 심각해 가는 청소년범죄의 요인이 되고 있다. 정치는 통제와 긴축경제를 固守(고수)할 것이 아니고 국민이 간섭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일해서 소득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자유경제정책을 펴야한다.
  불교의 무누선, 무누복의 철학은 物神(물신)숭배적 메카니즘을 탈피할 수 있는 경제윤리이며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賤民資本主義(천민자본주의)를 淸富資本主義(청부자본주의)로 바꿀 수 있는 탁월한 처방이 될 것이다.

  (5)國民精神力(국민정신력)의 約化(약화)
  토인비에 의하면 미래에 인류가 스스로 만든 과학문명에 멸망되지 않으려면 인간을 포함한 자연전체가 가지는 존엄성과 신성함에 대하여 경건한 마음을 가지는 종교나 사상이 아니면 안된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인류의 장래를 그르치게 하는 것은 인간이외의 자연을 희생하여 인간자신의 탐욕심을 만족시키는 일을 허용하는 종교라고 갈파했다.
  인간이외의 생명이나 자연을 지배해도 좋다는 사상은 주로 一神敎(일신교)적인 기독교계통의 사상이나 唯物(유물)공산주의자들의 생각이다. 불교나 동양정신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양자의 조화를 가르친다. 곧 자연합일과 無爲自然思想(무위자연사상)이다. 따라서 대부분 산림에 위치해 있는 사찰은 산업시대의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安心立命(안심입명)을 주는데 十分活用(십분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공해, 청정채소, 과일, 식품류, 약초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여 세간에 베푼다면 사찰경제와 포교활동에 새로운 章(장)을 열게 될 것이며 국민보건향상에 큰 몫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국민정신력을 집약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대도장과 구심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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