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간 실학자이자 소설가

연암 박지원(1737-1805)은 18세기의 대표적인 북학론자이다. 그의 호는 연암, 연상 열 열상외사이고 본관은 전남 나주의 반남현으로 대대로 명성을 울린 사대부가의 후손이다. 조부는 경기도 관찰사 예조참판을 지내는 등 고관을 두루 거쳤으나 부친이 별다른 벼슬을 하지 않은데다 청빈함을 가풍으로 삼았던 탓에 높은 명성과 달리 그의 일생은 궁핍함에서 헤어난 적이 별로 없다. 

사대부 후예가 과거 준비에 몰두하는 것과 달리 연암은 어릴 때부터 문예적 글쓰기에 전심한 결과, 20세 무렵에 이미 필명이 높았고 30대에 들어서는 당대 지식인들과 주로 어울렸다.
특히 홍대용과의 만남은 그가 실학사상가로서 눈을 뜨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의 친교는 이용후생을 핵심으로 한 북학론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이용후생학은 18세기 후반 상공업의 진흥, 상품유통, 농업생산의 확대 등을 통해 국민의 경제생활에 실질적인 도움과 편리함을 도모하자는 생각을 기저에 두고 주자학이 낳은 폐해, 즉 관념적 독선과 교조주의적 억압에서 비롯된 비능률적, 비실용적인 문제점을 타파하자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크게 보아 연암의 사상은 우주와 자연 등 세계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고 그것은 44세 때 삼종형 박명원을 수행하여 연행사의 일원으로 중국여행을 하고 난 이후 더욱 확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오랑캐국이라고 비하하는 대신 청(淸)의 화려한 문물과 산업의 발전에 주목해 조선도 하루빨리 전근대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과거부터 선창하던 ‘북벌’이 아닌 ‘북학’이야말로 그의 화두였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북학이란 중국중심의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 및 문호의 독자성을 창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편, 다른 실학자들과 구별되는 연암의 면모는 사상 철학적 글쓰기에 그치지 않고 생각과 주장을 12편의 소설 및 열하일기를 통해 수준 높게 형상화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현실의 부조리 및 양반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한편 연민의 시선을 통해 하층민들의 덕성에 주목하고 있는 그의 소설은 철학담론 이상의 효용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입신과 양명에는 아랑곳없이 연암은 내내 18세기 조선현실과 인민들의 삶에 눈길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는 캄캄한 창공에서 제 홀로 광채를 발하는 별과 같은 존재였다.

김승호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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