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동국”

마운드에서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던 송골매 송진우(무역학과 88 졸) 동문이 지난 8월 16일 은퇴를 선언했다. 한화 이글스의 에이스로 마운드를 주름잡고, 선수협의회 초대 회장으로 동료들의 권익을 위해 힘써온 현역 최고령 투수 송진우.

671경기 출전,  3003이닝, 통산 2백 10승, 153패, 103세이브, 2048탈삼진, 방어율 3.51 등을 기록하며 자신의 등번호 21과 같이 21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송진우 동문이 세운 기록 중 승리, 패전, 소화 이닝, 탈삼진 부분이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다 기록이다.
그의 선수 생활은 화려했다. 1989년 입단해 데뷔전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뒀고, 1992년에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최다 승리 투수상과 구원 투수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2000년에는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피안타 하나 없이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햇다. 데뷔전 완봉승은 역대 다섯 번째, 노히트 노런은 역대 10번째 기록으로 송진우 선수가 달성한 이후로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송진우 동문은 청주 세광고 시절부터 뛰어난 좌완투수로 주목받았다. 고교 2년때인 1982년엔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세광고에 우승컵까지 안겼다. 그 다음해인 1983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은 부상으로 우리대학에 입학한 이후 대 3학년 때까지 제대로 선수생활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대학 야구부 김인식 감독의 배려로 꾸준한 재활훈련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당시 서울올림픽에 출전시키기 위한 야구협회의 지시로 인해 송진우 동문은 한 해 늦게 프로에 입단했다. 1989년 당시 빙그레(한화의 전신)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송진우 동문은 한 번도 팀을 옮기지 않았다.  송진우 동문의 동국대 시절 은사이기도 한 한화 김인식 감독은 “진우 공이 참 좋았어. 대학 졸업 무렵에는 공이 정말 묵직했다구”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프로 데뷔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입단 첫 해 9승10패 9세이브, 평균자책 2.81을 기록했다. 다음해인 1990년엔 11승7패 27세이브, 평균자책 1.82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프로에서의 송진우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혔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프로야구는 지금과 같은 선발투수-중간계투-마무리와 같은 분업화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감독이 나가라면 어느 때고 마운드에 올라 공을 뿌렸던 시절이었다. 그 때문인지 송진우 동문은 프로 4년차였던 1992년에는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경기에 출전해 다승왕(19승)과 구원왕(25 SP)을 동시에 차지하는 일까지 있었다.

프로 입단 때 역시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후배 임선동과 조성민 등이 부상을 입으며 기교파 투수로의 변신에 실패한 것에 비춰보면, 송진우 동문의 현재의 모습은 재능에 앞선 것이 철저한 노력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야구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송진우 동문의 3003이닝 기록은 향후 몇 년간 깨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보다 30경기 이상 많은 메이저리그에서도 129명, 일본은 26명만이 가진 기록이다.

한국 프로야구를 호령했던 ‘전설’은 이제 더 이상 마운드에서 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송진우’라는 이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