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革命(혁명)의 再照明(재조명)

[당선소감] 조종춘 (경상대 경영학과)

  ‘歷史 硏究(역사 연구)’의 저자인 A. Toynbee敎授(교수)가 年前(년전) 한국에 대하여 역사총량이 큰 나라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험난하고 변화무쌍한 역사의 격류 속을 반만년 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헤쳐 온 民族(민족)이기에 세계 어느 국가나 민족도 필적하지 못할만큼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4·19학생혁명은 획기적으로 우리역사의 總量(총량)을 더해준 한 도막이라 할 것이다.
  앞으로도 변화난측한 時代(시대)에 우리 민족이 넘어야 할 山(산)은 첩첩이다. 4·19精神(정신)에의 진정한 접근은 앞으로의 험준한 山(산)을 넘는 豫知(예지)를 주리라 생각된다.
  24개 星霜(성상)이 흐르는 동안 각계 수많은 사람에 의하여 수없이 되뇌어진 일에 대하여  匹夫(필부)에 불과한 내가 새삼 무엇을 쓸 수 있을까 몹시 망설였다. 그렇지만 信念(신념)을 담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고 무딘 펜에 힘을 주었다. 심사를 맡아주신 교수님들에게 감사드리며 脫稿(탈고)하기까지 격려해준 경영학연구실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Ⅰ.序言(서언)

  한국 민주사의 한 분수령을 이루었던 4·19 학생혁명이 올해로서 24돌을 맞이한다. 순수하게 민주를 수호하고자 하는 선구자적 지성으로 일어선 그날의 의의를 재조명해 보는 것은 아직도 수많은 민족적 과제를 앞에 둔 오늘의 시점에서 가치있는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1919년의 3·1운동이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전형이었다고 한다면 4·19는 실추된 민주주의를 재건하기 위한 당위적 요구의 민주주의 재건운동이었다 할 것이다.
  그날이 역사의 장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명목상으로 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4·19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금자탑을 피로써 쌓아 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민족과 사상이 빈번히 유린되고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이 상존하며 국가와 민족의 存立(존립)에 대한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증대해가는 현시점에서 4·19혁명과 관련한 학생운동의 일반적 성격과 유형, 4·19 학생혁명의 성과 등을 분석해 봄으로써 역사 속을 흐르는 그날의 의의를 再照明(재조명)해 보고자한다.
 
Ⅱ. 4·19혁명의 時代的 背景(시대적 배경)

  역사를 구성하는 모든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 시대에 그 발생의 근거를 두고 있다. 즉 그 시대를 배경으로 산출되는 時代的 所産(시대적 소산)이라 할 것이다.
  민주헌정사의 획기적인 脈(맥)을 그었던 4·19혁명 역시 당시의 현상, 상황적여건등에 의하여 그 발기를 유혹받고 있었다.
  ‘動物(동물)과 人間(인간)이 慾望(욕망)에 있어서 다른 점은, 동물은 만족하면 행동을 중지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것이라는 점이다. 무한한인간의 욕망 중에는 권력과 명예욕도 있다. 대개 명예는 권력에 따르는 것으로 권력욕은 인간의 욕망가운데 최고의 것이다.’
  (Bertrand Russell)이 권력욕망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이와같이 권력욕을 인간의 욕망가운데 최고의 위치에 놓는 이유는 정치권력이야말로 자신의 의지를 萬人(만인)에게 펼 수 있는 첩경이 되며 동시에 경제적,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通路(통로)가 되기 때문이라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번집권의 權座(권좌)에 들어선 者(자)는 그 權座(권좌)에서의 후퇴를 싫어한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후 급변하는 세계의 변환 속에서 갓 깨어난 卵生(난생)처럼 모든 것에 未熱(미열)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우리의 民主史(민주사)는 혹독한 유린을 피할 수 없었으니 그것은 언급한 바와 같은, 극렬한 權力欲(권력욕)의 소유자들에 의해 빚어진 부작용이라 할 것이다. 4·19 혁명은, 바로 그와 같은 심리적 소유자들이며 무리한 집권연장책으로 不正選擧(부정선거)를 통하여 영구적 獨裁體制(독재체제)를 획책했던 집권층에 정면으로 항거한 사건이었다고 할 것이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의 정치인들은 천성적인 권력욕망이라는 보편적 心理(심리)와 함께 自身(자신)들의 집권기간에 있었던 온갖 부정부패의 책임을 은폐해 보려는 의도에서도 집권을 연장하려했다고 볼 수 있다. 이의 현실적 극단화가 바로 4·19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던 3·15부정선거였다 할 것이다.
  한국동란이후 이들은 특혜를 받아 성장한 신흥재벌들과 결탁하여 不正蓄財(부정축재)를 자행함으로써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반하여 대다수 국민들은 생계비에도 절대 미달되는 수입으로 호구지책에도 힘겨웠을뿐더러 絶對農家(절대농가)와 失業者(실업자)의 증가로 사회적, 경제적 불안은 증대되었고 온갖 범죄가 창궐하였다. 그와같은 경제적, 사회적 불안의 증가는 국민의 감정을 자극시키고 그것은 곧 정치적 감각의 성장으로 이어져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의 소리로 露呈(노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집권층은 경찰력을 강화시켜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이용하므로써 경찰을 그들의 私兵集團化(사병집단화)로 변신시켰다. 그뿐 아니라 국민의 정치의욕을 성장시키고 社會正義意識(사회정의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힘써온 언론기관을 탄압하므로써 집권층에 暗雲(암운)을 자초케 하였으며 해방 후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학습해온 교육자와 학생들이 교육장에서 경험한 이론과 사회적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회의감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이것이 행동적 비판세력으로 성장하자 집권층은 학원마저 탄압하기에 이르러 급기야 사태를 급진전시켰다고 할 것이다.
  이와같이 4·19혁명 이전에 革命的 要素(혁명적 요소)는 이미 充滿(충만)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떤 혁명이건 간에 그와같은 요소들이 충만되어 있다 할지라도 어떤 획기적인 促進的(촉진적) 요소가 없는 상태에서는 革命(혁명)의 태동은 不可能(불가능)하다. 4·19혁명전후에 획기적 변화의 촉진적요소가 바로 학생계층이었음은 4·19혁명 당시의 前後 事態정況(전후 사태분황)으로 보아 明白(명백)한 것이라 할 것이다. 4·19라는 年代期的(연대기적) 명칭에 학생이라 명칭이 당위적으로 附加(부가)되는 理由(이유)가 거기에 있다 할 것이다.
  以上(이상)에서 論(논)한 4·19의 發端背景(발단배경)에 對(대)하여 그 深層的(심층적) 포괄적 이해를 企(기)하기 위해서는 4·19혁명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학생운동의 性格(성격)과 그 類型(유형)을 이해함이 필요하다.

Ⅲ, 4·19혁명과 學生運動(학생운동)의 性格(성격)

  먼저 학생이라는 階層(계층)의 特質(특질)을 考察(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할 것이다.
  ‘靑少年(청소년)은 신체적 성장기로서 性的好氣心(성적호기심), 虛飾(허식)에의 關心(관심)이 커지고 사회적으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强(강)하고 精神的(정신적)인 不安(불안)에서 오는 현실과의 충돌이 잦고 否定(부정)의 論理(논리)를 展開(전개)하며 妥協(타협)을 싫어하는 때이다’ 이라는 보편적 定義(정의)가 있듯이 학생역시 靑少年(청소년)의 特質(특질)범위에 포함되는 年齡層(연령층)이다. 따라서 청소년기는 內的(내적) 세계에 눈을 뜨는 自我(자아)의 발견시기이며, 否定的(부정적)제2의 反抗期(반항기)를 맞이하는 때이다. 그러므로 旣存秩序(기존질서)에 복종하기 보다는 비판하여 合理的(합리적)인 것에만 복종하려하고 打算的(타산적) 思考方式(사고방식)에 對(대)해서는 증오감을 느끼는 때이며 정치적 관심도가 높아짐에 따라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은 革新的(혁신적)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학생은 또한 청소년기에 보편적 특질외에 학생이라는 계층적 特殊性(특수성)을 아울러 지님으로써 또다른 특성을 갖게 되는데, 첫째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 학생은 진리탐구를 本分(본분)으로 하는 특수신분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따라서 학생은 아직 기성의 현실 사회에 덜 물들은 청신한 人格(인격)과 학술적 경험에 의한 순수 지성의 人格(인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때문에 權力(권력)이나 金力(금력), 부정과 부패 등 정의롭지못한 事態進展(사태진전)에 거부적이라 心性(심성)을 갖고 있다.
  둘째로 학생은 청신한 학술적 경험의 토대위에 청소년기의 순수한 저항적 特質(특질)까지 내포함으로써 기성의 지식계층의 비실천성, 비활동성을 가지는데 反(반)하여 理想主義的(이상주의적)사고를 가지며 불합리한 현실문제에 반응이 빠르고 비판적 경향이 강하여 곧 實行(실행)으로 옮기고자 하는 實踐(실천)적 패기가 넘치고 긍지나 지성적 자세가 강하게 나타난다.
  때문에 만일 이상과 현실이 부합되지 않을 때에 결국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돌파구적 의지가 발현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의지의 행동적 표현이 바로 학생운동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할 것이다.
  이러한 학생운동에 학생들의 제반활동영역이 반영되어 그 시대, 그 사회의 배경과 특수성에 의하여 여러 형태와 방법으로 나타난다.
  학생운동을 광의적으로 볼 때 정치문제를 위시하여 각종 써클(Circle)활동, 농어촌 계몽운동, 각종의 봉사활동 등이 포함된다. 협의적으로 볼 때는 정치적인 색채가 주로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4·19혁명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색채가 뚜렷한 학생운동의 전형적 예라 할 것이다.
  19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났던 학생운동은 후진국가에서 빈번히 발생되었다. 그 이유는 후진국가에서 불합리한 사회적 현상이 빈발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비단 후진국가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1960년대는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이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였다. 소위 ‘스튜던트 파워’ (Student Power)의 시대라고 불렀을만큼 빈발하였다.
  구미각국에서 인종문제, 반전사상 등으로 일어났었는가 하면 일본에서도 반전사상이 미·일 안보조약과 관련하여 크게 일어났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학생운동의 양상을 비교해 볼 때 발생원인의 공통점이 두 가지로 발견되고 있다.
  그 하나는 內的 要因(내적 요인)이라 할수 있는 것으로 학생 자체의 氣質面(기질면)에서 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外的 要因(외적 요인)으로 그 사회의 배경과 特殊性(특수성)에 刺戟(자극)되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要因(요인)이 융합되어질 때 대체로 학생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은 과거에 대한 批判(비판)과 現實(현실)에 대한 不滿(불만)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학생운동은 국가, 사회가 指向(지향)해야 할 보다 나은 方案(방안)을 제시해주는 創造的 活動(창조적 활동)의 일환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학생의 思想(사상) 傾向(경향)은 다분히 未來的(미래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대개 그 나라와 그 사회의 특수한 관계에 따라서 혹은 統一運動(통일운동), 혹은 自主入憲運動(자주입헌운동), 社會主義(사회주의), 民族主義(민족주의), 反帝國主義(반제국주의), 文化主義(문화주의)등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학생운동에 있어서 看過(간과)해서는 아니 될 모든 나라 학생운동의 공통적 특징은 그 방향이 결코 利己主義的(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며 언제나 輿論(여론)의 喚起者(환기자)이고 理想主義的(이상주의적)이며, 自律的(자율적)이며, 能動的(능동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이는 학생운동의 가장 核心的 性格(핵심적 성격)이요, 그 存在(존재)를 認定(인정)받을 수 있는 절대 요인이라 할 것이다.
  만일 能動的(능동적), 自律的(자율적)이 아니라면 그 것은 벌써 학생운동의 형태로 발전될 수 없다. 바로 이 能動的(능동적), 自律的(자율적) 때문에 推進力(추진력)이 강하고 社會(사회)를 크게 喚起(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아직 사회나 政治(정치)의 權力(권력)을 承繼(승계)할만한 태세는 갖추지 못한 미숙한 상태이기 때문에 학생이지만 이런 성격으로 해서 언제나 또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潛在性(잠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전술한 바와 같은 학생운동의 성격이 어떻게 형태 지어졌는지 고찰해본다.

Ⅳ. 4·19혁명과 學生運動(학생운동)의 類型(유형)

  학생운동이 앞서 논한 대로 자기본업인 학업 이외의 정치·사회·문화 등 다방면에서 행하는 학생 자체의 일정한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유형은 대단히 다양하다 할 것이다.
  대체로 현대의 학생운동은 세 가지로 대별한다. 즉 첫째로 선진국형 둘째로 후진국형, 셋째로 공산권형이다.
  1960년대 학생운동을 개략적으로 분석해보면 선진국형은 미국·서독·일본 등에서 전개되었던 것으로 경제적 요인이라든가 사회적 윤리의 부패문제보다는 인종문제·반전사상 등의 사회문제가 주된 쟁점이 되었다.
  반면에 越南(월남)·泰國(태국)·터어키 등에서 전개된 후진국형은 주로 정치적 민주실현과 경제적 평등의 실현 등을 목표하여 부정과 부패, 불의에 항거하였다. 자연히 이들의 구호는 빈국타파·독재정권타도 등에 집중되었다.
  共産圈型(공산권형)은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동유럽형으로서 헝가리·체코·폴란드 등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국제 공산주의의 敎條的(교조적) 영역을 탈피해 보려는 자유화운동의 시도라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하나는 중공의 文革(문혁)기간 중의 紅衛兵(홍위병)운동과 같이 내부적 권력투쟁을 黨(당)밖으로 끄집어내어 대중투쟁을 유발시킴으로써 官(관)에 이용당하는 御用(어용)학생운동을 들 수 있다 하겠다.
  이상은 계략적인 고찰이고, 학생운동사로 보아 보다 많은 관찰이 필요하다 할 수 있는 東(동)유럽과 선진국형중의 獨逸(독일)학생운동에 대하여 좀 더 세부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먼저 동유럽형은 성숙된 동구권 학생들의 정치의식과 민족적 신념에 대한 관찰이 없이는 그 접근이 어렵다는 것이다.
  일찍이 1920년대 초에 유고․루마니아․헝가리․폴란드 등에서는 서구에 있어서의 학생단체의 성격을 지니는 공산주의 청년단체들의 활동이 금지됐었다.
  때문에 40년대 후기까지의 동구의 新生(신생) 공산국가의 청년학생 조직체들은 소련 콤소몰의 거의 완전한 再版(재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점증하는 동구권 민족주의 영향으로 적잖이 변경되었다. 이런 경향 때문에 적어도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공산당은 청년세대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보다 현실적인 평가를 해야 했다.
  1956년의 폴란드와 헝가리에서의 거국적인 학생정치활동이 그 주요배경이라 할 것이다.
간추려 말하자면, 동구의 학생정치활동은 외세의 정치적 지배, 탄압적인정권, 혹은 학생들의 생활과 사상과 활동을 조직하고 통제하려는 기도 등에 대한 반대의 형식으로 전개됐다는 것이다.
  동구권 학생운동에 대하여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들의 모든 운동의 展開(전개)양상이 어떤 이데올로기 보다 민족주의에 깊이 뿌리박은 애국적 憤熱(분열)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독일의 학생운동 유형에 대하여 관찰해보면 2차 大戰後(대전후) 독일의 학생운동은 이상주의적인 주장을 지지하거나 부당한 행동에 대한 항의에 학생들이 물리는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1953년 6월 17일 동독국민의 항거에 대한 공산정권의 무자비한 탄압과 56년의 헝가리 의거에 대한 소련의 간섭 등은 이전까지 서독에서 일어났던 어느 운동보다 최대 규모의 학생운동을 불러 일으켜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또한 60년대 후반부터는 서독 재무장과 핵무기의 반입 등이 일반적으로 반군사주의자인 학생들에게 격렬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독일의 학생운동 유형은 동구권 학생운동 유형과 체제면에서 대비를 이루면서 같은 분단국가로서의 한국 학생운동에 여러 가지로 좋은 비교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독일은 일찍이 수많은 사상, 철학을 꽃핌으로써 가장 폭넓고 오랜 학생운동의 역사를 지녔다할 수 있으므로 여러 학생운동 유형중 가장풍부하고 확실하며 보편적인 유형이라 할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서구문화의 산물이며 또한 학생운동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과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므로 서구 민주주의를 이식해가는 입장인 한국을 비롯한 민주주의권이 후진국들은 서구先導(선도)사회가 겪어온 것과 같은 학생운동유형의 변천과정을 겪어가리라 예상된다. 이런 관점에서 선진권의 학생운동유형은 참고의 여지가 많다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4·19혁명의 유형을 고찰해볼 때 앞서 밝힌 세 유형중 후진국형에서 탈피하지 못한 후진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또 하나의 모델이라 할 것이다.

Ⅴ, 4·19학생혁명의 成果(성과)

  4·19革命(혁명)이 있은 지 24個(개) 星霜(성상)이 흐르는 동안 世間(세간)에서는 4·19의 혁명여부에 대한 갖가지 논쟁이 있어왔다.
  이 논쟁은 혁명의 本質(본질)이 무엇이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본다면, 하나는 가치측면에서 究明(구명)해 보려는 입장이며 또 다른 하나는 성과적 측면에서 구명해보려는 입장이다.
  좀 더 부연해본다면, 前者(전자)는 사회정의적인 입장에서의 접근방식이라 할 수 있으며 後者(후자)는 어느 정도의 변혁이 이루어졌느냐 하는 일종의 양적 측면에서의 분석방식이라 할 것이다.
  4·19혁명을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을 종합하여 관찰해볼 때 분명 4·19혁명은 政治的(정치적) 변혁에 입각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例擧(예거)하여 본다면, 첫째로 당시 집권층의 전면적인 개편이 있었다는 점이며, 둘째로 政治的(정치적)제도면에서 大統領中心制(대통령중심제)가 내각책임제로 바뀌었다는 점이며, 셋째로 社會經濟構造面(사회경제구조면)에서 근본적이고 철저한 변혁은 없고 혁명전과 혁명후의 社會體制(사회체제)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4·19 혁명은 政治的(정치적) 변혁에 의한 정치혁명이었다고 하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의 진행과정면에서 볼 때, 혁명은 돌발성을 지님을 알 수 있다.
  물론 계획적인 혁명도 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돌연한 계기에 의해 폭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돌발적이라 하여 누적된 혁명적 요소의 성숙을 배제하고자 함은 아니다. 즉, 혁명에 있어서는 기폭제적 점화가 필연적 요소인데 바로 그것이 돌발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혁명은 단시일을 요하는 급진적 형명과 장시일을 요하는 평화적 혁명이 있다.
  여기서 후자가 전자보다 반드시 비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급진적 유혈적이었던 프랑스 대혁명이 장시일을 요했던 영국의 명예혁명 등 일련의 혁명보다 더 합리적이며 발전을 가져 왔다고는 보지 않는 것과 같은 所以(소이)다.
  혁명진행과정상으로 볼 때, 4·19가 물론 혁명을 분명히 인지하여 치밀한 계획의 토대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다만 집권자에 대한, 억눌렸던 감정표현이 행동화된 돌발적 사태이며 또한 혁명직후 급진적 사회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정치적 성과측면에서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하여 자칫 그릇 평가하는 것은 시각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과정 중에 면면히 흐르는 혁명적 본질이 있음으로서다. 또한 4·19혁명은 그 이후의 諸般 社會的 變化 (제반 사회적 변화)에 상당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명백한 當爲(당위)를 지나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전제로 4·19혁명의 성과를 정리해 볼 수 있다. 4·19학생혁명은 첫째로, 4·19 전후의 행동 狀況(상황)으로 보아 學生(학생)이 시종 주체가 되어 왔으며 그 위에 일반대중과 지식인층의 呼應(호응)을 받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주체이면서도 혁명 이후에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일반적 학생운동에서 나타나듯이 추진체로 족했으며 결국 本然(본연)의 姿勢(자세)로 돌아감으로써 학생운동의 純粹性(순수성)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셋째로, 민족자주의식과 자유민주사상을 온 군민에게 再認識(재인식)시켰다는 것이다.
  넷째로, 지식인의 사회참여의식을 크게 鼓吹(고취)시켰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사회적 윤리성을 강조하고 공정성을 강조하는 사회기풍의 수립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고 할 것이다.
  4·19혁명은 이상에 열거한 것과 같은 국민의식개조를 통한 사회체질개선의 발판을 만들었다는데서 그 혁명으로서의 당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Ⅵ, 結論(결론)

  4·19혁명은 汎市民的(범시민적) 蹶起(궐기)였다고 할 수 있으나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맡은 계층이 학생이었다.
  이제 그날의 喊聲(함성)이 歷史(역사)의 章(장)으로 접어진지 거의 한 세대가 흐르려하고 있다. 우리 民主史(민주사)에 한 分水嶺(분수령)을 긋고 있는 4·19, 그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지구상에는 무수한 정치사상적 변환과 세계적인 이슈(Issue)들이 亂舞(난무)하여 왔다.
  과거와는 전혀 그 양상을 달리하는 민주, 공산 양진영강의 심각하고 그 정체가 불투명한 對立(대립), 그 사이에서 배태된 소위 비동맹주의니 自國實利主義(자국실리주의)니 資源民族主義(자원민족주의)니 하는 것들... 이것은 또 다른 변수요인을 배태시켜 이러한 수많은 변수 요인이 얼키고설켜 세계는 더욱더 暗雲(암운)이 짙게 드리워진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세계 각국의 치열한 실리추구의 노골화는 순수한 정통적 사상, 哲學(철학)의 溫存(온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더구나 오늘에 와서 우리 주위는 경제적, 군사적 위협이 극도로 첨예화 되어 시시각각으로 그 존립의 자체까지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오늘의 학생 계층이 당시의 4·19학생革命(혁명)이 그 時代(시대)의 지성과 양심을 대변했던, 그 求心的(구심적) 역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精神(정신)이 오늘의 시대적 상황이라는 용광로속에서 제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 현상을 폭넓게 측량하고 확인할 때, 純粹(순수), 良心(양심), 知性(지성)으로 대변되던 4·19의 정신은 창조적으로 계승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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