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민법의 아버지

우메 켄지로(1860∼1910)는 1860년 7월 24일 일본의 풍광 수려한 시마네 현에서 출생했고, 1880년에 현 도쿄대학법학부에 입학해 188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1885년 10월 6일 약관 25세에 도쿄대학 법학부교수가 되고, 같은 해 12월 29일에 프랑스 리용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리용대학에서는 1889년 ‘화해론’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최우등 박사논문으로 리용시의 베르메이유상을 수상)하고, 1890년 귀국하여 도쿄대학법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 후 근대국가의 기초가 되는 입법작업에 관여하면서 주로 민법의 기초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 때 만들어진 민법(1898년 시행됨)은 아직도 일본에서 적용되고 있다. 민법의 기초만이 아니고, 민법 참고서의 간행과 민법의 보급·계몽에 노력하여 ‘일본 민법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우메는 1906년부터 암울한 역사의 초창기인 한국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침략의 앞잡이로 알려져 있는 이또히로부미가 우메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여, 자신이 통감으로 있는 한국정부의 법률고문으로 초빙한 것이다. 1906년부터 우메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 각지의 관습을 조사하고 이에 입각한 한국 독자의 입법을 기초하려고 했다.

그는 한일합방에 반대한다는 기본적 입장에 서서, 한국 독자의 법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갖고 입법작업을 했다. 하지만 우메가 만든 법안은 한일합방 후 일본의 법을 그대로 강제한다는 방침에 따라 사라져 버리게 된다. 단, 토지조사사업의 근간이 된 토지건물증명규칙을 우메가 만들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일본인의 토지취득을 방조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우메는 1910년 한일합방 직전에 서울 체류 중 장티푸스에 걸려 1910년 8월 25일 50세의 짧은 나이에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메는 일본 민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편, 한국의 법에도 많은 영향을 남겨 놓았다. 그 주된 것이 현 대법원의 모체인 조선고등법원의 창설에 관여했다는 점이다. 우리로서는 매우 아픈 기억이지만, 한 일본인이 순수한 법학자로서 당시의 서울에서 한국의 법과 법원을 만들기 위하여 애썼다는 점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김상수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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