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신문 약사

동대신문은 해방직후인 1947년 ‘동국월보’라는 타블로이드 4면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지면에 실린 논문 몇 편이 정치적으로 불순하다는 점 등으로 배부되지도 못한 채 압수됐고, 동국월보는 발행이 중지된다.

그리고 4년 뒤인 1950년 4월 15일 대판 4면 체계를 가진 동대신문 창간호가 발행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해 6월 2호 조판 중에 6·25가 발발해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1952년 6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어렵게 타블로이드 4면의 2호를 발간하게 되었지만 조연현 동문의 ‘동국대학과 나’라는 글이 학교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배부되지 못한 채 보일러실에서 불태워지고 만다.

결국 피난 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온 1953년 4월, 양주동 교수의 지도로 3호부터 타블로이드 4면의 동국월보를 속간했고 1954년 6월 20일 공보실로부터 정기간행물 291호로 허가받는다. 또 1960년 10월 주간제를 두고 초대주간에 정태용 동문이 취임했으며, 1961년 7월 5일 ‘깨져 가는 운동장의 꿈’이라는 대학신문 최초의 호외를 발간했다.
동국월보는 1955년 7월 7일 ‘동국시보’로, 다시 1962년 7월 6일자에 이르러 ‘동대신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동대신문은 1963년 학생들의 학술연구열과 창작의욕을 한층 더 북돋아 참신한 학풍을 수립하는데 이바지하고자 동대학술상을, 또 10대 문학도의 의욕을 북돋아 한국문단의 내일을 풍요롭게 하려는 생각으로 전국고교생 문학콩쿠르를 각각 제정했다. 1965년에는 영자신문인 동국포스트를 자매지로 인수, 한 가족이 되었으며 1979년에는 경주캠퍼스에 신문사를 개설하여 경주캠의 소식을 보다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80년대에는 대학언론 역시 자유롭지 못해 ‘전두환’의 ‘전’자만 실려도 배포중지될 정도였고 본지 765호(80년 5월 13일자) 1·2면에 실린 유신독재 반대 각계 시국선언문은 주요내용이 삭제된 채 여백을 남기며 게재된다.

또 4·19기념호로 발간 예정이었던 853호는 당시 시위기사와 4·19의 민주정신을 기리는 동우탑 추모행사, 4·19와 관련된 사설이 문제시되어 배포 금지당하기도 했다.
이런 탄압 속에서도 1986년 들어 기존 학술상에 포함되어 있던 창작문학상을 동대문학상으로 독립시켜 그 위상을 한층 높였으며, 1988년 9월 13일에는 전국 대학들 중 여섯 번째로 지령 1천호를 발행하는 과업을 이루었다.
하지만 지난 96년 10월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학생들의 생각을 여과없이 싣는 낙서판인 ‘소나기’는 무장간첩침투사건에 대해 다루었고 이에 대해 이적성의 혐의가 있다고 판단, 정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당시 편집장과 관련기자 1명을 구속했으며, 이로 인해 약 한달 동안 신문이 발행 되지 못하는 위기가 있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98년도 1학기부터 동대신문은 자체 조판이 가능한 매킨토시를 구입했고 원고 작성부터, 입력, 편집까지 전 과정을 신문사에서 작업했다. 또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해 지면이 아닌 모니터를 통해 동대신문을 만나볼 수 있게 하였다.
이밖에 1999년에는 기존 한문제호를 한글제호로 바꾸고 8면과 12면의 교차발행을 실시해 더욱 다양한 내용을 담아내는 신문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고 있다.

한편, 신문사는 처음 본관 1층에 위치했으나 1972년 2월 사무실을 학생회관으로 옮겼고 올해 2월 V동 1층으로 이전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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