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켈젠(Hans Kelsen, 1881~1973)은 현대 순수법이론의 토대를 구축한 법이론가로서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법학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유명한 사회주의자이자 ‘희망의 원리’의 저자인 에른스트 블로흐는 그를 법학자 가운데 가장 예리한 사람이라고 칭한 바 있다.
그의 순수법이론의 구상은 1911년에 출간된 저서 ‘국가법이론의 주된 문제들’에서 발견되며, 이러한 구상을 완결된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책이 바로 ‘순수법학’이다.
그의 순수법학은 법학의 역사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큰 흐름 중의 하나이며, 더욱이 법실증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법이론 중의 하나이다.
켈젠의 순수법학이 스스로를 법에 관한 ‘순수한’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오로지 법(실정법)으로 지향된 인식만을 보장해주고 법으로 규정된 대상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배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순수법학은 특별한 법질서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실정법이론이며, 법학이지 법정책이 아니다.
따라서 순수법학은 법이란 어떻게 존재해야 하고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전개되었던 전통법학이 거의 무비판적으로 법학을 심리학, 사회학, 윤리학 및 정치이론과 혼합시켰던 방법혼합주의를 극복하고 과학으로서의 법학을 순수성으로 지칭되는 객관성과 엄밀성에 정초시키고자 한 것이 순수법이론을 주창한 켈젠의 의도였다.
‘순수법학’은 방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 논의에 있어 높은 추상성과 일반성을 견지하고 있다.
당위는 당위에서 도출될 뿐 존재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는 신칸트학파의 방법이원론에서 출발하여, 동적 법질서의 효력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창안해낸 근본규범(이론)에 기대어 실정법체계의 전체적 통일성을 구성하고자 하는 그의 이론적 기획 및 그에 따른 내용적 형성은 ‘순수법학’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주제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고 정치한 논리적 사고를 통해 펼쳐지고 있다.
사실 켈젠은 이 책에서 모든 법영역에 있어 자신의 이론적 근본입장을 관철시키고 있으며, 특히 그 전개과정에서는 빈틈없는 논리를 구사하여 특유한 자기체계를 다짐으로써 가히 대가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에서의 가치중립적 태도로 인해 그의 순수법학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고, 공산주의자나 자본주의자, 파시스트나 민주주의자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정치적 노선으로부터 격심한 공격을 받아 왔다.
지금에 와서도 켈젠의 순수법학에 대해서는 일면 강력한 지지자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격렬한 반대자도 있다.
이점에 대한 태도표명은 그의 법이론에 대한 독자 개개인의 성찰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법학도라면 누구든 간에 이 책을 통해 그 풍부한 내용과 명쾌한 논리전개에 탐닉할 수 있음은 물론 법학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의 계기를 갖게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변종필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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