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 던졌던 ‘영원한 자유인’

2009년 6월 28일 향년 84세로 유현목 감독이 별세했다. 이 문장은 단지 영화감독 유현목 개인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활동했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그리고 1970년대 초중반의 한국영화계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전후의 암울한 현실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빼어난 미장센으로 표현했고, 한국영화 황금기인 1960년대에는 확고한 스타일을 통해 신상옥, 김기영과 함께 3대 감독으로 칭송받았으며, 영화 검열이 심각하던 유신 시절에는 젊은 영화인들의 아지트인 ‘영상시대’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한국적 영화를 찾던 감독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현목의 영화를 표현할 때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예술적’이라거나 ‘ 무겁다’라는 표현일 것이다. 이 말은 유현목은 영화를 가벼운 오락적인 매체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현목은 영화야말로 인간의 깊은 고뇌를 담을 수 있는 종합예술로 생각한 듯하다. 이 말은 결코 과장된 수식이거나 허언이 아니다.
유현목의 생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를 따라 즐겁게 교회에 다니던 유현목이 혼자 서울로 유학을 와서 느꼈을 고독은 무서운 것이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기관지염을 앓으면서 삶에 대해 허무적인 감성을 갖게 된다. 그에 의하면, 그 당시 읽은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은 너무도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삶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이다. 치료를 위해 고향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유현목은 예술적 감성을 키웠다. 유현목의 영화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매우 뛰어난 영상으로 표현했고, 영상과 음향의 몽타주를 자주 사용한 것도 이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현목의 영화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고나면 즐겁기보다는 어두워진다.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해 극작을 하면서 영화로 방향을 잡은 그이기에 문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유현목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문예영화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던 1955년에 감독으로 데뷔한 유현목에게 전후 비참한 한국의 현실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원로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유현목의 영화를 두고 “공간의 황폐, 인간 내면의 황폐”를 그린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보다 더 정확한 지적은 없을 것 같다. 전쟁의 고통, 분단이 남긴 상처, 이데올로기의 비극, 실존적 자각, 신과 인간의 구원 문제 등을 주로 영화 속에 그린 유현목은 많은 소재를 문학에서 찾았다.
당시 한국영화는 전후의 폐허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영화를 주로 만들었고 해방 이후에는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영화는 제자리 걸음을, 아니 후퇴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유현목은 당시 실존 문제와 전쟁의 상처를 고루 다루었던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민하던 중고 시절 문학에 매료되었던 청년이 문학을 영화화하는 것, 그 문학이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유현목은 다양한 문학 작품을 영화화했다. 훗날 유현목의 대표작을 꼽을 때에도 대부분 문학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리스트를 차지하고 있다.
유현목이 연출한 영화 가운데 문학을 원작으로 한 것에는 오영진의 ‘인생차압’(1958), 이범선의 ‘오발탄’,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1963), 손창섭의 ‘잉여인간’(1964), 김은국의 ‘순교자’(1965),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1968), 유치진의 ‘나도 인간이 되련다’(1969), 방영웅의 ‘분례기’(1971), 윤흥길의 ‘장마’(1979), 한눈에 보더라도 매우 다양한 소설가와 희곡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많은 작품 이 가운데 ‘오발탄’, ‘김약국의 딸들’, ‘잉여인간’, ‘장마’ 등이 있다. 유현목의 영화를 거론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 할 목록이다. 이 목록을 빼놓으면 유현목의 영화를 논할 수 없다. 이렇게 다양한 원작을 영화화하면서 유현목이 주목한 것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빈곤의 문제, 인간이 처한 극한 상황에서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현목은 인간은 자신이 처한 고통스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있는가를 매우 실존적인 목소리로 담고 있다.
이런 것이 분단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와 신과 인간의 구원 문제, 더 나아가 한국적인 영상의 추구로 이어진다. 결국 유현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존적인 공통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유현목은 반공영화를 꽤 많이 만들었다. 1960년대 이후의 전형적인 반공영화처럼 무게 없는 반공영화는 아니엇지만, 그가 반공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가 반공법 때문에 이만희 감독이 구속되었을 때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자유”라고 주장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유현목은 북한의 억압적인 독재 체제도 반대하지만, 반공을 내걸고 실제로는 독재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남한의 체제도 반대하는 자유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현목의 영화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빼놓았다. 그것은 유현목의 영화가 내러티브뿐 아니라 스타일 면에서도 매우 빼어나다는 것이다. 한 때 화가와 음악가를 지망했던 경험 덕분인지 그의 영화는 탄탄한 스타일을 자랑한다.
한국영화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의 대사가 상황을 전부 설명하는 것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미장센에 충실했다. 인물과 배경의 조화, 더 나가 배경을 통해 인물이 처한 상황을 알도록 했다. 때문에 유현목의 영화를 볼 때에는 인물의 행동이나 대사보다 화면 전체를 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화면에 비친 사소한 것이 하나의 세포가 되어 유기물인 한 편의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유현목의 영화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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