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여년 간 지속된 풀리지 않는 숙제

이적규정 후 해법논란 … 한총련 공개농활 등 다양한 노력 보여

98년 대법원의 이적규정 판결 이후 6년 만에 한총련 합법화가 현실화되고 있다.
사실 한총련 합법화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당사자인 한총련 정치수배자들과 그 가족들, 관련 공안기관과 정치권에서도 늘 ‘해법’을 두고 논란이 돼 온 문제였다.
96년 연세대 통일대회에 이어 97년 출범식 과정에서 발생한 ‘이석 치사사건’(일명 프락치사건)을 거치면서 한총련은 이적단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지는 등 엄청난 시련기를 맞게 됐다. 조국통일위원회, 정책위원회 등이 부분적으로 이적규정을 받던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판결된 것은 5기 의장인 강위원씨 재판과정에서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제5기 한총련은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며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이고…….’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적단체 규정 이후 한총련 당사자들은 물론 정부, 관련 공안기구 등에게 이 문제는 늘 설전의 대상이었고 해법이 용이하지 않은 민감한 문제였다. 98년 김대중 정권초기에는 공안당국과 여권 내 보수세력의 반발로 시도조차 못한 채 한총련 합법화 의지는 꺾이고 말았다. 99년 한총련 수배자들이 5백 여일 넘도록 조계사 농성을 벌였지만, 당시 한총련 내부의 의견 차와 당국의 선별구속 조건으로 부분적 수배해제에만 머물렀다. 늘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한총련문제는 보수·수구진영과 공안기관의 강경한 입장에 끌려 다녀야만 했다.
공안기관과 보수·수구진영의 합법화 반대 논리는 한총련의 강령과 주장을 근거로 ‘친북적이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더해 한총련 핵심간부들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이른바 ‘주사파’라고 규정짓고 합법화 불가론을 강조해 왔었다.
이에 당사자인 각 대학 현직 학생회장은 매년 검찰청 집단 출두, 수배자 공개농활, 수배자 공개 교생실습 등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이 문제를 공론화 했고 시민사회단체와 인권·종교단체에서도 줄기차게 정부와 언론에 호소해 왔다. 정치권과 언론의 무관심과 냉소 속에서도 이들은 쉼 없이 한총련 합법화를 주장해왔던 것이다. 또한 문제시되는 강령을 개정하는 등 자체적인 변화의 모습을 상당수 보여왔었다.
이러한 시민사회단체와 한총련의 노력은 지난해 2월, ‘한총련 합법화 대책위원회’ 결성과 ‘한총련 이야기’ 책 발간으로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대책위는 지난 1년 동안, 정치, 종교, 문화, 언론, 법조, 학술 계를 비롯한 광범위한 시민사회단체와 인사들에게 호소했고 사회적 공론화를 위한 사업을 펼쳐 왔다. 각종 토론회·문화제, 책 발간, 기도회·법회·미사 등 다양한 방식과 유엔인권위 제소, 해외 학자들의 서명에 이르기까지 국제적 연대활동까지 진행했다. 지난 1년 간 이뤄진 대책위의 이러한 활동은 국가보안법이 현존하는 상태에서도 한총련 이적규정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법률적, 정치적,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이제 한총련 합법화는 마지막 골인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난 6년 동안 매년 수백 명의 양심수와 정치수배자를 양산했던 우리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이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공안기구의 여전한 반대 속에 노무현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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