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몰됐던 600년 건축기술이 눈앞에

청계천 복원공사 현장에서 모전교 양쪽의 호안석축, 오간수문의 홍예 기초석, 수표교 주변의 호안석축 등 여러 문화재와 유적들이 출토돼 학계에서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는 조선시대 건축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자칫 영원히 묻혀 버릴 뻔 했던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과 유적들의 발견에 역사학계는 안도와 놀라움을 동시에 표현했다. 이번에 발견된 유적들은 청계천 복원구간에 있던 다리와 수문으로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 과정에서 콘크리트속에 매몰되었던 것들이다.
이와 관련해 배기동 한양대 박물관장은 “도심 한가운데 거대한 규모의 다리가 남아있었다는 것은 놀랍고도 반가운 일이다. 다리는 시수에 관한 조선시대의 도시계획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고 말했다. 

먼저 옛 모전교 터에서 발굴된 호안석축은 조선 후기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구조물이다.
무교동 사거리에서 청계천을 따라 17.1m 폭을 두고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으며 좌안석축과 우안석축을 합해 길이가 100m 정도나 된다. 호안석축은 1773년 영조 때 청계천 주변에 쌓은 흙이 쓸려 내려가 하천이 범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축대로 조선시대 건축된 석축의 구조를 정확히 확인 할 수 있는 유적이다. 

광교 4거리 일대에서 발견된 광통교는 조선시대 남대문로에서 청계천을 건너기 위해 만들어졌다. 광통교라는 이름은 지금의 중구 남대문로 1가 조흥은행의 옛 지명인 광통방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길이보다는 폭이 넓은 다리였다.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였지만, 1411년 8월 큰 비로 익사자가 발생하자 태종은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석물을 사용한 석교로 만들었다고 한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태종이 신덕왕후(태종의 계비) 강씨를 미워해 강씨 무덤인 정릉의 석물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이번 발굴을 통해 사실임이 입증됐다”고 말했다. 받침석은 직경 120cm 정도의 방형 석재를 놓았으며, 주변에는 장대석과 방형의 석재 등으로 바닥면을 마련하였다.

또한 광통교의 교대와 바닥석 아래에서 발견된 지반을 다지기 위한 지정말목은 당시 토목기술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또한 오간수문지는 청계 6가 4거리 일대에서 발견됐는데, 이는 조선시대 도성의 물을 배수하는 오간수문의 터의 수문 기초석이다.

조선시대 때 오간수문은 내사산의 물줄기가 다모여 도성을 빠져나갈 때 통과하는 곳이었다. 오간수문을 빠져나간 청계천 물은 영동교를 지나 중랑천 물을 받아들여 한강으로 흘러든다.
기록을 보면 태종 때까지 수구문은 북쪽이 삼간수문이었고, 남쪽이 이간수문이었다. 세종 때 개천공사를 통해 북쪽이 사간수문이 되었고, 남쪽이 삼간수문이 되었는데, 오간수문에 대한 기록은 명종 15년 11월 24일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이번 발굴을 통해 기초석 아래에 두께 10cm 정도의 나무 기둥이 박힌 모습이 드러났는데 이는 조선시대 다리 건축 기법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자료다. 다리를 만들기 전 개천바닥에 나무를 세워 다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중앙문화재연구원 김현정 씨는 “원래 나무는 물 속에 있으면 썩지 않아 돌보다 더 튼튼하다. 몇 백 년 전 조선 사람들이 이를 알고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오간수문 터는 소중한 유적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유적과 문화재들은 청계천 전체 복원구간 5.8km 가운데 극히 일부인 6곳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발굴지역 확대의 필요성을 문화재계와 시민단체는 주장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복원 문제에 관해, 청계적 복원 공사 계획에 의해 일부 문화재 이전이 불가피하다는 서울시와 발굴된 장소 그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문화재계와 시민단체 측이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어 오랜만에 발견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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