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국가철학에서 노마드적 사유와 실천으로

노마돌로지’라는 지적 체계는 서구적 근대의 국가와 대학에 의해 부활한 플라톤주의의 ‘국가철학’의 지적 체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와 함께 창안한 지식을 지칭하는 용어다.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이 오늘날의 지적 계보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고 있는 것과는 달리 들뢰즈는 노마돌로지의 지적 계보를 스토아학파의 사유체계에서 찾는다. 서구의 세계에서 스토아학파의 사유체계는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하여 스피노자, 흄, 니체, 그리고 베르그송에 의하여 계승되었지만, 이들은 근대의 주류철학자들인 데카르트, 칸트,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에 의하여 비주류 철학자들로 매도된 것이 근대적인 핵심사상이다.

플라톤의 국가철학은 이데아와 현실의 이분법을 주인과 노예, 신과 인간, 정신과 몸, 선험과 경험, 주체와 객체, 국가와 국민, 아버지와 아들,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으로 끊임없이 부활시킨다. 따라서 플라톤의 국가철학이 지배하는 서구적 근대는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파시즘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의 근원은 인간을 국가인으로 규정하고, 인간 개개인을 교육의 대상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플라톤의 국가철학이다.

근대의 주류 철학자들과는 달리 들뢰즈는 인간을 노마드(유목민, 혹은 방랑자)로 규정한다. 가족, 사회, 국가와 같은 공동체는 노마드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일시적인 유목적 고원, 즉 삶의 문화를 공유하는 무리일 뿐이다.
이러한 노마드의 무리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 무리가 국가철학적인 서열체계로 이루어졌느냐, 아니면 남녀노소를 막론한 친구들과 연인들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단지 인간에게 머물러 있지 않다. 노마드적 삶은 동물이나 식물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사회와 같은 집합체, 그리고 진리와 정의, 사랑과 믿음과 같은 추상명사까지도 포함된다.

따라서 생물과 무생물, 그리고 사회체와 추상명사(기계)의 이동과 탈주를 가로막는 것은 그러한 것들의 생명성을 갉아먹는 영토들이다. 물고기가 이동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댐과 동물들이 이동하는 루트에 만들어진 덫은 물고기와 동물들을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죽이기 위한 영토화의 작업들이다. 물고기와 동물들은 거대한 댐을 넘거나 덫을 피하기 위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쓰거나 심지어 죽음으로 항거한다. 이러한 항거를 들뢰즈는 ‘탈영토화’라고 부른다.

탈영토화를 통한 재영토화의 과정, 즉 이동과 탈주가 없는 물고기와 동물들의 삶은 죽음과 마찬가지이다.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댐과 숲 속에 있는 덫이 물고기와 동물들의 삶을 갉아먹거나 죽이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이동과 탈주를 가로막는 울타리와 덫은 인간의 삶을 갉아먹거나 죽이는 것이다. 국가철학에 의해 만들어진 이러한 울타리와 덫의 영토들을 들뢰즈는 국가주의와 가족주의, 그리고 인간 중심의 상식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들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간의 이동과 탈주가 가로막히기 시작한 것은 인간들 사이에 지배자가 존재하면서 피지배자들에게 정착을 강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배자(주인)와 피지배자(노예)의 이분법은 국가철학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고, 그러한 형식은 역사적으로 지배자의 위치에 신, 국가, 그리고 아버지, 남자, 인간이라는 이름을 대체하면서 때로는 폭력으로, 때로는 설득을 통하여 노마드적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이동과 탈주를 가로막는다.

지배자의 폭력은 눈에 보인다. 그러나 지배자의 설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배자의 설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사유하고, 그리고 스스로 사유한 지식을 실천해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사유한 지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존재와 삶이 노마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인의 사유와 지식도 또한 노마드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노마드적인 삶과 사유의 형식으로 구성된 지식을 ‘노마돌로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노마드적인 삶의 기준과 가치에서 벗어나 지배자의 폭력과 설득을 용이하게 하거나 지배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유의 형식과 지식도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의 형식을 국가철학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인간의 무리 속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존재하는 한 노마돌로지의 지식인과 국가철학의 지식인은 뒤섞여 있다. 이러한 지식인들 속에서 노마드적인 지식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론과 실천, 그리고 끊임없이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도사리고 있는 현실적 삶과 지식체계에 대한 저항, 혹은 그러한 삶과 지식체계에 대한 노마드적 분석의 이론과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노마돌로지의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플라톤주의와 동양의 유교철학이 지니고 있는 근대적 친화성은 둘이 모두 가족주의에 근거한 동양과 서양의 국가철학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노마돌로지의 지식인을 노자와 장자, 원효, 그리고 서구적 근대와 다른 동아시아의 새로운 근대를 구성하고자 했던 중국의 루쉰과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그리고 우리의 만해 한용운의 삶과 지식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의 지식체계가 서구적 근대의 주변부로 밀려난 스피노자, 흄, 니체, 그리고 베르그송이나 들뢰즈와 유사한 이유는 들뢰즈가 스토아학파로 거슬러 올라가 새롭게 구성한 노마돌로지의 지식체계가 동양의 도가철학이나 불교의 유식학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지적인 작업처럼 새로운 노마돌로지의 관점에서 노자와 장자, 원효, 루쉰,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와 만해 한용운의 삶과 지적 체계를 새롭게 총괄하는 지적인 작업은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근대에서 벗어나 서구와 비서구,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의 오래된 이분법을 폐기처분하고 친구와 연인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탈근대의 작업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그리고 페미니즘의 지식과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장 시 기
문과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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