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 유령, ‘다중의 자율’ 선언

아우또노미아
조정환 저
갈무리 출판사


첫 문장을 ‘지금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아우또노미아라는 유령이’라고 시작한다면 지나칠까.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혼종적인(hybridity) 사상이 출현하여 ‘아우또노미아(Autonomia)’라는 이름으로 논쟁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상을 낳고 또 사람들의 활력(puissance), 그 생기 가득한 힘들과 결합되어 ‘운동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유령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 우리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조정환의 말마따나 안또니오 네그리라고 하는 칠순이 넘은 정열적인 사상가는 어떤 이에게는 아나키스트로, 어떤 이에게는 맑스주의자로, 또 어떤 이에게는 테러리스트로 이해되고 있다. 그 어느 표현도 안또니오 네그리의 진면목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그는 지금 ‘천 개의 얼굴’로 비쳐진다. ‘어떤’ 거울들에 말이다. 그 거울에는 알뛰세주의, 클리프주의, 아니면 월러스틴이나 아리기와 같은 세계체계론자 등이 있다. 한국의 여러 ‘거울’들은 더욱더 이 노(老) 사상가의 사유를 읽어내는 데 서툴다.

올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이화여대에서 맑스 코뮤날레가 열렸을 때, 누구도 한국의 구좌파 교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음에도 공공연하게 구좌파는 아나키즘을 공격하고, 들뢰즈를 비판하고,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을 비판했다. 마치 안또니오 네그리가 한국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 모두가 ‘유령’에 대한 제각기의 반응이었다.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은 일종의 ‘선언’일까. 이 책의 제목을 단순히 ‘아우또노미아’라고 한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의 ‘선언’처럼 들린다. 실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만천하에 고하는 선언 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1848년에 맑스가 ‘선언’을 출간한 일이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이 책의 출간 역시 하나의 ‘사건’이다. 바로 ‘아우또노미아’가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안또니오 네그리는 그간 조각조각 찢겨진 채 이해되어 왔다. 가령 ‘네그리는 세계화에 찬성한다’와 같은 방식의 명제로 이해하는 어느 교수처럼 말이다. 몇 가지의 문장을 문맥, 그리고 저자의 사상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그것과 무관하게 이해하기. 우리는 그것을 ‘곡해’라고 한다. 한국의 수용법은 대체로 곡해 그것에 다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10여 년이 넘게 아우또노미아 그리고 안또니오 네그리의 사상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 조정환이 내놓은 이 책은 네그리의 사상을 그 자체로서 전면적으로 다룬다. 거울을 치우고 그를 그로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은 네그리에 대한 연구서이기도 하면서 아우또노미아 사상 그리고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입문서이기도 하다. 책에 따르면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우또노미아를 다룬 책이라고 한다.

‘다중의 자율을 향한 네그리의 항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아우또노미아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탈리아어로 ‘자율’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에서 태동한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내용에 대해 △가치론 △계급구성론 △사회편성론 △제국론 △국가론 △코뮤니즘론 △조직론 등의 측면에서 다룬다.
최근 들뢰즈, 가따리의 책이 한국에 많이 소개가 되면서 스피노자, 네그리, 하트 역시 함께 읽혀지고 있다. 그것은 스피노자-맑스-들뢰즈-가따리의 계열 속에서 네그리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면 네그리의 특이성보다는 다른 사상가들과의 연속성만이 강조될 위험이 있다. 사실 한국에서 네그리는 아직 제대로 소개·이해조차 되지 못했고, 따라서 오해의 소지는 매우 컸다. 이러한 때에 조정환의 새 책은 네그리의 사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어 반갑다.
이 책의 출간은 한국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앞으로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한 병 준
대학원 철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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