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사회와 자연적 삶의 고찰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은 로렌스(D. H. Lawrence, 1885-1930) 가 쓴 10여권의 소설 중 마지막 소설로 출판 때부터 숱한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 이유는 예술성은 전혀 없는 외설물이라는 낙인이 찍혀 로렌스는 영국 작가이면서도 이 소설을 이탈리아에서 출판(1928)을 해야 했다.

그 이유는 영어를 아는 식자공이 그토록 ‘더러운’ 책의 인쇄작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 낱말을 전혀 모르는 이탈리아 식자공이 작업을 한 까닭에 이 소설의 첫 판은 오자 투성이었다. 게다가 출판되자마자 영국과 미국에서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러한 조치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 소설을 찾았으므로 이 책은 파리 등지에서 해적판이 수십 판에 걸쳐 판매되었고 소위 점잖은 사람들의 침실 베개 밑에도 숨겨진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로렌스에게 돌아온 것은 물질적인 이득이 아니라 그의 작가정신을 아프게 하는 비난과 악명이었다.

이러한 수난은 1960년에 와서야 멈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작가 로렌스가 타계한지 이미 30년이 지난 후였다. 이 소설이 출판된 지 32년이 지난 1960년에 영국의 펭귄 출판사가 이 소설을 악명 높은 장면을 삭제하지 않은 채, 원작 텍스트 그대로 출판하기로 결정하였고, 영국의 외설물 검열관은 이에 대응하여 펭귄 출판사를 고소하였다. 그 결과 외설물 시비를 가리는 재판이 6일간에 걸쳐 열렸다. 사회 인사들이 거의 자발적으로 법정에 나와 이 소설의 예술성을 옹호하는 진술을 했다.

이 중에는 문학비평가, 저술가, 문화 비평가, 대학교수 등 무려 35명에 이르는 사상가들이 소설 텍스트에 관한 검사의 집요하고도 세세한 질문에 답하며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증언했다.
배심원들이 이들의 증언을 듣기 앞서서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매우 엄격히 제한을 받아 그들은 책을 집에 가져가지도 못하고, 재판관이 지정한 일정한 장소에서 각자 떨어져서 읽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숙독한 배심원들은 일주일에 걸친 증언을 들은 후에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결과는 외설물이 아닌 예술적 통일성을 지닌 작품으로 인정받아 그 이후 이 소설은 원작대로의 텍스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 이후 이 소설은 많은 비평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소설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이 과거의 평가 과정의 영향을 받아 이 소설이 음란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는 문제가 되었던 남녀간의 육체적 관계의 묘사가 분명 에로티시즘을 담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주의의 구현이라고 주장했다. 또는 이 소설을 산업주의에 대항하여 인간의 몸에 바탕한 인간구원의 텍스트로 읽기도 했다. 최근에는 학문이 자연 친화적인 방향으로 변하면서 자연 친화적인 텍스트로 읽고 있기도 하다.

사실 이 소설은 대칭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환경 파괴적인 산업사회와 자연적 삶의 양식이 대칭을 이룬다. 구체적으로는 테버셀(Tevershall) 탄광마을과 래그비 저택(Wragby Hall)이 산업주의의 기계적인 삶을 대변하며 이에 반하여 그 주변을 에워싼 래그비 숲이 자연과 유기적인 삶을 대변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비는 가시적인 외형적인 환경에 그치지 않고 인물설정에서도 드러난다. 래그비 저택과 테버셀 탄광의 소유주인 클리포드 채털리 경(Sir Clifford Chatterley)은 반생태적인 인물이고 반면에 래그비 숲의 사냥터 지기인 올리버 멜러즈(Oliver Mellors)는 친환경적인 인물로 설정된다.

이러한 배경과 인물설정을 토대로하여 르네상스 이후 서구사회를 주도해온 인간중심의 사유가 배태한 문명이 얼마나 반자연적이며 반생명적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의 화자(narrator)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근본적으로 비극적인 시대인데 그 이유는 인류사회에 대재앙이 덮쳤을 뿐 아니라 이를 비극적이라고 인정하기를 현대인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 바로 클리포드와 같은 ‘프로메테우스적 진보’만을 신봉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에게 자연은 인간의 이득을 위해 정복해야할 대상에 불과하다.

로렌스는 화자의 눈을 통해 여주인공 콘스탄스(코니) 클리포드가 이러한 대재앙의 상황에 처해있음을 밝힌다. 그녀가 클리포드와 결혼 후 신혼여행을 마치자마자 일차대전이 터지고 남편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하반신이 불구가 된다. 로렌스는 이러한 클리포드의 하반신 마비가 그와 같은 계층의 대부분의 인간들의 보다 깊은 정서적이고 열정적인 마비를 상징한다고 말해 그의 불행이 단순한 일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 않음을 시사했다.

클리포드는 하반신 마비를 당하는 와중에서 ‘그 안의 무엇인가가 사멸되었고 감정적인 면이 사라져 무감각한 공허가 생겼음’을 깨닫는다. 산업문명을 추진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과학과 기술이 육체가 배제된 이성의 산물임을 상기할 때 클리포드의 하반신 마비는 산업문명의 특성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남편의 마비된 하반신을 가슴으로 끌어안아 그의 몸을 들어 다른 휠체어에 옮기고 책을 읽어주는 등의 일상생활을 반복하던 코니는 자신에게서 점차적으로 생명력이 소진됨을 감지한다. 래그비 저택과 탄광촌의 광부들 사이의 진정한 교류가 부재한 현상은 이들 부부 사이에서도 생긴다. 남편은 코니에게 래그비 숲과 저택을 물려줄 아들을 낳아주기를 원한다. 그에게 그 아기가 누구의 아기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코니가 겪을 인간적인 유대와 관계는 단지 기능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클리포드에게 아기는 그것(it)으로 지칭되어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되지 않음을 드러낸다.

코니의 유일한 피난처는 래그비 숲이 되고 그 속에서 태고적 우수를 느끼며 위안을 받는다. 그녀가 산지기인 멜러즈가 기르는 꿩과 갓 깨어난 그 새끼들을 보면서 이와 대조되는 자신의 황량한 삶에 울음이 솟구친다.

이러한 그녀를 멜러즈는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두 사람은 자연스레 사랑을 나누게 된다. 멜러즈와의 관계는 그녀가 남편과 갖는 무생명적인 메마른 삶과 대조적이다. 그녀가 멜러즈와 처음 육체적 관계를 가진 후 그녀에게 비친 숲은 더 이상 죽은 듯한 잿빛의 것이 아니다. “저녁 부슬비가 내리는 숲은 적막했으며 은밀했다. 숲은 신비로운 빛을 띠고 갓 피어오르는 꽃들로 가득했다. 지상의 초목들은 초록색깔을 입고 흥얼거리며 합창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숲에 대한 인식은 그녀가 멜러즈와 갖는 성적 관계가 충만할 때 우주적 의식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바로 이 경지가 생태학적인 조화와 공존의 관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로렌스는 남녀간의 육체적 관계에서 우주와 같은 리듬을 타는 생명력의 발로를 읽어낸다. 코니가 성교의 절정에서 내지르는 외침은 숨막히는 래그비 저택을 벗어나 열려있는 미지의 자연 세계와 합일하는 재생의 목소리이다.

이들의 육체적인 관계를 로렌스는 마치 우주적인 리듬을 타는 파도의 신비스런 물결로 묘사했다. “마치 [코니는] 바다 같았다. 검은 파도만이 커다란 물결을 지으며 넘실거렸고 그녀의 검은 물결 전체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어둡고 소리 없이 물결치는 커다란 대양이었다. 아, 그녀의 저 깊은 곳에서 심해가 갈라지고 길고도 멀리까지 뻗치는 물결을 지으며 넘실거렸다…그녀의 몸은 더 깊숙이, 깊숙히 까지 드러내었고 더 큰 그녀의 파도가 어떤 해안에까지 밀려갔다…마침내 갑자기 부드럽게 떨리면서 그녀의 원형질의 알맹이가 만져졌다…절정이 이루어졌고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는 사라졌고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 여자로 태어났다.”

이러한 언어적 표현은 사실 성적 황홀경을 묘사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나 로렌스는 이러한 성적 관계에서 일·개인의 육체적인 만족을 에로틱하게 묘사하는 차원에 머무른 것이 아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육체가 우주적 조화의 원천임을 전달함에 있다. 로렌스는 에로티시즘의 작가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육체야말로 기계적인 산업사회의 폭력을 이겨낼 유일한 방도이며 친자연적인 참 삶을 열어주는 인간적 길임을 갈파하고 있다.

김 정 매
문과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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