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바로 ‘자살’ 소식 때문이다. 하루에 한번 꼴로 자살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최근에 사회적으로 큰 논쟁거리가 되었던 한 어머니와 아이들의 동반자살이야기가 떠오른다. 어제도 어느 40대 남자가 딸과 함께 동반 자살했다고 한다. 급기야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벌 총수마저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사업실패, 가정불화, 성적비관, 카드 빛 등에서부터  단순 분노에 이르기까지  그 사연도 다양하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 중 일부가 열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있었다. 경전을 보면 ‘미가란디까’라는 승려가 60명이나 되는 승려의 목숨을 끊어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실을 알게된 부처님께서는 엄중한 경계의 말씀을 하신다.

자살은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것이 아니고 또 법에도 알맞은 것이 아니라고 공포 하셨다. 자살 역시 살생계에 속하는 중죄라는 이야기다.
불교에서는 갈애(渴愛)가 모든 형태의 괴로움과 존재의 윤회를 일으키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 말하고 있다. 갈애란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격렬한 탐욕을 일컫는 말이다. 갈애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욕애(慾愛), 유애(有愛), 비유애(非有愛)가 그것이다.

 이 중 세번째인 비유애가 바로 죽고싶은 욕망을 가리킨다. 우리는 흔히 살고싶은 욕망, 삶에만 강한 욕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죽음의 욕망 역시 격렬하다는 것이다.
자살은 결코 자기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궁극적인,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아무리 훌륭한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어쩔 수 없는, 누가 보아도 딱한 처지라고 할지라도 자살은 번뇌이고 자신을 파괴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자살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임을 직시해야한다. 고통을 잠시나마 면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자살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자살을 현실에 대한 영원한 도피처로 생각한다면 이는 크나큰 오산이다.

강건욱(불교대 인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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