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라고 믿는 운명적 가상공간 매트릭스

우리의 문제의식, 우리 식의 사고로 ‘매트릭스’ 전체를 종합적으로 읽어내는 철학적 ‘텍스트’


‘동굴 속에 묶여 있는 죄수들은 오직 동굴의 안쪽 벽만을 볼 수 있다. 햇빛이 비추는 동굴 밖에서는 여러 사물들이 지나가고 있는데, 동굴 안의 사람들은 오직 사물의 그림자만을 보면서 그것이 참된 실재인 듯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자, 즉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동굴의 비유’다. 이러한 참된 세계의 실재, 이데아에 대한 존재론적 관점은, 최근 시리즈의 완결편이 전세계에서 동시개봉돼 4년 여 간 뿜어낸 문화적 스펙트럼에 마침표를 찍은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매트릭스 안에서 통제되는 인간들은 오직 매트릭스 안에서만 보고, 듣고, 느낀다. 사람들은 매트릭스를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실재의 공간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프로그램화된 가상공간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처럼 진실과 거짓, 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 등 철학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매트릭스’는, 때문에 공상과학 블록버스터 영화의 위치를 넘어서서 여러 해석과 담론을 낳는 철학적 ‘텍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실제로 ‘매트릭스’1편이 개봉된 후 ‘매트릭스와 철학’‘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등 이를 분석하는 여러 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국내 철학자들이 △현상학 △논리학 △인식론 △미학 △정신분석학 △동양철학 등 다양한 형식과 글쓰기를 통해 ‘매트릭스’전체를 총괄, 종합적으로 읽어내는 분석서를 냈다.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가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책은 우리의 문제의식, 우리 식의 사고와 더 가깝다. 

특히, 매트릭스와 ‘도(道)’를 연결시킨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김시천 연구원의 글은 흥미롭다. 그는 ‘매트릭스’에 신화적, 종교적 은유의 장치가 곳곳에 숨어 있다고 보고 있는데, 이를 테면 ‘사람의 아들’이란 뜻의 이름을 지닌 앤더슨이 구세주를 뜻하는 ‘그(the one)’에서 one의 철자를 바꾼 이름인 네오로 불리는 것, 세례 요한이자 꿈의 신인 모피어스, 네오와 사랑의 운명을 타고 난 트리니티가 마리아의 현신이자 ‘성삼위일체’를 뜻하는 것 등이 그렇다. 때문에 ‘매트릭스’는 현대적으로 창조된 하나의 신화인 셈이다.

김시천 연구원은 이러한 ‘매트릭스’를 전통 동아시아적 신화와 사유 속에 등장하는 요소들과 접속시킨다. 가령 ‘나비가 되는 꿈을 꾼 장주는 자신이 장주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깨어나 보니 장주 자신이었다.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라는 장자의 제물론에 묘사되는 장주는,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실재로 여기며 살아온 사실을 알고 혼란스러워하는 네오의 모습과 닮아 있다. 또한 ‘당신이 말하는 도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동곽자의 질문에 ‘도는 없는 곳이 없다’고 대답한 장자의 대화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곳이 매트릭스’라는 모피어스의 대사와 겹쳐진다. 전국시대의 제후들이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 그렇게 얻고자 했던 도는 거대한 매트릭스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매트릭스’는 여러 철학적인 담론들과 맞닿는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이 미리 짜여진 것인가, 아니면 주체적 결단에 의해서 그때그때 우연적으로 벌어지는 것인가’라는 운명과 자유의지에,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과연 실재인가’라는 존재론적·인식론적 문제 등에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도 수많은 허구와 의문이 존재하듯, 영화 ‘매트릭스’에도 매트릭스의 허구성이 나타난다. 과연 영화에서 설명되고 있는 매트릭스 세계는 가능한가. 설혹 가능하다 하더라도 굳이 매트릭스를 전복시켜야 할 당위성이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 박영욱(한국디지털대 철학) 교수는 이에 대해 “오늘날의 현실이 그렇듯, ‘매트릭스’도 설명해야 할 사실들을 당연스레 전제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 교수는 “그럼에도 가상현실의 세계가 얼마만큼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제까지 ‘매트릭스’보다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영화는 없었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대중문화의 한 장르를 통해서도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와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 점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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