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혼 설화’에서 《올드 보이》까지-

Ⅰ. 서론-금기라는 이름의 올가미

금기, 오늘날 우리가 살아내는 이 세상이 카오스로 치닫지 않고 그나마 코스모스의 형국을 근근이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이 ‘금기’라는 두 글자 덕분인지도 모른다, 고 광고하는 데 지배체제는 온 힘을 쏟는 듯하다. 기실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금기라는 이름이 권력과 지배의 틀을 떠받드는데 일조하는 것은 기정화된 사실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금기’는 ‘권력’의 순화된 표현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애초에 사람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 정의 되면서부터 그곳엔 언제나 체계와 질서, 규정과 제약이라는 금기가 산재해 있었고, 자연히 ‘금기’는 사회체제를 유지해 나가는 하나의 원리로 존재할 수 있었다.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넘쳐나는 ‘금기’의 홍수 앞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지는 않은가 조심스레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체제가 아니라, ‘권력’이 ‘금기’를 우리에게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금기라는 올가미로 우리의 목을 옥죄여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홍수 뒤에 살아남은 남매, 그리고 달래강을 건너는 오누이는 이러한 ‘금기’의 문제를 온 생을 걸어 마주한다. 그들에게 ‘금기’의 문제는 존속과 단절, 혹은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극단의 이분법으로 다가온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허울을 쓴 숙명으로,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금기’와의 외로운 사투를,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인류의 존속이라는 거대한 명제를 걸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거대한 홍수가 일어난다. 인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재앙 앞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사그러든다. 그러나 다행히 한 쌍의 남녀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 목숨을 건지다. 그런데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살아남은 남녀가 남매라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매의 혼인, 가족끼리의 혼인은 인류학의 차원에서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 아래, 철저한 금기 중의 금기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남매는 번뇌한다. 결국 그들은 天意를 묻는다. 인류의 존속이라는 숭고하고도 절대적이기까지 한 숙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윤리와 도덕이라는 잣대 앞에서는 하나의 무기력한 권태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인다. 허나 이렇게만 남매혼 설화를 해석할 때 여기에는 명백한 오류가 발생한다. 남매혼 설화의 이면에 내포된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함에서 발생한 결과라 할 것이다. 홍수를 넘어 살아남은 남매는 도덕과 윤리를 거슬러 급기야 금기를 뛰어넘으려든다. 그들은 이미 그들 나름의 정의로 답을 구하고, 하늘의 뜻을 얻으려 한 것이다. 하늘의 결정을 따르려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동조를 얻어 자신들의 ‘금기에의 위반’에 ‘합법’이라는 포장을 씌우려 한 것이다. ‘합법’이라는 이름의 위반, 지금부터 우리가 다가가려 하는 곳엔 바로 ‘위반’ 아닌 ‘위반’으로서의 ‘금기’ 아닌 ‘금기’가 목을 내어 우릴 기다리고 있다.

Ⅱ. 본론-금기를 통한 체제의 설립과 유지

ⅰ. 체제의 설립-남매혼 설화
‘남매혼 설화’는 ‘홍수 설화’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밝히는 ‘창세 신화’라 할 수 있다. ‘홍수 설화’는 보통 홍수의 원인과 관련한 것, 홍수의 결과에 관한 것, 그리고 앞의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 하고 있는 것 등의 세 유형으로 나뉘어 지는데 마지막 유형은 앞의 두 유형에 비해 전승되는 경우가 희박하다. 연구자에 따라 마지막 유형을 홍수 설화의 온전한 형태로 보고, 앞의 두 유형은 온전한 마지막 형태의 홍수 설화가 어떠한 계기에 의해 둘로 나뉘어졌을 것이라 보기도 하는데 이는 본 논의와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 계기라 함은 본 논고의 축이 되는 ‘근친상간’의 문제이다. 이러한 근친과 관련한 경험에 의한 ‘좋지 않음’의 의미가 어느새 도덕과 윤리라는 형태로 강제되어 반드시 회피해야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자연히 남매혼 이야기는 탈락하고 앞부분의 이야기만이 변형되어 전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장자못 전설’ 유형의 지명 유래 이야기라 본다.

용소는 장연읍에서 몽금포 가는 길옆에 있는데 옛날에 수천 석 하는 장사 영감의 집터가 있던 자리이다. 그 영감은 아주 깍쟁이라서 모두 ‘돼지’리 불렀다. 어느 여름철 도승이 그 영감이 아주 나쁘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집을 찾아가 시주를 달라고 했다. 영감은 두엄더미에서 소똥을 퍼 바랑에다 넣었다. 그걸 본 며느리가 쌀을 한 바가지 퍼서 돌아가는 도승의 바랑에다 넣어 주었다. 도승이 며느리에게 곧 큰 재앙이 이 집에 내릴 터이니 귀중한 것 몇 가지만 챙겨 ㅃ속히 불타산으로 도망하라 하였다. 며느리는 급히 아이만 들쳐 업고 불타산을 향해 달렸다. 얼마쯤 가는데 하늘이 갑자기 흐리면서 뇌성병력을 했다. 앞서 도승이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봤더니 그 자리에서 化石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벼락이 쳐 장자 첨지네 집이 전부 없어지면서 몇 백 길이 되는지 모르는 큰 못이 됐다.

위 유형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지역에 분포된 대표적인 광포전설 중 하나로, ‘돌부처눈 붉어지면 침몰하는 마을 이야기’ 와 함께 홍수의 원인을 밝히고 있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두 유형의 설화를 보면 홍수가 나는 원인은 인간의 도덕성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세계의 홍수설화와 맥을 함께 하는 부분이다. 홍수 후에 선택받은 善者가 살아남는다는 것도 동일하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두 이야기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발생한다. 돌부처 이야기의 경우 살아남는 사람은 ‘선한 노인’에 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장자못 전설’의 경우 살아남는 사람은 며느리와 그의 아이이며 전자는 선택받은 자가 살아남는 반면 후자의 경우 선택받은 며느리는 化石이 되고 만다. 여기에 이야기의 묘미가 있다. 선한 자가 살아남았다면 그 사람은 끝까지 화를 면했어야 하는 게 상식인데 ‘장자못 이야기’의 경우 선한 며느리는 그만 불타산에 이르기 전에 化石이 되고 만 것이다. 然由는 며느리가 ‘뒤를 돌아보지 마라’라는 금기를 어겼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며느리가 업고 있던 아이’와 ‘금기의 위반’이라는 두 화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대목은 우리 홍수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가는 귀중한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들쳐 업은 아이를 사내아이라 설정하고 며느리가 어긴 금기를 母子相姦이라 상정한다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남매혼 홍수 설화’의 앞부분이 버젓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대로 갈수록 강화된 윤리 의식 탓에 모자상간의 화소가 탈락하였다는 것이 본 논의의 핵심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남매혼 설화는 대게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옛날 이 世上에는 큰 물이쳐서 세계는 全혀 바다로 化하고 한 사람의 生存한 者도 없게 되었다. 그때에 어떤 男妹 두 사람이 겨우 살게 되어 白頭山같이 높은 山의 上上에 漂着하였다. 물이 다 걷힌 뒤에 남매는 세상에 나와 보았으나 人跡이라고는 구겨알 수 없었다.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사람의 씨가 끊어질 수 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兄妹間에 組婚을 할 수도 없었다. 얼마동안을 생각하다 못하여 兄妹가 各各 마주서 있는 두 峰 위에 올라가서는 계집 아이는 암망을 굴려 내리고 사나이는 수망을 굴려 내렸다. 그릭 그들은 각각 하느님에게 祈禱를 하였다. 암망과 수망은 異常하게도 山 끝밑에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포개 놓은 것 같이 合하였다. 兄妹는 여기서 하느님의 意思를 짐작하고 結婚하기로 서로 決心하였다. 사람의 씨는 이 兄妹의 結婚으로 因하여 繼續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人類의 祖先은 實로 옛날의 그 두 男妹라고 한다. (1923年 8月11日 감흥부 손진태)

어떠한 이유에 의해 홍수는 일어났고, 그 결과 남매만이 지상에 남는다. 이들에게는 인류의 존속이라는 거룩한 숙명이 주어진다. 금기가 강제할 수 없는 생명의 존속이라는 거룩함의 문제가 이들에게 놓이는 것이다. 허나 습득된 도덕률에 의해 이들은 선뜻 결합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천의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각인된 때문이다. 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걸어 하늘의 뜻을 묻는다. 그리고 결국 하늘의 동조를 얻는다. 결국 이들은 자손을 잉태하고 인류의 시조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전해 듣는 ‘남매혼 설화’의 기본골격은 이와 같다.
결과는 원인을 수반한다. 결과라는 말이 있기 위해서는 원인이라는 말이 선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전해 듣는 ‘남매혼 설화’는 하나의 완성형이라 보기 힘들다. 이에 본고에서는 세 번째 유형의 홍수 설화를 ‘남매혼 홍수 설화’의 완성형 아래 두고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이끌어가고자 한다.
인류는 타락한다.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천의는 무시된 지 오래이다. 이에 하늘은 세상을 정화코자 커다란 물을 지상에 보낸다. 물은 신화에서 滅의 의미와 함께 정화, 생명의 의미를 함께 수반한다. 결과, 남매만이 남는다. 여기에서 피해갈 수 없는 첫 번째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남매인가? 세상을 정화코자 했다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존재를 남겼을 것인데 어째서 그것이 남매가 되는가? 하늘의 실수인가, 아님 우연의 결과인가? 남매간의 관계는 인륜과 천의를 거스르는 커다란 죄악이 아니던가? 하는 의문에서 머무른다면 우리에게 진보는 없다.
신화는 상징, 메타포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되는 인간 분화의 형태를 천혜숙은 兄妹관계라고 보았다. 때문에 남매관계는 인간관계의 가장 원형적인 상징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들의 결합은 ‘화합’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또한, 생각해보면 남매관계란 어떠한 티도, 어떠한 이해관계도 얽매지 않은 세상 가장 순결한 관계일 수 있다. 이를 단일민족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앞의 의미와 상보관계에 놓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즉, 남매의 결합은 우리를 ‘가장 순결한 핏줄을 이어받은 단일민족의 후손’으로 존재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남매는 하늘의 뜻을 묻는다. 이 과정은 전승과정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는데 복잡한 과정을 수반한 것일수록 후대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지고, 이는 의당 오해의 결과물이라 할만하다. 하늘의 뜻을 묻는 과정은 보통 세 가지로 분화된다. 첫 번째는 남매가 각기 다른 산에 올라 연기를 피워 올렸는데 그것이 공중에서 하나로 합해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맷돌을 굴린 이야기로 이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남매가 각기 다른 산에 올라 맷돌을 구렸는데 그것이 하나로 합해졌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처음부터 하나로 합해 굴렸는데 그것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합해 있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남매가 큰 접시에 각자의 피를 한 방울씩 떨어뜨렸는데 그 피가 한 덩어리로 엉켰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경우건 하늘의 뜻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허나 인류 스스로가 우리에게 올가미를 씌운다. 때문에 하늘의 뜻을 묻고 또 묻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경우에도 신화 단계에서의 ‘남매혼 설화’는 合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늘의 뜻을 묻는 과정이 복잡해졌다고는 하나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처럼 하늘의 동조를 얻으려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이것은 맷돌을 처음부터 하나로 합하여 산 아래로 굴린 이야기에서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合一을 꿈꾸었던 남매는 전설화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비극을 맞는다.
애초 ‘남매혼 설화’의 형태는 그다지 복잡한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금기라는 이름은, 생명의 존속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무색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人本主義 관념이 강했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은 그들에게 있어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좋지 않음’에 불과한 경험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유동적이고 유순함을 가졌던 금기는 체제 유지를 위한 규제 앞에 권력의 폭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달래강에서 자살하는 남동생을 낳기에 이른 것이다.

ⅱ. 체제의 유지-달래강 전설

여기 충주라는 지방엔 달래강이라고 하나 있는데, 달래강은 어떻게 해서 달래강인가 하믄 옛날에 이제 아들 하나, 딸 하나ㅡ오뉘를 두고 살다가서, 부모 두 분이 다 돌아가시니까 두 오뉘가 살며 농사를 져 먹으며 사는데, 원 이작에 있었는지 어짝에 있었는지 그거는 모르는데, 달래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다 보니까 소낙비가 오니까 달래강 물이 많아졌어.
과년한 오빠하구 과년한 동생하구 둘이 밭을 매. 농사를 짓다가 그래 되니까 옷을 벗구서 강을 건너오다 보니까, 그만 참(이야기를 망설이며, 조사자의 눈치를 보면서) 저어 마음에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를 벗은 걸 보니까 그 자지가 일어서니까. 그만,
“아, 이놈, 너 일어설 때 일어설 일이지, 이런데 일어서는 법이 어딨냐?”
하고 낫을 가지고 일하러 갔다가 낫으로 제 부자질 뚝 자르고,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어. 그러니까 그 동생이 하는 말이,
“날보고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하고 자꾸 울고 앉았서. 그래서 통곡을 하다 그 동생도 그만 오빠가 죽은데서 그만 죽었대. 그래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그랬다 해서 그래 달래강이라 이름을 지었어. (1979年 5月 15日, 안림동, 김영진)

신화에서 전설로의 이행 과정 중 비극성이 강조된 ‘달래강 전설’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광포전설이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에 따라 ‘달래강 전설’과 ‘달래고개 전설’로 크게 나뉘며 강인지 고개인지에 따라 남자가 정욕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강을 건너서인지 소나기를 만나서인지로 나뉜다. 위처럼 두 가지 모두가 함께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어떤 경우건 물이 性을 강조하는 화소로 등장하며 위 같은 유형의 경우 그만큼 性 의 이미지가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장인물도 남동생과 누이, 오빠와 어린 여동생, 삼촌과 조카, 중과 어린 조카 등, 그 변이가 다양하다.
홍수가 강, 혹은 소나기로 전이 되었고 남매의 결합이 실패로 끝나, 남동생(혹은 오빠나 삼촌)이 자살을 택한다. 홍수에서 살아남은 남매에게는 인류의 존속이라는 구심점이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물에 젖어 드러난 누이의 몸매에 동생이 정욕을 느낄 뿐이다. 때문에 동생의 죽음은 마땅한 결과라 하는 이들도 있다. 이 전설을 윤리의식적 측면에서 근친상간의 도덕적 타락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오누이가 결국 성관계를 갖고 그 결과로 천벌을 받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홍수를 넘어 살아남은 남매가 천의를 묻는 과정을 최대한 부풀린 결과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 도덕과 인륜이라는 탈을 쓴 규제와 금기 앞에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옭아맨 결과라는 것이다.
이 전설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견해가 엇갈리는 것이 흥미롭다. 하나는 ‘달래강 전설’을 동생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윤리 의식 강조의 결과물이라 일컬으며 근친은 반드시 회피해야하는 대상임을 이 이야기가 전한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누이의 탄식에 초점을 맞추어 여전히 생명을 앞서는 금기는 없음을 이 전설이 전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허나 두 견해는 모두 옳다. ‘달래강 전설’은 분명 후대로 갈수록 강해진 윤리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를 앞서는 인간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상반되는 화소의 충돌이라는 점이다. 이 대목은 우리의 설화가 순수한 민중만의 문학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체제는 권력의 유지를 위해 설화를 이용했고 민중은 그러한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설화를 재창조 해 낸 것이다. 때문에 이 전설에서 우리가 보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바로 죽은 동생을 끌어안는 누이의 탄식이라 할 것이다.
“달래나 보지, 죽기는 왜 죽어.”
바로 이 부분에 ‘달래강 전설’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이의 탄식은 묘한 성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 때문에 ‘달래강 전설이’ 광포전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누이의 탄식을 단지 성의 맥락에서 읽기만 해서는 ‘달래강 전설’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다. 누이의 탄식은 죽음을 택한 동생만을 향한 탄식은 아니라고 보아진다. 바로 금기와 규제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야 마는 어리석은 인류 전체를 향한 탄식으로 확대하여야만 이 전설의 의미는 바로 선다고 할 수 있다. 누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앞서는 금기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보다 앞서는 도덕이라는 것은 헌 짚신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누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질문에 봉착한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근친의 이야기인가. 근친이 금기와 체제를 거스르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인식이 있었다면 어째서 끊임없이 근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어째서 이러한 근친의 이야기가 전국에 걸쳐 분포하는 것인가? 여기에 ‘금기의 본성’, ‘금기의 선천적 모순’이 놓인다.
‘금기의 본성’이란 다름 아닌 금기를 향한 욕망을 지칭한다. 금기에 다가가고 금기를 위반하려 드는 것은 우리의 본능에 다름 아닌 행동이다. 그에 앞서, 금기를 상정하는 행위 또한 우리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금기를 만드는 것도, 금기를 어기고자 하는 것도 모두가 우리의 본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인류는 언제나 이렇듯 모순된 욕망의 터울 아래 갈등을 거듭해 왔다. ‘홍수 설화’에서 ‘달래강 전설’로의 이행은 이러한 모순된 갈등에 의한 산출품이라 할 것이다.

1.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인륜은 휴지 조각이 된다.
2. 하늘이 홍수를 일으킨다.
3. 남매가 살아남는다.
4. 하늘의 뜻을 묻는다.
5. 남매는 인류의 시조가 된다.

최초 홍수 설화의 모습은 위와 같았을 것이다. 이는 창세를 말하기 위한 신화였다. ‘세상은 정화되고 순수하고 깨끗한 한 핏줄에 의해 자손이 이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후손이다.’이로써 현 왕조의 신성성이 강조되고 정당성이 바로 선다. 신화는 언제나 그렇듯, 출발점에 놓여 체제에 힘을 싣는다. 그것은 신화의 힘이다. 이처럼 신화가 출발점에 놓여 힘을 하나로 모아 일으킨다면, 전설은 체제 유지를 위해 힘쓴다. 실질적 고증을 통해 합리적 정당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달래강 전설’로의 이행 또한 위와 같은 과정으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 최초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

6. 태어난 아이는 모두 기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위와 같이 신성성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경험의 축적에 의한 결과물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근친에 의해 기형아가 태어나는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자연히 사람들의 인식에 ‘근친=좋지 않음’의 인식이 자리 잡았고 이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위와 같은 후기가 첨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 논고는, 이를 체제의 모순이 빚어낸 결과라고 주목한다. 체제가 서고, 윤리와 도덕이 발생하고, 지배체제의 원리로 유교가 받아들여지면서 ‘근친상간’은 우리가 접근해서는 아니 될 최고 ‘금기’ 중의 ‘금기’로 자리매김한다. 세대를 이어나고 세계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본능이 誤讀에 의해 도덕과 천의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바로 지배체제의 폭력이 은밀히 고개를 든다. ‘은유’와 ‘상징’이라는 달콤한 혀 놀림 아래 ‘위반=죽음’이라는 등식의 칼날을 감추어 둔 것이다.
전설은 증거로 뒷받침되는 사실적 근거와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 믿기 어려운 허구적 내용이라는 상반된 현상이 하나의 이야기에 공존하고 있는 기묘한 긴장관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이 바로 전설이 갖는 매력이라 할 것이다. 비록 믿기 어려운 허구적 이야기라 할지라도 전설이 구비한 구체적인 증거로 인해 전설은 어느덧 민중들 사이에서 믿음화, 경험화 과정을 겪는다. 허구적 내용을 실제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주는 기묘한 공존은 전설의 문학적 특질이자 미학적 기반으로 작용한다. 체제는 이러한 기묘한 긴장관계를 자신들의 권력의 유지를 위해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체제의 합리적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움직임은 신화를 전설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사실적이고 현실적 공간을 통해 금기에의 위반은, 아니 금기에의 위반을 꿈꾸는 접근만으로도 그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는 암시가 전설의 모습을 하고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다. 이 앞에서 개개인 生의 존엄성 따위는 무시 되고 만다. 그래서 누이는 체제 아래 죽어간 어리석은 우리를 끌어안고 체제를 향해, 체제에 순응하는 우리를 향해 절규한다.

ⅲ. ‘자신의 젖으로 나그네 살리는 여인’ 설화
앞서 언급한 바처럼, 선조들의 삶에 있어 금기는 단순한 ‘좋지 않음’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생을 넘어서는 금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또 다른 광포 전설인 ‘젖으로 목숨 살리는 여인’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박어사가 그 어른이 예전에 어사가 다녀도 옷도 잘 안 입고 다니니까 알아보지도 못하지. 그 사람이 어사인지 모르는기지.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자기 일이 바빴는지 밥도 변변치 먹지 못하고, 노잣돈도 아마 다 떨어졌다보지. 일을 너무 많이 하려하니까. 계속 걷는데 너무 허기지고 지친게야. 가다보니 배가 너무 고파서 쓰러져 길에 엎어져 있었지. 물 길으러 온 아낙이 보구선 어던 사람리 엎어져 있으니 부인이 그 부인이 우리의 시조분이시지. 부인이 보니까 마패가 있거든. ‘옷차림이 허술해도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싶었지.
“와 이래 있나?”
“시장기가 있어서 그런다.”
그러더래. 자기도 가지고 있는 돈이 없어서 마음이 안돼서 뒤로 돌아서 윗도리를 벗고 자기 젖을 빨아서 그 사람에게 먹여 그 사람을 살렸지. 한 모금 마시니 그 사람이 살았지. 그 젖을 먹고 힘이 좀 되어,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 가게 되어 살게 되었지. 어사 박문수가 말이지. 근데 그 일이 알려 지면서 시집을 못 갈판이다. 부정하다고. 거지를 말이지 젖을 짜가지고 주니 마 소문이 나가지고 전쟁으로 남자도 없는데 시집을 못 갈판이되었지. 소문이 크게 나가지고 그 소리가 어사 박문수한테도 들어가지게 됐지. 이제 고을 반장한테 어사가 가가지고 거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며, 내가 어사 박문수다. 원님이 그 사실을 알고 동네 사람들에게 다 말하고 그 여인에게 불러다가 상을 줘야겠다 해서 그 동네에는 어사 박문수를 살린 비석이 있어. (2000年 4月 12日, 용덕면 정동리)

위 이야기는 ‘박문수 설화’의 하나로 이 역시 전국 각 곳에 분포하는 ‘자신의 젖으로 나그네 목숨 살리는 이야기’ 유형에 해당하는 광포 전설이다. 여러 유형이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한 나그네가 허기가 져 쓰러져 있다.
2. 곁을 지나던 여인은 자신의 젖을 물려 나그네를 구한다.

윤리와 도덕을 목숨보다 중시 여기던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젖을 꺼내 들어 외간 남자에게 물린다는 것은 ‘근친상간’ 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버금가는 ‘금기’라 할 만하다. 하지만 수많은 이야기 속의 여인은 배고파 쓰러진 나그네를 향해 자신의 젖을 기꺼이 꺼내 물린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인은 홍수 앞에 살아난 남매가 혼인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는 하늘과, 자신의 성기를 찍어 죽음을 택한 동생을 끌어안고 탄식하는 누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들에겐 모두 ‘금기’를 앞서는 생명의 존엄에 대한 人本主義가 깔려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강요된 도덕률은 우리에게 내재한 도덕을 굴복시키고 만다. 체제의 유지를 위해 유동성을 수반하는 관념은 지배체제에 있어 어디까지나 불안요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권력은 신화를 전설로 변형 시키고 전설을 체제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에 전설의 비극성이 발생한다. 또한, 이러한 비극성은 무수한 반복의 과정을 거쳐 ‘도덕’이라는 탈을 쓰고 ‘경험’이라는 굳건함으로 재생산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ⅳ. 《올드보이》신화로의 재생산
이러한 신화의 전설화 과정은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새로운 체제가 설립되면 그 곳엔 언제나 신화가 발생하고, 체제의 유지를 위해 수많은 전설은 재생된다. 하지만 민중은 권력층의 생각만큼이나 우매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금기’에 다가가고 ‘금기’를 파헤치고 ‘금기’를 위반한다. 홍수를 넘어 살아남은 남매가 정당성을 얻어 새 세상을 열었듯이 《올드 보이》의 두 주인공은 ‘사랑’이라는 무기를 정당성으로 내세워 금기에, 권력에 대항한다.
설화가 민중의 사상과 감정을 대변하는 문학이었듯 영화는 대중의 사상과 감정을 대변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두 매체는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이나 기아를 비롯한 각종 國亂이 있을 경우 설화 문학은 우선 그 양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맞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설화가 민중의 억눌러진 욕망과 꿈을 표출하고 민중을 위로하기 위한 장르로 존재하는 특성 때문이었다. 영화 또한 대중의 욕망을 표출하고 대중의 여흥을 위한 장르라는 점에서 위와 같은 현상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IMF와 같은 경제난 이후《아버지》류의 가족 영화가 붐을 이루었던 것이 사실이고 공화국 시절의 정치적 억압을 겪던 혼란기에는 《영자의 전성시대》와 같은 호스티스 영화가 붐을 이루었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고 있으며 때문에 민중, 대중의 감정 또한 일정한 반복을 겪는다. 인류의 초대 관심이자 최대관심이었던 ‘금기’의 문제는 오랜 세월을 걸쳐 돌고 돌아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 다시금 최대의 관심거리로 등장하게 된다.
《올드 보이》는 ‘남매혼 설화’의 변이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적인 이야기 줄기가 단지 근친의 이야기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둘의 상관성을 찾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영화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두 텍스트가 근친이라는 소재뿐 아니라 텍스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 주제를 향하는 방식이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남매혼 설화’와 《올드 보이》의 화소분석을 통해 두 이야기의 상관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등장화소는 ‘홍수이야기’이다. 설화 속의 홍수는 영화에서 오대수의 감금으로 변이되어있다. ‘달래강 전설’에서처럼 물이라는 공통분모는 사라졌지만 오대수의 감금은 ‘절대적 고립’이라는 이름으로 오대수가 밀실을 나온 후 미도를 만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근친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둘의 역할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화소는 하늘의 뜻을 묻는 과정이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하늘의 뜻을 묻는 과정은 자신들의 근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대수와 미도는 끊임없이 우진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그의 뒤를 쫓는데 이러한 고난을 함께 겪는 과정에서 미도의 정신세계는 극도로 흔들리고 미도는 자연히 대수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기대려든다. 이는 오대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 사람의 이러한 마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여 둘의 근친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홍수 뒤에 살아남은 남매에게 인류의 존속이라는 문제가 사람 된 자의 본능과도 같았던 것처럼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사람 된 자의 본능과도 같은 문제인 것이다. 결국, 천의를 묻는 과정은 영화 속에서 미도와 대수가 우진을 쫓으며 겪는 숱한 고난의 과정으로 변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비교화소는 근친의 결과인데 이는 ‘남매혼 설화’의 변이형인 ‘달래강 전설’과의 비교를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달래강 전설’의 경우 남동생은 누이의 몸을 보고 정욕을 느끼고 결국 성관계를 맺기도 한다.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하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영화 속의 우진과 그 누이인 수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과 관계를 맺는 대상이 자신의 친 동생, 친 누이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고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누이는 오대수에 의해 삽시간에 퍼진 소문 때문에 결국 상상임신을 하게 되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여기에서 소문이라는 화소는 하늘을 대신하여 누이에게 내려지는 벌로 상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러한 벌이 천의가 아닌 권력체제의 강압적 폭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누이에게 있어 소문으로 인한 상상임신은 결국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절대적 존재의 잔인한 폭력임에 다름없는 것이다. 하늘의 심판을 받고 죽음을 당하는 남매에게도 그러한 천벌은 절대적 체제의 강압적 폭력임에 진배 아닌 것이었다. 동생 우진 역시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달래강 전설’의 기본형에서 보이는 죄책감에 의한 선택은 아니다.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죽은 동생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는 누이가 내뱉는 세상을 향한, 체제의 강압적 폭력을 향한 외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대수와 미도는 어떠한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들은 근친이후에도 버젓이 목숨을 부지했으며 또한 이들의 사랑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같은 근친임에도 불구하고 어이하여 이들은 살아남아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제 영화는 전설에서 신화로 거듭난다.
미도와 대수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엮어진 듯 보이고 이는 우진과 수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대수와 미도가 단지 사랑뿐인 관계였다면 이들 역시 영화 속에서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최초 이들의 만남에는 이들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이 개입되어 있었다. ‘감금’과 ‘최면’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만남은 자력이 아닌 타의에 의해서였고 또한, 이러한 만남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남매혼 설화’에서의 오누이처럼 면죄부를 획득한다. 하지만 이에도 대가는 따른다. 오대수는 우진과 수아에게 천벌을 내리는 역할을 담당했던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잘랐으며 자신의 기억마저 지워버리고 만다. 오대수는 이 부분에서 우진이 했던 물음에 대한 답을 택하고 있다.
“알면서도 사랑할 수 있을까?”
오대수는 알면서도 사랑을 택했지만, 부조리한 현실, 억압적 폭력 아래에서 모든 걸 알면서도 사랑을 유지해 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한 일침이다. 영화는 아이러니한 방법론을 통해 금기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금기에 다가간 인물들은 모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 내야만 했다. 오직 미도만이 그 대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이는 그녀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신의 대리인을 수행하려 했던 자들의 순수한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금기에의 접근=죽음’이라는 공식은 영화에서도 통용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대중의 예술인 영화가 체제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전설로 거듭난 것이 《올드 보이》인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섣부른 판단이다. 결과적으로 금기를 위반한 인물들은 죽음을 맞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이러한 죽음은 세상으로부터 강요되고 습득되어진 도덕률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체제의 폭력이 가진 모순을 온 몸으로 토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대수가 혀를 자르고 기억마저 잃는 대가를 치루면서도 미도와의 사랑을 택하는 것,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수가 미도를 안고 짓는 웃음은 바로 이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공통 화소를 통해 결국 영화 《올드 보이》는 ‘남매혼 설화’나 ‘달래강 전설’에서처럼 체제의 유지를 위해 금기가 전설화 되는 것을 비판하고, 전설을 다시 신화 단계로 소급하여 금기의 위반에 합법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려 한다. 대중은 민중이 그러하였듯이, 끊임없이 체제의 억압에 대항하여, 전설을 전복하고 그들만의 새로운 신화를 써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달래강 전설’이 광포 전설이 되었듯 오늘날 한국의 대중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었으며 한국을 넘어 세계 각국에서도 찬사를 받았다.

Ⅲ. 결론-금기, 도덕이라는 이름의 폭력

남매간이라 하더라도 인간도 동물인 이상, 자연히 정욕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것이다. 모자나 부녀간을 제외하고 최초로 경험하게 되는 이성관계가 남매인 것에도 그 이유가 있겠지만, 성욕을 느끼는 대상의 성적 매력 면에서도 어버이와 자식보다는 남매간이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러한 근친의 관계는 경험의 축적과 더불어 인류에게 좋지 않음의 의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여기에 최초 금기가 발생한다. 하지만 앞서 논의된 바 있듯이 이러한 금기는 어디까지나 유동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근친이라고 하는 모티브는 오리려 신성성을 강조하는 신화의 공간에서 그 생명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허나, 사회의 규모가 확대되고 거기에 따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생성됨에 따라 ‘금기’는 강제의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신화로 인한 체제의 정당성만으로는 체제의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지배계급은 다스림의 효율성이란 명분으로 신화를 전설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통해 피지배계급을 강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금기에는 ‘도덕’과 ‘윤리’라는 명분이 씌워졌고 이것을 지키는 일이 사람 된 자의 미덕이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 아와가 에덴동산의 사과를 베어 물은 후 ‘금기’는 인류에게 있어 영원히 다가가선 안 되는 존재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다가가고픈 모순적 존재로 굳건히 자리매김해 왔다. 이러한 모순을 통해 금기는 숱한 신화와 전설로 재생산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류 최고의 관심일 수밖에 없는 특성 탓에 신화와 전설로의 재생산은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고, 체제는 자연히 이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권력의 형성과 유지에 금기의 신화와 전설을 접목하여 자신들의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폭력과 위협으로 피지배층을 사육하려 들었다. 홍수 설화에서 살아남은 남매가 낳은 기형아, 달래강에서 죽어간 남동생, 그리고 《올드 보이》속의 우진과 수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창출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민중은 체제에 의해 변형과정을 겪는 신화와 전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체제의 폭력과 억압에 맞서왔다. 죽은 동생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누이, 자신의 혀와 기억을 상실하면서도 미도와의 사랑을 택하는 오대수는 바로 이러한 저항이 빚어낸 새로운 신화라 할 수 있다.
변혁을 위한 새로운 신화의 창조는 혼돈이다. 이러한 혼돈은 숱한 생채기를 낼 것이다. 허나 그 생채기에 딱지가 앉고, 다시 그 딱지가 떨어져 새로운 생채기가 나는 과정을 거듭할수록, 우리는 ‘금기의 폭력’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자유로워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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