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를 뿌리는 마음>

  3월 하순쯤이면 따뜻하리라는 것이 상념이지만 올해는 아직까지도 춥기만 하다. 골목길에서 신나게 뛰놀던 동네 꼬마들이 새빨간 해가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면 그들의 코와 작은 두 손도 덩달아 딸기 빛 물이 든다.
 2층에 있는 나의 조그만 방의 창문밖에는 항상 한 그루의 라일락나무가 있어서 나의 친한 동무가 되어주곤 한다. 내가 감정이 무디어 미처 봄을 느끼지 못할 때면 먼저 내방의 창문을 살살 두드린다. 새 볼이 찾아 왔노라고.
  그러나, 올해는 왠지 내가 먼저 봄이 기다려진다. 라일락나무가 아직도 새눈을 틔우지 못한 것을 보면 봄은 따뜻한 남쪽에서 조금 더 놀다가 오려나본데.
  해마다 이 때면 윤경이 생각이 난다. 따뜻한 봄이 오면 편지을 띄우겠다던 윤경이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녀가 살던 곳에는 이미 새로운 주인이 차지하고 전혀 낯설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흔적이 찾아 볼 수조차 없이 변해버렸다. 그녀는 봄을 사랑하였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햇살만큼이나 포근하였다. 그래서 주위의 모든 친구들이 그녀를 좋아 했었다. 하늘이 그녀에게 주신 환경이 그리 좋은 편은 못되었으나 그녀는 한 번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명랑하고 성실하였다.
  ‘열심히 살아야지’그녀가 항상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말이다. ‘내가 어떻게 사는 것에 이렇다 저렇다를 말하겠어? 하지만 나에게 단 한번 주어진 기회를 호지부지 산다는 것은 정말 무가치한 것 같아’ 가끔 그녀는 이러한 말들로 잠자고 있는 나의 이성을 일깨워 흔들어 놓곤 하였다. 그리고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사랑하며 성실하게 살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였으며 내가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준 조물주께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이때만큼이나 생에 희열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나는 그녀와 이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까지는 미확정된 곳이었으나 어쨌든 어디론가 이사를 하여야만 하였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참으로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용기를 주었던 한마디는 이사하면 바로 편지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는 바로 우리는 각자 새로운 길을 걸어갔다. 그녀와 헤어진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항상 이맘때면 그녀가 생각나고 편지가 기다려진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의 편지가 우리 집 우편함에 찾아오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내 앞에 있는 유리창이 어느새 부옇게 흐려졌다. 검지는 손가락으로 ‘윤경’이라고 썼다가는 이내 지워버리고 말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데 뭐’ 전깃줄위에 홀로 앉아 지저귀는 참새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외롭게만 보인다. 혹시 강남 갔던 제비가 고향 찾아 귀향하던 길에 나에게 그녀의 소식을 전해주고 가지 않을까?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